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오늘 역사시간에 들었는데
야인 김드한 뭐 장군의 아들이다 뭐다 야인시대까지........정의의 협객을 하면서
엄청 매스컴을 탓던 영웅이죠.....근데 사실은......전설의 구라쟁이랍니다.
청계천 다리밑의 한거지가 자신은 백야 김좌진의 아들이다! 라고 하면서 다녔다고
하죠 하지만 사람들은 무슨 개소리냐등 콧방귀도 뀌지 않았지만....
한국전쟁등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그것의 사실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그대로 믿었다고 합니다.
근거1(명인옥중기 책에서 김두한이 자기 출생의 이야기한 부분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나는 고균 김옥균을 조부로 백야 김좌진을 부친으로 모시는, 당대 세도가 당당했던
이르나 명문 안동김씨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 부친계서는 일찌기 고균 할아버지에게 양
자로 가셨기 때문에 나는 법률상으로 고균의 직계가 된다.
고균 김옥균 갑신정변의 주범으로 삼일천하라는 역사적 사실만을 남겨둔체 나라에
쫏겨 일본으로 망명한 인물이죠.
김두한이 고균 김옥균의 손자고 그의 아버지 김좌진은 김옥균의 양자로 들어갔다고
하는데.....이게 어떤 증인도 증거도 없는 김두한만의 주장이라고 합니다.
김옥균이 1884년 일본에 망명해 있다가 1894년 암살되었죠.
김좌진은 1889년 충남 흥성에서 태어났는데 어떻게 양자로 들어갈수 있겠습니까?
근거2
부친께선 두 손을 들고 일경 앞에 항복하는 양 꾸미고 수갑을 채우려는 일경 3명을
한꺼번에 때려눕혔다. 그리고 그들이 소지했던 권총을 나꿔채 수연발을 공중 발사하여
적을 자신에게 집중시킨 후 신상의 동지들에게 대피로를 마련해 주고서, 자신도 피
하기 위하여 달아날 수 있었다.
발악하는 추격대들을 뒤로하며 허둥지둥 문안에 들어선 아버님은 갈 곳이 없었으나
지금의 사직등에 자리잡고 있던 당시의 양반촌에 들어 가셨다는 것이다. 1초를 다투는
위기에서 아버님은 어떤 양반집의 담을 뛰어 넘고 안에 들어 가셨다.
그 운명의 집이 나의 산실이었다. 내 외조모꼐서는 궁정의 상궁이셨고 딸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내 생모가 되신다. 호각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밖은 철통같은
경비망이 퍼졌다.
나의 선친꼐서 뛰어든 방은 규중처녀 박상궁의 딸 박계숙의 공부방이었다.
놀란 어머님께서는 강도가 침입 한 줄 알고 안채에 연결된 요령줄을 흔드시려는
찰나 선친께서...
망해가는 조선 왕조의 상궁이지만(조선시대에 궁에 들어가면 일단 죽어서야 나갈수가
있죠)상궁이 딸 가졌다는(김두한이 태어난 1918년 생이라는데 1890년대 말에
그딸아이가 한두살이라는 말이다.)이런 소리는 김두한만이 주장한던 말이라죠.
또 양녀라고 할텐가?
근거3
그리고 난 뒤에 나의 외조모와 모친께서는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궁리 끝에 데리고
있던 하인들을 재 신상의 이유를 달아 즉일로 하향시키고 모녀가 순수 부친의
시중을 드신 모양이다. 이때 생겨난 운명아가 바로 나 김두한이다.
그러니까 부친께서 이렇게 6개월 동안 피신 생활을 한 뒤 홀연 渡滿(도만)하실
때에 모친께서 이미 태아가 있음을 고하자 부친은 아들을 낳으면'두한'이라 이름
하고 딸을 낳으면 '두옥' 이라 부르라고 하시면서 집을 떠나셨다고 휴일 나의 모친꼐서
말해 주셨다.
다만 일곱 살 때까지, 그러니까 교동 보통학교 2학년에 다니던 때까지는 그래도
외조모님과 어머님의 알뜰한 사랑 속에서 클 수있었다. 그러나, 저 세계
전사상 희귀한 청산리 대첩이 있자 일경은 즉각 외조모님과 모친을 투옥했다.
그래서 나는 말 그대로 천애 고아가 됐던 것이다. 그리고 열살 되던 해에 불망의
독립군 대장인 부친의 별세를 전해 듣고 울었다.
김두한은 1918년 생이고, 김두한 7살때는 1925년이고, 청산리 전투는 1920년이고,
김좌진의 사망은 1930년이다. 김두한이 참 이러갔다 저리갔다 하는것 같다.
-안타조선 사이트 '우리모두'의 동호회 역사랑방'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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