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정구
작품명 : 금협기행
출판사 : 로크미디어
편의상 반말체를 사용하겠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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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 작가는 나에게 친숙한 사람이다. 내가 처음으로 읽은 그의 작품은 엘란으로 정령사인 주인공의 성장을 다룬 작품이었다. 나는 엘란이라는 작품 중에서도 특히 속된말로 여자에 환장하면서도, 희한하게 끝까지 밉지 않았던 어떤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다.
이름이야 잊었지만, 가볍고 누구에게나 까불까불거리며 다가가는 그 캐릭터는 당시 말도 없고 친구도 별로 없었던 나에게는 오히려 닯고 싶은 성격이었던 것이다. 정구 작가는 수많은 독자들의 원성을 들으면서도, 끝끝내 그 친구를 해피 엔딩으로 끝내게 했다.
만약 비슷한 시기에 다른 작가가 다른 작품에 그 캐릭터를 조연으로 출연시켰다면 분명 주인공의 한칼에 아침이슬이 되거나, 노예가 되어 부림을 받으며 사필귀정을 몸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얄미우면서도 정말 죽일 듯이 밉진 않던 독특한 캐릭터였다.
그리고 그 후 정구 작가는 정구라는 이름을 장르 소설계에 널리 알린 신승을 내었다. 다들 아시다시피 주인공인 정각은 얄밉고 비겁하고 가볍고 까불까불 대는 데다 여자에 환장한 놈이었다.
보는 순간 정구 작가가 계속 엘란의 그 조연이 정이 간다 정이 간다 하더니 결국 파워업 시켜서 주인공 등록 시켰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도, 여전히 희한하게 밉지 않았다.
신승이 히트친 이후, 정구 작가는 특유의 도전정신으로 전혀 다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새웠다. 불의 왕의 주인공은 한없이 진지하고, 치열한 사내였다. 현대물과 판타지물을 넘나들던 음울하고 긴박한 분위기는 쉽게 쉽게 페이지를 넘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범람하던 가볍게 넘기고 가볍게 덮을 수 있는 양판소의 물결을 이기지 못하고 시장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정구 작가로서는 뼈아픈 조기종결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불의 왕이 완결되면 구매하려고 돈을 모으던 나에게도 뼈아픈 결말이었다.
꽤 오래 공백기간이 있은 후 박빙이 나왔다.
혹시 불의 왕의 시장 실패로 인해 낙심하고 절필하지 않았을까 조마조마했던 나는 안심을 하고 책을 읽었다.
주인공은 다시 가벼운 녀석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여자에게 미친듯이 집착하는 것이, 그것도 목숨걸고 집착하는 것이 신승의 정각보다 더한 놈이었다. 무림과 판타지가 만나 죽도록 칼질하고 마법질 하는 가운데 주인공 녀석은 여자 뒤꽁무니를 쫒아 다녔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이계의 여인에게 반해버리는 바람에 오해가 엉키고 엉켜 주인공은 천하의 몸쓸 놈이 되었다.
독자들도 주인공을 탐탁치 않아 했다. 전지적 시점으로 본 주인공은 똥고집에 가득 차 있고 여자 때문에 질질 끌려다니는 멍청한 놈이었다. 나도 잔뜩 기대를 하고 읽은 책 주인공이 이런 놈이라 혀를 끌끌차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이 작품도 조기 크리를 맞았다.
어느 날 정구 작가의 다섯번째 자식인 금협기행이 세상에 나왔다.
감상란과 비평란에 급협기행에 대한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금에 환장한 주인공을 욕하는 글도 있었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글도 있었다. 나는 애가 탔다. 아... 보고 싶은데... 이 글도 조기 종결되면 어떻하나? 완결 나면 보고, 재밌으면 사야지.
그러나 결국 나는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배했다. 정구 작가는 천상 훌륭한 이야기꾼이고, 그의 옛 독자들을 가볍게 유혹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금협기행 1, 2, 3권을 읽었다.
결론은 정말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주인공인 도연의 모든 행동 원리는 돈이다. 그는 금귀이며 돈에 환장한 놈이다. 하지만 돈은 단순히 금이 아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도연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가 도연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도연이 처음으로 돈을 모으려 한 것은 항상 굶주려 있던 여동생에게 온전한 만두를 사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끝내 그는 온전한 만두를 하나도 사 주지 못했고, 여동생은 굶어 죽었다. 도연은 그런 당시의 자신을 원망하고 있었다.
도연의 돈에 대한 집착은 비상식적이다. 상식적인 우리로써는 눈살을 찌푸리고 볼 수 밖에 없다. 당연하다. 상식적인 우리는 가족이 굶어죽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비상식적인 애기는 북한이나 아프리카에서나 있는 이야기니까.
그러나 도연은 그런 비상식적인 일을 겪었다. 그러니 미친 듯이 돈에 집착할 밖에.
도연에게 있어 금은 굶어 죽은 여동생에 대한 연민이고, 자신에 대한 원망이며 세상을 향한 공포다. 도연의 무의식 레벨에서 이런 인식이 박혀있다. 금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 죽는다! 여동생처럼!
도연은 자연 필사적일 수 밖에 없다.
무공에 별로 관심이 없던 것도 마찬가지다. 그의 여동생은 칼에 맞거나 암기에 당하지 않았다. 굶어죽었지.
그는 양혜인을 만나 힘의 부족함을 절감하기 전까지 무공에 대한 열망은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갖고 있었어도 무공을 가지고 있으면 돈을 얻을 수 있으니까 좋다 수준이었지 무공을 죽도록 배우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다만 그런 부분들은 정구 작가의 가벼워 보이는 글에 휩쓸려 잘 보이지 않는다. 독자들이 도연의 드러난 행동, 즉 가벼운 행동거지와 돈에 대한 과도한 집착만 보고 도연 이 몹쓸놈 한다면 -물론 몹쓸놈은 맞다- 도연이나 정구 작가로서는 조금 억울하지 않을까.
그리고 도연은 사실 정말 질나쁜 놈도 아니다. 그는 칼받이로 억울하게 죽은 사해표국의 신입표사들의 유족들을 위해 분노하여 손을 휘두른다. 그리고 뺏어낸 은자를 유족들에게 나눠준다. 그가 금귀라면 그 은자를 순순히 유족들에게 나눠줬을까? 금귀면 당연히 꿀꺽해야 하지 않나?
그리고 불치병으로 이제 세상을 떠나게 된 이몽연의 어머니가 어린 이몽연을 맡겼을 때 쩔쩔매던 그가 정말 금귀인가?
3권에 이몽연과 여행하면서 악양루 근처 객잔에서 만두를 주문하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도연이 만두를 주문하자 이몽연이 툴툴거렸다.
"또 만두예요?"
"왜, 만두 싫어?"
"좋아하는데, 매 끼니 먹으니까 물리잖아요. 다른 거 시키면 안될까요?"
"안돼, 여자아이는 매일 만두를 먹어야 해."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이몽연이 강하게 항의하자 도연이 한발 물러섰다.]
- 3권 내용 中 -
도연은 굶어 죽은 여동생을 잊지 않았다.
독자 제현들께 여쭙고 싶다.
그는 금귀인가? 아니면 금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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