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쓰레기야, 그것도 소설이냐?’
란 소리도 들어보았고
‘글쓴다고 떠벌이기 전에 글공부나 제대로 해!’
란 소리 역시 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교만했는지를 깨달았으며, 교만한 만큼의 솜씨는 물론, 오기조차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저는 자기부정과 자기비하의 그늘 뒤에 숨어버렸고, 자기기만의 산물인 저의 습작은 그길로 카운트가 멈춰버렸죠.
그로부터 수개월.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듣고, 많은 것을 담아두는 시간이었습니다.
많은 것을 담아둔 만큼 배짱 또한 두둑해지더군요.
하지만 더 이상 교만의 종노릇을 하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담아둔 것을 다시한번 비워버렸죠.
예.
모든 것을 비워버리고 다시한번 시작합니다.
고작 알파벳만 바꾸어놓고 스스로를 창조신의 자리에 올려놓는 교만한 짓은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무지렁이같은 글을 써놓고 스스로를 작가라고 칭하지 않습니다.
저는
'판타지에 중독된 한낱 중독자'
일 뿐이며, 중독이 가져다주는 폐해를 끊기보단 오히려 더한 자극을 위해 저 스스로 판타지에 침잠해버린 사람입니다.
역겨운 토사물이라고 욕해도 좋습니다.
구제불능의 쓰레기라고 손가락질해도 좋습니다.
환상의 대가로 필요한 것이라곤 고작 혈관에 쑤셔밖는 주사바늘이 전부인 세상에서,
수많은 밤과
수많은 고뇌를 환상의 대가로 선택한 중독자가 더이상 두려울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럼, 제 머릿속의 도취제에 손을 뻗은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에르체베트 올림
[정규연재란] 모르핀
소개.
바람은 일상을 실어 나른다. 길거리에서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고지사항을 목청껏 외치는 호외꾼들의 걸진 목소리. 손님의 턱수염을 정리하고 머리카락을 자르는 이발사들의 가위질 소리. 옷감과 곡물과 여러가지 피혁제품을 파는 상인들과 필요한 물품을 사러 시장을 돌아다니는 주부들의 흥정소리가 부는 바람에 실려 일상을 들려준다. 그리고 바람은 소리로 그치지 않고 향취까지 실어나름으로써 좀더 선명한 일상을 그려낸다.
제빵사가 오븐을 열때 풍겨나오는 그윽한 빵내음. 무두질이 덜 된 가죽의 불쾌한 내음을 가리기 위한 향료내음. 자그마한 걸쇠에 주렁주렁 매달린 건어물의 짠내음과 갓 캐낸 야채들의 그윽한 흙내음. 파티장과 부유한 귀족들의 저택에서 사용될 갖은 향과 허브를 태워서 나는 감미로운 내음 등.
하지만 밝은 일상의 따스함을 실어나르는데 지친 바람은 때때로 그늘진 일상의 서글픔을 실어나르기도 한다.
“10펜스요! 10펜스!”
고작 10펜스에 몸과 웃음을 파는 창부들의 간절함.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리는 거지들과 거지들의 나무그릇에 던져진 1페니 동전의 짤그랑거림.
“2파운드!” “3파운드!” “5파운드!”
경매장에서 두눈이 벌게진채 가격을 제시하는 귀족들의 목소리와 발가벗겨진채 누군가에게 팔리기만을 기다리는 노예들의 참담함.
“오르겔은 태엽을 감고 운명은 시간을 감지~ 감아둔 태엽만큼 멜로디를 연주하는 오르겔처럼, 감아둔 시간만큼 흘러가는 인생이 바로 운명이라네~”
그리고 들어주는이 하나없는 어느 이름모를 유랑 악사의 구슬픈 가락...
그늘진 일상을 실어나르는 바람의 비통한 심정때문일까. 바람은 무겁고, 차갑게 끈적이다가 쏟아지는 비에 바스러진다.
호외꾼들의 걸진 목소리는 빗소리에 뭍히고 타는 허브의 감미로운 내음은 빗줄기에 녹아들며 어느덧 바람에 실린 따스함은 내리는 비의 차가움에 식어버린다.
“운명에 특별한 것은 없어~ 운명이란 그저 감아둔 시간일 뿐, 주어진 시간속을 살아가는 방식은 각자의 몫이니까~ 오르겔의 멜로디가 슬픈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네~”
하지만 왜일까. 빗물이 바닥을 두드리고 일상의 따스함은 식어버렸지만 그늘속에 자리한 슬픔만큼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리는 비의 차가움과 울적함을 더하기만 할 뿐.
“헤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아이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외모면 외모, 나이면 나이,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아이죠.”
고급 기루(妓樓) 안에서 희끗희끗한 머리칼의 포주(抱主)가 공단 상의 위에 진홍빛 루코를 덧입은 중년 사내를 향해 실실거리며 말했다. 중년 사내의 자주빛 입술과 축처진 볼살 위로 탐욕스러운 미소가 번져나가길 얼마간. 이내곧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기루안은 희비극을 연출한다.
하지만 상류사회의 인물이 비극에 적격이고 저속한 신분의 인물은 희극에 적합하다는 희비극의 전통적 구조와는 거리가 먼 연출이었다. 왜냐하면 상류층인 중년 사내가 시커멓게 썩은 이와 누렇게 곪은 잇몸을 드러내며 웃고 있는 반면 까만 머리칼의 어린 창부는 새파랗게 질린채 온몸을 떨고 있었으니까.
“아이는 이 정도면 훌륭하고... 와인은 어떤게 있나?”
“안그래도 어르신께서 필요로 하실줄 알고 미리 구해놓은 녀석이 있습죠. 샤토 아크호 오르세(Chateau Accro Orsay) 30년산입니다.”
“호오. 여기서 아크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될 줄이야. 자네 안목도 꽤 훌륭하구만.”
“헤헤. 전부 어르신 덕 아니겠습니까. 금방 올려 드릴테니 좋은 시간 되십시오.”
좋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는 포주의 말을 끝으로, 내리는 비와 지워진 따스함과 끝없는 슬픔이 한데 어우러지는 가운데, 들어주는 이 하나없는 어느 이름모를 유랑 악사의 구슬픈 가락만이 빗속을 유령처럼 맴돈다.
오르겔은 태엽을 감고 운명은 시간을 감지
감아둔 태엽만큼 멜로디를 연주하는 오르겔처럼
감아둔 시간만큼 흘러가는 인생이 바로 운명이라네
운명에 특별한 것은 없어
운명이란 그저 감아둔 시간일 뿐 주어진 시간속을 살아가는 방식은 각자의 몫이니까
오르겔의 멜로디가 슬픈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네
감아둔 태엽이 다할때까지 계속해서 멜로디를 반복하는
이내곧 멈추리라 알면서도 계속해서 멜로디를 반복하는
오르겔의 멜로디가 슬픈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네
오르겔의 멜로디가 슬픈 이유가 바로
바로 그것이라네
-본문 中 Overture에서 발췌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