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지누
작품명 : 프로그레스
출판사 : 영상노트
대여점 책을 빌리는 건, 싼 비용으로 다양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기에, 때때로 그 비용조차 허무하게 날리는 위험쯤은 감수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내 몫이고 설령 지뢰작을 만나더라도, 그저 운없음을 탓할뿐이다.
<프로그레스>는 정말 드물게 '속았다'는 감정을 들게한다.
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책 제목과 뒷표지 소개, 그리고 '무력대결 보다는 지력대결, 브레인 싸움, 심리전을 다루고 싶다'는 작가 서문. 더불어, 문피아 감상란에 올라온, 전혀 먼치킨스럽지 않고, 주변인물들도 똑똑하며, 수싸움이 돋보인다는 평을 보고는 나름 기대를 하였다.
'왠지 매니아틱하지만, 그래도 작가가 심혈을 기울인, 수준 높은 지력 대결 장면이 나오겠지'하며 책장을 넘기자 나오는... 지력 대결은 개뿔이 지력 대결;;
글의 시작은-멋내기용 인용구나 인물평전이 곧잘 삽입되어 페이지를 낭비하는 걸 제외하면-전형적인 그래서 진부한 영지물이다.
그러다가 1권의 중반쯤에 5천억골드 짜리의 뭔가를 거래하며 지력대결이 펼쳐진다. 다음과 같이...
"뭐하나 물어보자!"
"살살 깨무세요. 피부가 연약해서요."
이와 유사한 수준의 대화체가 반복되고 중간중간 맹격을 가했네, 반격을 했네, 고도의 심리네하는 작가의 추임세가 나온다.
2권까지 읽는 내내 마찬가지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지력대결(지적인 대화)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 글에 취한 작가는 '이거야말로 묵직한 일격'이란 식으로 감정을 뿜어댄다.
유치원생 수준의 대화체, 거기에 취해 남발되는 작가의 감정들 그리고 괜히 폼잡는 인용구들이 합쳐진 <프로그레스>는 여지껏 내가 알던 지뢰는 아무것도 아니었단 걸 깨우치게 한다.
또한, 책에선 1골드는 상당한 금액으로 대략, 100만원쯤의 가치를 지니는데, 5천억골드는 환산하면 50경이다. 이는 지구를 살 수 있는 돈이며,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100억씩 뿌릴 수 있는 돈이다.
어느 감상자가 이 책은 전혀 먼치킨스럽지 않다고 했지만, 5천억골드(50경)야말로 어지간한 소드마스터, 9서클마법사가 난무하는 먼치킨물보다 훨씬 먼치킨이 아닐까.
5천억골드짜리 거래를 놓고, 고작 14살짜리 주인공과 진지하게 대면하는 도둑&정보길드의 두목이나, 인생의 대부분을 식물인간으로 지내다 이계로 넘어온 주인공이 칼부림 난무하는 위험한 세상에서 뒷골목, 어둠의 세계를 대놓고 활보하는 건 쉽게 이해가 안된다.
무엇보다, 획기적인 무기도면을 왕국과 제국들에 겨우 100골드씩에 판매하는 설정, 대륙의 한쪽(동대륙)에 5제국 200왕국씩이나 존재한다는 설정등 이해하기 힘든 설정이 너무 많다. 참고로, 나는 남미대륙이 아닌, 북반구, 대한민국에 사는 독자라서인지 '온화한 북부, 거칠고 메마른 남부'라는 기본 설정조차 납득하기 힘들다.
끝으로, 독자의 궁금증이나 신비감을 유발하는 '정체를 밝히지 않은 뭔가'가 숱하게 나오고, 등장인물들은 놀람의 탄성을 쏟아내지만, 정작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역효과만 불러온다.
유치하고 가벼운 글은 당당하게 유치하고 가볍게, 진지한 글은 진지한대로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제목에서건 문체나 내용에서건...
'브레인 싸움, 지력 대결, 고도의 심리전'을 다루겠다는 작가의 서문과 정작 이어져 나오는 오글오글 거리는 초딩수준의 내용은 심각한 괴리감을 일으킨다. 나름 오랜기간 장르소설을 봤고, 어지간한 글은 소화할 수 있다고 자평하지만 <프로그레스>는 정말 참기 힘들었다. 고로 <프로그레스>는 나의 워스트 3위 안에 당당히 입성 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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