<그대, 그리고 나>였던가, 제목이? 아니면 <그대, 나, 그리고 우리>였던가?
아무튼 박상원. 차인표. 송승헌이 최불암의 아들 삼형제로 나왔던 그 드라마를 나는 보지 않았었다.
나중에야 그 드라마가 강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미묘하고도 복잡한 감회에 빠졌다.
강구는 내게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곳이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 여름휴가 때, 포항에서 강릉까지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출발할 때는 마냥 화창하기만 하던 하늘이 언제부터인가 회색으로 바뀌더니, 아주 어둑어둑해졌다가 또 이내 햇빛이 쨍쨍거렸다 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렇잖아도 긴 버스여행이 그렇게 변덕스러운 하늘 때문에 더더욱 길고 풍성하게 느껴졌다.
산뜻하게 푸른 바다도 좋지만 그렇게 흐린 바다도 괜찮았다.
적당히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 후덥지근한 공기, 나른하게 펼쳐진 바다.... 몽환적인 여행이었다.
버스가 어느 소읍을 지나칠 때, 문득 나는 얼핏 눈에 들어오는 풍경에 매혹되고 말았다.
아주 평범한, 그러나 어쩐지 몹시 마음을 끄는 어촌 풍경이 차창 옆을 스치고 있었다.
나는 한순간 버스기사에게 차를 세워 달라고 고함을 지르고픈 충동을 느꼈다.
고함은 지르지 않았지만 '강구'라는 그곳의 지명을 나는 용량이 부족한 내 머리 속에 단단히 입력해 두었고 언제고 그곳을 다시 찾으리라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몇 달 뒤에 나는 입대를 하였다.
내가 근무하던 부대는 전방 철책선 부근이었다.
민간인은 구경도 할 수 없는 그곳에서 나는 3 년 내내 폐소공포증에 시달려야 했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그 허허벌판에서 말이다.
일없이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한 곳에 억지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삶 자체가 밀실인 것이다.
철모에 탄띠를 두르고, 한 손에는 M1인가 M16인가 하는 소총을 들고, 시선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대대장 지프차에 대비하여 항상 산모퉁이 쪽에 둔 채, 나는 비록 발은 위병소에 묶여 있었지만 마음은 전국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여행지는 강구였다.
강구(江口). 강으로 접어드는 입구.... 이건 바다 쪽에서 본 시각이었다.
이는 강구가 근본적으로 어촌이고 그곳의 삶의 중심이 바다에 있음을 가리켰다.
비록 그곳을 직접 발로 밟아 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작은 어촌의 바닷내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바다를 향해 뻗은 야트막한 두 개의 언덕. 그 언덕들은 고만고만한 집들로 덮혀 있고, 두 언덕의 둑길을 둥근 곡선을 그린 나무다리가 잇고 있다.
돛단배들이 묶여 있는 뒷편으로 맑게 부서지는 아침바다가 보인다....
내 기억 속에서 그곳의 바다는 항상 그렇게 잔잔하기만 했다.
그렇게, 내 환상 속에서 강구는 점점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고장으로 격상돼 갔다.
제대를 한 그 해 여름, 나는 다방에서 웨이터 아르바이트를 하여 모은 돈으로 여행을 갔다.
첫 목적지는 물론 강구였다.
'너무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 넌 필경 실망할 거야. 그곳은 네 생각만큼 그렇게 황홀한 곳은 아닐 거야.'
그렇게 조심스러운 마음의 준비도 소용없었다.
3년 전의 푸근한 회색 하늘 대신 늦여름의 직사광선이 쏟아지는 풍경 속으로 첫 발을 내려디뎠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바다를 향해 길다랗게 뻗은 두 언덕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넓직한 강 양편 기슭을 따라 마주보는 두 마을이 있었고, 아담한 나무다리 대신에 아스팔트가 깔린 철교가 그 두 곳을 연결하고 있었다.
돛단배 대신 조선소인지 수산물 가공 공장인지 공장 굴뚝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한적하고 아늑한 어촌? 세상 모든 어촌이 한적하고 아늑할 수 있어도 이곳은 그런 표현에 해당되는 곳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강구에 대한 내 상상은 도대체 지리 법칙에도 맞지 않는 것이었다.
바다로 통하는 강의 폭을 나무다리가 가로지른다? 그건 강이 아니라 개울일 터였다.
기억과 현실 사이의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불일치 때문에 ㅡ혹은, 가학적으로 이글거리는 땡볕 때문에ㅡ 나는 현기증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내 여행은 실패로 돌아갔다.
나는 나의 강구를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후일 나는 엉뚱한 곳에서 나의 강구와의 재회를 이룰 수 있었다.
샘터사에서 낸 <구름에 달 가듯이>라는 여행 가이드북에 실린 한 사진 자료에 내 상상도와 꽤 정확히 일치하는 풍경이 있었다.
나란히 뻗은 두 갈래 둑길, 그 사이에 걸린 아취형 다리, 그리고 돛단배....
그곳은 강구가 아니라 남도의 어느 소읍이었고, 그것도 몇십 년도 더 과거에 존재했던 풍경이었다.
물론 군대 가기 전에도 나는 그 책을 들고 다녔었다.
그러니까 군대 삼 년, 사회와의 접촉이 일체 차단된 비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평화로운 어촌'이라는 이상형에 강구를 억지로 맞추었던 것이다.
그리고 코르셋에 여자들의 몸이 적응하듯, 강구는 내가 생각하는 강구를 향해 변모에 변모를 거듭하여 규모에서 지형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탈바꿈을 한 것이다.
내 기억 저 밑바닥에 깔려 있던 흐릿한 흑백사진을 모델로.
나는 나만의 강구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어촌의 모습을 한 강구를.
그리고 그 가공의 강구야말로 진정한 '강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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