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말씀드리자면 저는 소설을 볼때 감정이입을 매우 깊이 하는 독자로, 극단적인 해피엔딩주의자이자 남녀관계에서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현실의 질척질척함을 보려면 사랑과 전쟁이나 그것이 알고싶다를 보면되는거지, 왜 환상 세계에서까지 우울한 현실에 직면해야하는거냐하는 생각으로... 뭐 이건 개인 가치관 문제니까요.
그래서 예기치 못한 NTR 전개가 나오면 내상을 심하게 입고 삼일동안 끙끙대기도 합니다.(일단 이 글에서 NTR은 어른의 관계(...)까지가 아니더라도, 여자친구, 혹은 그에 준하는 이성이 딴 남자한테 가버리는 수준까지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뭐 굳이 구별하는 것도 우스운가요 요즘은..)
왠지 요즘들어서 장르소설을 볼 때 이런 전개가 많아지는 것 같아서 좀 그렇더군요.
기껏해야 20대 중반이긴 합니다만, 어렸을 때 봤던 판타지 무협은 이렇게까진 아니었던거 같은데...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기억을 되짚어보면 그런 내용을 처음 접해본게 사이케델리아, 태극검제...뭐 그런 것들이었던거 같네요. (표류공주의 결말은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싶지 않습니다...작품 전체의 퀄리티랑은 별개로 말이죠.)
아무튼 요즘 부쩍 그런걸 많이 보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세상이 각박해지고 남녀관계의 가치관이 변화해서 그럴려나, 현판들이 많아지면서 그에 비례해서 현대적인 연애가 나오는건가 뭐 그런거 아닐까 하고 있었는데.. 최근 접하게 된 소위 ‘고전’ 작품들을 깊이 살펴보게 되니 꼭 그렇지도 않은가 보구나 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갑자기 오페라 아리아에 꽂혀버려서 이것 저것 찾아 듣고 있었는데, 피가로 3부작이 나오더군요. 클래식 쪽에 익숙하시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조금 설명하자면, 18세기 보마르셰라는 극작가가 지은 희곡으로, 프랑스 혁명적인 가치를 담고 있어서 사회 풍자적인 내용이 많죠. 로시니의 오페라 [세빌리야의 이발사]와 모짜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 그 3부작의 1,2부에 해당합니다. 내용은 몰라도 제목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할겁니다.
그런데 정보를 찾던 중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3부작? 1부랑 2부밖에 없는데? 여기서 저의 설정덕후 혼이 끓어올랐습니다. 네이버님의 고견을 들어보니 3부의 제목은 [죄 많은 어머니]라더군요. 로시니나 모짜르트 급의 음악가가 안 붙어서 그런지 그렇게 유명하진 않나봅니다. 내용이 궁금해서 한국 사이트들을 찾아봤는데 딱히 나오는 곳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정보가 없음을 신의 계시로 알아듣고 즉각 손을 뗐다면 제 어릴적 추억이 그렇게 산산조각 나지는 않았을 텐데... 가능하다면 다시 피가로 제 3부를 몰랐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흨) 그렇게 저는 바보같이 영어 위키에 까지 들어가서 [죄 많은 어머니]의 정보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있더군요.
[세빌리야의 이발사]는 이발사 피가로가 백작을 도와, 온갖 소동을 거쳐서 로지나와 백작을 맺어주는 이야기입니다. 어렸을 때 학교 음악시간에 인형들 나오는 오페라 영상을 보면서(opera vox였던 것 같습니다) 백작과 로지나가 잘되기를 순수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피가로의 결혼]에 가면 좀 의아해지더라구요. 로지나와 결혼했던 백작이 피가로의 약혼녀에게 빠져서 유혹하려고 하고, 그것을 백작부인인 로지나와 피가로, 피가로의 약혼자가 같이 혼쭐을 내고, 백작이 싹싹 빌어서 백작부인이 용서해주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라? 세빌리야의 이발사에서는 같은 팀이었잖아? 동명이인인가? 막 그렇게 의심이 될 정도로 상황이 바뀌게 되니까 참 찝찝했죠. 저는 여기까지가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3부 제목은 [죄 많은 어머니]입니다.(이하 내용은 영어 위키를 조악한 영어실력을 통해 대충 옮긴 것으로, 세세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차마 다시 찾아보고 싶지 않아서 기억에만 의존해서 쓰겠습니다.)
죄 많은 어머니? 2부에서 나왔던 진상도 모르고 자기 아들이랑 결혼하려고 설치던 피가로 친어머니 이야기인가? 그정도 선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전편에서 백작을 대차게 까던 백작 부인이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애까지 낳았습니다.
2부에서도 조금 나왔던 백작가의 젊은 하인이 있었는데(거기서도 이 하인에게는 다른 애인이 있었었죠... 2부에서도 백작 부인과 미묘한 관계를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백작이 오랜 기간 여행을 하고 있던 도중에 백작 부인과 이 하인이 불장난을 저지르게 된겁니다. 불륜을 저지르기는 했는데, 백작 부인이 다시 생각해보니 아, 내가 왜 이랬지? 하고 후회를 하면서 하인에게 결별을 선언하죠. 하인은 백작가를 나가서 전쟁에 참여했다가 죽게 됩니다. 죽기 전에 백작 부인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담은 편지를 보냅니다. 여기서 이 편지를 한번 읽고 문서 파쇄기에 넣어 처리해버렸다면 최소한 외면적으로는 평온했을 지도 모르는데, 백작 부인은 비밀 상자를 만들어서 이 편지를 고이 보관하게 됩니다.
백작은 부인이 아들을 낳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찜찜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바깥에서 만든 사생아 딸을 데려와서(도찐개찐입니다) 자기 재산을 넘기려고 생각하죠. 여기서 백작 부인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있는 다른 남자가 접근해서, 불륜 사실을 폭로하고 이 딸과 결혼해서 백작가의 재산을 가로채려고 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가로와 그 아내가 활약하는 게 주요 내용이 됩니다. 결국 백작 부인의 편지가 백작한테 넘어가서 백작이 화도 내고, 뭐 이래저래 해서 최종적으로는 그 다른 남자의 음모를 분쇄하며 ‘해피엔딩’을 맞게 됩니다.
여기서 작가는 막장도가 부족하다고 생각을 했는지, 한걸음 더 나갑니다. 고만해 백작 부인의 불륜 아들과 백작의 사생아 딸이 눈이 맞게 한거죠. 백작과 백작 부인 사이에서도 아들이 있었습니다. 단지 그 아들은 결투를 하다 죽었던가 그렇습니다. 이쯤되면 제가 읽고있는 내용이 한국 드라마인지 몇 세기전 희극인지 의문이 들게됩니다. 출생의 비밀에 불륜에...엄밀히 말하면 이 커플은 혈연적으로는 무관하겠군요. 단지 이복형제의 이복동생과 사랑하게 된거죠. 지저스 크라이스트.... 이렇게 극작가 보마르셰는 어린 시절 순수하게 백작과 백작부인이 잘 되기를 기원하던 제 동심을 무참히 박살내었습니다.
한국 드라마가 세계 유일의 막장 스토리가 아니라는 것에 안심을 해야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이야기 할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얼마 전에 과제를 하다가 조사하게된 ‘오디세우스’ 이야기입니다. 그 트로이 목마에 나오는 그리스의 영웅으로, 트로이 전쟁 이후에 자기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서 오디세우스는 키르케랑 칼립소와 할거 다했는데20년동안 정절을 지키고 있던 현모양처 페넬로페와 자기 아들 텔레마코스를 만나서 자기 아내 구혼자 백여명을 끔살시키고 해피엔딩을 맞는 [오디세이아]가 유명하지요.
여기까지만 들으시면 지극히 가부장적 질서에 적합하고 순수한 사랑을 그리고 있지 않느냐? 하실텐데요,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 음유시인인 호메로스의 작품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가 있는데, 사실 트로이 전쟁 관련해서 서사시 시리즈는 더 있습니다. 문제는 [오디세이아] 다음 시기를 다루고 있는 [텔레고노이아]입니다(호메로스 작품은 아닙니다). 오디세우스가 여행 도중에 키르케와 살 때 키르케가 낳은 아들인 텔레고노스가 주인공입니다. 텔레고노스가 아버지 찾아 여행을 떠났는데, 여행다니다 시비가 붙은 어떤 남자를 죽이게 됩니다. 오이디푸스에서 이미 봤던 전개죠. 텔레고노스는 만나고 싶어하던 아버지를 죽인 겁니다.
그렇게 텔레고노스는 아버지를 죽인 죄로 신들에게 저주를 받........기는 개뿔, 사실을 알고 좀 슬퍼한 다음에, 아버지의 아내인 페넬로페와 자기 이복형제인 텔레마코스를 데리고 키르케에게 돌아옵니다. 그리고 텔레마코스는 키르케와, 텔레고노스는 페넬로페와 결혼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죽었고 아들들은 자기 새엄마뻘 되는 사람하고 교차 결혼을 한겁니다.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오디세이아]에서의 예언이라던가 오이디푸스와의 형평성이라던가를 고려해볼 때 논리적으로 개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걸 정사로 보기는 문제가 많지 않은가 싶습니다만, 어쨌든 분류로는 그렇습니다. 정사라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페넬로페의 이야기도 다른 설화들이 존재합니다.
페넬로페가 사실은 오디세우스가 오기 전에 다른 구혼자와 바람이 나서 애까지 낳았다던가,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의 부정을 알고 페넬로페를 죽였다던가, 쫓아냈다던가,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쫓겨난 페넬로페가 헤르메스와 자서 반인반염소인 판신을 낳았다는 설이 당시 그리스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있었다더군요. 확실히 사람들이 자극적이고 퇴폐적인 가십을 좋아하는 경향은 기원전부터 존재해 온것 같습니다.
동심이 무참히 짓밟인 탓에 흥분을 좀 해서 글이 길어졌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좀 내놔야 할 것 같았거든요. 뭐 그냥 NTR이니 막장이니 하는 것도 참 역사가 깊다는 걸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몇세기전 유명 오페라라던가, 고대 그리스 드라마라던가.. 그래도 좀... 개인적으로는 좀 마음 편하게 볼 수 있는 장르문학들이 좀 많이 나왔으면 좋겠네요. 논픽션이 픽션보다 더 하다는 세상이지만, 가급적이면 판타지 무협에서는 꿈과 희망을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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