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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후배 여자친구 빼앗기.

작성자
Lv.23 달디단
작성
16.04.01 10:29
조회
1,216


 담장들에 드문드문 남아있던 시든 장미꽃잎이 모두 사라지고 낮은 산등성이를 하얗게 물들이던 아카시아 꽃의 흔적들도 사라졌다. 들과 숲은 짙푸른 녹음으로 뒤덮이고 세상이 뜨거워지기 시작할 무렵, 남쪽에서는 장마전선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남아있던 봄이 모조리 끝났다. 


 그 시절 이야기.


 골치 아팠던 기말고사가 끝나고 꼭 만나야 할 후배가 있었다.  



 ‘야. 좀 보자’


 ‘예! 형. 애들 모을까요?’


 ‘아니, 둘이 보자’


 ‘둘이요?’



 눈치가 없는 녀석이다. 아니. 눈치가 아주 없는 녀석은 아닌 것 같은데, 스스로도 아는 걸 미련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녀석일지도 모른다. 더 늦어지면 서로가 불편해질 것 같아서 서둘기로 했다. 더 끌어서 좋을 게 없다는 건 녀석도 알겠지. 


 녀석이 우리 집 근처로 오겠다고 했지만, 내가 녀석의 집 근처로 찾아갔다. 이 정도면 녀석도 내가 오늘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그래야 대화하기 더 수월할 테니까. 


 꼬치나 어묵 말고는 먹을 만한 안주가 없는 테이블 네 개짜리 작은 술집에서 만났다. 한쪽 테이블에는 아버지뻘 되시는 아저씨 두 분이 술에 잔뜩 취해있고, 또 다른 테이블에는 술을 팔아도 괜찮을지 의심스러운 어린 애들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동네에 흔한 작은 술집에서 녀석을 만났다.   



 “지영이랑 요즘 안 좋지?”


 “예. 뭐 좀 일들이 많았으니까요”


 “이제 그만할 때 됐잖아?”


 “...”


 “에둘러 말하지 않을게. 너도 이제 지영이가 너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


 “이제 숨기지 말아야겠다. 지영이가 나 좋아하는 거”



 녀석이 소주잔을 들어 잔을 비워냈다. 몰랐을까. 아니, 알았던 것 같다. 놀라거나 하는 표정은 아니다.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빈 소주잔을 내려다보고 있다. 녀석의 빈 잔에 소주를 따라서 채워주고 나도 내 잔을 비웠다. 녀석이 내 잔을 채워줄 것 같지 않아, 내가 내 잔에도 소주를 따라 채웠다.  


 힘들겠지만, 이 기회에 확실히 끝내야 한다. 녀석에게 괜한 동정을 가지는 게 더 몹쓸 짓이다. 녀석이 무슨 말이라도 하길 기다려보려다 그냥 내 할 말을 계속 하기로 했다. 



 “너도 눈치 채고 있잖아? 지영이 너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거”


 “...”


 “지영이 나랑 있을 때. 너한테 전화 오면 내 눈치 보는 거 이제 못 보겠다.” 


 “...”


 “포기해라. 이제 지영이는 날 좋아하잖아. 날 탓하지 마. 나도 이런 이야기 하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미련을 못 버리는 것 같아서 그래. 미안하다.”



 안주로 시킨 어묵 탕이 나와 말을 잠깐 멈췄다. 녀석은 다시 소주잔을 들어 마셨다. 안주를 먹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녀석의 잔에 다시 소주를 채워줬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지영이가 날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다. 지영이가 나를 만나고 있다는 건 이미 소문으로 들었을 것이다. 몰랐을 리가 없다. 



 “설마 몰랐냐? 지영이가 널 보는 눈빛이 달라졌잖아.”


 “그만해요”


 “뭘 그만해 인마. 지영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말하지 않을게.”


 “지영이가 뭐라는데요”


 “뭘 뭐라고 해. 너도 잘한 거 없잖아. 지영이 마음 변한 게 내 탓은 아니잖아?”  



 내가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했을 때, 지영이랑 사귀고 있었던 녀석은 영장을 받아놓고 있었다. 곧 군대에 갈 녀석이 지영이랑 자주 싸웠었다. 녀석이 집착이 심해서 지영이가 피곤해했고, 난 그런 둘을 자주 달래줬었다. 군대에 갈 녀석에게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말라고 지영을 많이 달랬었고, 지영은 그런 내게 많이 고마워했었다. 


 녀석이 휴가 중에 다른 여자후배들을 만났다가 지영이랑 크게 싸웠었다. 난 그런 지영을 달래서 녀석에게 면회를 가게 했다. 지영이는 내게 면회를 같이 가자고 했지만, 집착이 심한 녀석이라서 내가 그러면 안 된다고 했다. 녀석이 나를 좋아하긴 해도 면회는 혼자 다녀오라고 했었다. 


 그때부터 지영에게서 연락이 자주 왔었다. 녀석 때문에 마음 아파하던 지영은 자주 위로받길 원했고, 지영과 단 둘이 만나는 일도 점점 늘어났었다. 



 “이제 그만하면 됐어. 그만 끝내. 더 끌어서 뭐하냐? 너랑 있어도 지영이는 내 생각하고 있을 텐데, 지저분하지 않냐? 포기해.”


 “그런가요.”


 “미안하다. 나도 이런 얘기 하고 싶지 않은데, 서로 지치잖아. 지영이 마음 바뀐 걸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


 

 손가락으로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던 녀석이 또 잔을 비웠다. 나도 내 잔을 비우고 녀석의 잔을 채워줬다. 녀석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찾으려 자기 바지주머니를 뒤졌다. 내 라이터를 꺼내서 내밀었지만, 녀석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매일 밤늦게 지영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서로 많은 이야기들을 했었고, 녀석에 대한 이야기들도 나눴다. 녀석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다. 그런 건 너무 잔인하다. 밤늦게 전화로 나누던 이야기들을 만나서 하기 시작하며, 지영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른 애들이 날 많이 욕하겠지”


 “...”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냐. 너랑 지영이는 아니었던 거야. 그래도 넌 위로 받을 테고, 난 욕을 먹어야겠지.”


 “참...”


 “알아. 열 받겠지. 뭐 어쩌겠냐. 내가 욕은 다 먹을게. 지영이가 왜 하필 날 택했겠냐? 내 탓이라고는 생각하지 마”


 “창진 선배.”


 “그래”


 “알았어요.”


 




 그렇게 헤어졌다. 


 저 후배가 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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