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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밀금다방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
13.09.14 04:58
조회
1,620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 해 봄, 어떤 일로 한림정이란 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
용무는 금새 끝났지만 그 작은 소읍에서 마산으로 다시 돌아오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대여섯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그 시간을 여기까지 오는 기차 안에서 보아 두었던 강언덕들을 산책하는 데 보내기로 하였다.

낙동강에서 갈라져 나온 지류가 또 갈라지고, 또 갈라지고ㅡ 아마 그렇게 대여섯 번은 갈라진 끝에 개울처럼 가늘어진 물줄기들이 구불구불 이어진 강언덕들 사이로 느릿느릿 흐르고 있었다.
파릇파릇한 연록색 봄풀로 뒤덮힌 강둑, 그리고 새파란 하늘빛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강물....

만약에 내가 화가였다면 그곳의 풍경을 화폭에 담기 위해 파랑과 녹색, 단 두 가지 색깔만을 필요로 하였을 것이다.

기차역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서너 시간은 더 기다려야 마산 가는 기차가 올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역 바로 옆에 붙은 다방으로 들어갔다.

겨우 테이블 셋을 들여놓은 것만으로 사람 지나다닐 통로조차 빠듯할 정도의 작은 다방이었다.
그 작은 읍에서는 '도회지'로 나가는 사람들도 별로 없는지 내가 유일한 손님이었다.

나는 기차가 도착할 때까지 그곳에 죽치고 있기로 작정하고,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다음 카운터와 주방을 등지고 창문 쪽을 향해 앉았다.
'밀금'이란 다방 이름이 창문 유리에 파란색 바탕에 빨간색 글자로 거꾸로 뒤집힌 채 적혀 있었는데, 아마 정통으로 서향으로 난 듯한 그 창으로 저녁 햇살이 쏟아져들어오는 통에 유리창에 덕지덕지 칠해진 페인트가 마치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었던지라 나는 그 거꾸로 적힌 '밀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ㅡ이윽고 매혹되고 말았다.

그 이전에도, 그리고 이후로도 스테인드글라스라는 물건을 한번도 직접 구경해 본 적이 없어서 효과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뒤쪽으로부터 광선을 쐬노라면 색깔이라는 것은 놀라운 순수성을 얻게 되는 모양이었다.
그 빨간색과 파란색은 마치 빨강과 파랑의 원천에서 길어온 듯한 빨간색과 파란색이었다.

이데아로서의 빨간색과 파란색, 빨강과 파랑 자체....

나는 시간을 잊고, 기차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도 잊고 그 단순한 광경을 질릴 줄 모르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ㅡ 어느 순간, 나를 사로잡았던 마법이 깨졌다.

저녁햇살은 여전히 창을 통해 비치고 있었으나 해가 막 서산을 넘어가고 있는지 갑자기 그 강도가 한풀 꺾였고, 그와 함께 빨강과 파랑 역시 그 강렬하던 흡인력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제서야 다방을 나온 나는 이번에는 바깥쪽에서 창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안쪽에서 본 뒤집어진 '밀금'과 바깥에서 보는 제대로 된 '밀금'이 이렇게 서로 판이할 수 있을까.

이건 그냥 뻘겋고 퍼렇게 페인트칠을 해놓은 살풍경한 유리창문일 뿐이었다.
어떤 이데아의 세계에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하던 좀전의 광경, 그리고 지금 내 눈앞의 이 촌스러운 광경....

그날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안고 돌아오는 기차를 타야 했지만, 그 후로도 예술이란 것의 본질을 생각해 보노라면 그때 일이 생각나곤 한다.
바로 그런 것이 예술이란 것이 작동하는 매카니즘이 아닐까?

지극히 투박한 수단을 통해 뭔가 숭고한 가치를 전달하려 애쓰는 것, 그게 바로 예술 아닐까?

예전에 나를 매우 감동시켰던 문학작품을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다시 읽으면 어째서인지 처음 접했을 때 같은 감동을 다시 맛볼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문학적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일수록 그 격차는 크다.
분명 동일한 작품이건만 내게 미치는 영향이 이리도 차이가 난다는 것은, 내가 전에 받았던 그 감동이 그 작품 자체에 내포돼 있는 요소는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말하자면 예술작품은 관념의 세계에서 떠도는 희미한 아름다움을 포착하기 위한, 그 자체로는 턱없이 초라하고 엉성한 일종의 안테나 같은 것이 아닐까?
작가의 역할은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 내지는 가치를 독자 역시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길잡이 역에 불과하고, 같은 가치를 작가가 제공해 준 수신장치를 가지고 포착하느냐 못하느냐는 독자의 몫인 것이 아닐까....


Comment ' 8

  • 작성자
    Lv.64 가출마녀
    작성일
    13.09.14 05:50
    No. 1

    예술이라는 물건이 그러하더군요
    사람마다 그속에서 느끼는 것이 다르고 보는것이 다르고 받아들이는 것이 다릅니다
    길잡이... 내 에술가들은 길잡이입니다
    아니 마술사입니다 모든사람들을 그들에게 각자에따라 현혹시키죠
    그래서 마술사라 부르고 싶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9.14 06:35
    No. 2

    나도 마술사가 되고 싶건만.... ㅜㅜ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0 자견(自遣)
    작성일
    13.09.14 09:27
    No. 3

    마술사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까지고 그 마술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고도 싶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9.14 20:17
    No. 4

    저도 그렇습니다. 내 자신이 멋진 마술을 부리지 못하더라도 남이 멋진 마술을 부리면 그걸 알아보고 박수를 쳐 줄 안목이라도 갖추려 노력하고 있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5 탁월한바보
    작성일
    13.09.14 10:18
    No. 5

    작가도 마찬가지랍니다. 내가 쓴 글, 지금은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쓰니 엄청 값지고 재미있지만, 내년이 되면서 읽는 그 글은 그때만 못하죠.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9.14 20:19
    No. 6

    맞습니다. 바로 지금 이 글만 해도 지금 다시 보니 고쳐 써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문장들이 더러 눈에 띄는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 Brock
    작성일
    13.09.14 16:41
    No. 7

    한편의 수필같은 좋은 글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일
    13.09.14 20:19
    No. 8

    수필 맞는데....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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