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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소설의 지형도

작성자
Lv.22 디페랑스
작성
07.02.28 22:07
조회
4,278

1. 제가 읽은 것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무협 소설의 판도를 짚어본 글입니다. 현재 개별 작품에 대한 품평은 많이 있어도 전문적인 연구나 무협 작품의 창작과 출판에 대한 통계 자료가 거의 없는 관계로 주먹구구식의 언급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이 글은 2002년경에 쓰여진 것이라서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한 건 언급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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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소설의 지형도

야설록과 금강 사마달, 검궁인 등은 흔히 한국 창작무협의 1세대라고 한다. 자칭 혹은 타칭 그렇게 부르는데 그 이전에 무협이 있었다 해도 자신의 이름을 내 걸고 본격적으로 무협을 쓰기 시작한 것은 이들이 처음이니 그렇게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1세대에는 이미 고인이 된 서효원, 그리고 고월, 냉하상, 일주향, 와룡강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의 이력을 보면 거의 50년대 중·후반에서 60년대 초에 태어났고 1980년대 초에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들 중 1970년대 이전부터 작품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1979년 이전에 무협을 쓴 국내 작가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름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현재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도 없는 실정이다. 이는 우리 나라 창작무협의 역사가 20여 년밖에 안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토록 짧은 기간에 이미 '낡은 것'이 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현재도 열심히 '제작'되고 있는 이들 무협의 골격은 거의 선악의 대결구도인데 주인공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절세 미남자에다가 오성도 뛰어나 보통 천재라고 불린다.

유서 깊은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나 고귀한 혈통을 지녔는데 가문이 혈겁을 당하고 혼자 살아남는다. 복수를 위해 다니다가 기연을 얻어 천하 제일의 무공을 익히고 수만 냥을 호가하는 영약까지 복용한다. 복수를 위해 강호를 주유하는 와중에 절세의 미녀들을 만나 처첩으로 삼기도 한다. 그리고 최후의 결전에서 원수를 간단히 쳐 없애고 가문의 영광을 되찾는다.

최후의 결전이 싱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예견되어 있는데 이미 주인공 자신이 수백, 수천 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기재(천살성, 문곡성, 무창성 등 하늘의 기운을 타고 났다든지 무슨무슨 신체를 가졌다든지 하여 육체적, 정신적으로 천하제일의 무공을 익히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한다.)로 머리도 엄청 좋아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으니 어떤 무공 비급이든 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거기에 전설상의 무공을 최소한 두 개 이상 우연히 얻어 익힌다. 주인공이 익히는 무공은 내공심법에서부터 검법, 도법, 신법, 보법, 장법 등 일류 아닌 것이 없다.

또한 공청석유나 만년설삼, 수천년 된 각종 동물의 내단 등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영약을 복용해 신체는 환골탈태하고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이쯤 되면 무공을 익히기 위한 각고의 노력 같은 건 필요없을 듯한데 꼭 그렇지도 않다. 지하 깊숙한 동부나 계곡에서 최소한 1, 2년에서 10여 년까지 수련을 한 다음 강호에 재출도한다. 게다가 전대의 고인들을 만나 온갖 비법을 전수받는가 하면 막강한 실력자들을 수하로 거두기까지 한다.

이 정도니 원수를 갚는 것은 물론 천하제일, 아니 고금제일인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듯하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지면 누가 재미있어 하겠는가. 완벽한 신체에 천재를 뛰어넘는 두뇌, 천하제일의 무공을 갖고도 최소한 서너 번은 적에게 패배하여 죽을 고비를 넘긴다. 어쩔 수 없이 범하는 모순이기도 한 셈이다.

작가나 작품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이러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이 소위 구무협이다. 절세의 미남과 여러 미녀들, 고귀한 신분, 기연, 은거 고인의 등장, 무림 제패를 꾀하는 무리들, 우연성, 초인의 경지에 이른 무공, 까마득한 절벽, 끝을 알 수 없는 동혈, 각종 기화요초와 영약들, 그리고 무림을 구한 영웅의 탄생……. 구무협에서 빠지지 않는 것들이다.

1988년 첫 작품을 내 놓은 용대운은 이러한 무협의 조류에 일대 변화를 주었는데 우선 주인공부터 확 바꿔 버렸다. 이전의 주인공들이 10대 중·후반에서 20대 초의 소년과 청년의 중간쯤 되는 연령에 체격은 호리호리하고 남자가 보기에도 반할 정도의 미남자였는데 용대운이 창조한 주인공은 20대 중·후반으로 10여 년 연상이다. 체격은 강건하고 생김새도 사내답게 단단한 인상을 준다. 얼굴이나 몸에 각종 흉터가 있는 전형적인 무인 스타일이다. 그에 의해 창조된 '강하고 억센 사내'의 이미지는 1995년에 등장한 좌백에 의해 절정에 이른다. 줄거리를 이끌어 나가는 주요 동기도 원한과 복수나 무린 제패가 주종을 이루지만 순수한 강함의 추구, 최강의 무공 대결, 연정(戀情), 보물(무공 비급이나 신병기, 금은보화 등) 쟁탈전 따위가 추가된다. 용대운의 주인공은 타고난 재능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을 더 많이 하는데 주인공을 얼마나 괴롭히느냐에 따라 그는 더욱더 강해진다고 믿는 듯하다. <독보건곤>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가문이 다 몰살당하고 주인공 노독행은 쫓기면서 거의 걸레처럼 처참하게 난자당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중계되면서 원한은 바다보다 깊고 복수심은 하늘을 찌르는 동기가 마련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용대운과 좌백의 주인공들은 강하고 억센 남성인 데다가 초인적인 의지의 소유자다. 한 번 뜻을 품으면 굽히지 않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극복해 나간다. 전대의 주인공들이 거의 신적인 능력을 가진 것에 비해 상당히 인간의 자리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용대운의 주인공이 대개 정통 무가 출신임에 비해 좌백은 여기서 더 내려가 이름없는 농부(<혈기린 외전>)나 용병(<대도오>), 중(승려가 아님,<생사박>), 표사(<독행표, 금전표>)까지 아우른다. 이들 몇몇 작품에서 그의 주인공 괴롭히기는 이미 선배인 용대운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거친 남성들의 세계를 드러낸 작가로 장경과 설봉을 빼놓을 수 없다. 장경과 설봉은 무엇보다 무협의 판도를 확장시켰다는데 그 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무협이 중원 무림 전체를 놓고 한판 겨루는 구도였음에 비해 이들은 멀리 남해도나 장강의 수채들 등 변방과 오지를 주요 무대로 삼아 치열한 삶과 혈전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 냈다. 특정 지역에 한정한 만큼 묘사는 훨씬 구체성을 띠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림이 만들어졌다. 그만큼 기존의 매뉴얼로는 얻기 어려운 성취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방대한 자료 조사와 치밀한 구성이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 작품들이 그들의 손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

이밖에 독특한 작품 세계를 갖춘 풍종호, 냉죽생, 몽강호 등이 속속 등장하여 2세대의 창작 무협을 다양하게 하고 저변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작품의 질도 상당히 높여 놓았다. 특히 장상수의 <삼우인기담>은 무협으로선 아주 특이한 작품인데 기존의 틀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주인공부터 평범한 인물이기는커녕 보통 삼류보다도 못한 능력의 소유자다. 생긴 것도 보통 이하고 출신 문파도 없는 하류 잡배이며 올바른 뜻을 지니거나 행실이 바른 것도 아니다. 여자를 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덮치고 보는, 막되먹은 인간이다. 그런데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은 어리석지만 본능에 충실하고, 그만큼 순수하기 때문이다. 세 명의 어리석은 사람 이야기라는 제목처럼 이 작품에는 주인공을 비롯한 주역들이 대개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 중 중심 인물인 남자 주인공이 가장 탁월(?)하게 어리석다. 살수로 적을 암살하라는 명을 받고 찾아가서는 자신의 행적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일을 한답시고 꾸미는데 그런 솜씨로 살아남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주인공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이름있는 가문의 미녀들을 얻고 한 가문을 이루게 되는 것이 우연성에 힘입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기존 무협을 조롱하면서 새로운 무협의 영역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웃음이 격조를 갖는 것은 반어(아이러니)와 풍자가 갖추어져 있을 때다. 단순히 코믹 무협으로 개그 수준으로 일관하는 요즘의 신무협과는 차별성을 드러낸다.

무협 소설을 쓰고자 하고 또 뜻한 바 있어 작품을 쓴 신인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는 쉽지 않다. 이름 없는 신인이니 작품을 출판해 줄 출판사가 선뜻 나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존 작가의 이름으로 내 놓기에는 자신의 작품이 아깝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1세대 작가들이 주역으로 활동했던 시절에는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채 대필 작가로 몇 년씩이나 보낸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90년대의 신세대는 과거와 달리 경험과 돈(물론 푼돈이겠지만)뿐만 아니라 이름 및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부심도 중요시했다. 그래서 물건을 팔아야 하는 출판사와의 타협의 산물이 중견 작가와의 공저 형식의 출판이었다. 이전의 공저는 같은 등급의 작가가 같이 머리를 맞대고 토의를 하며 구상하고 써 내려간 것이었는데 비해 (검궁인/사마달, 서효원/이광주 등) 이 시기의 공저는 작품은 신인이 쓰고 중견 작가의 조언에 의해 수정 보완되는 방식이다. 이 즈음 야설록을 선두로 용대운, 사마달 등이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 삼아 전문 무협 출판 기획팀을 만들게 되고 신인 작가들은 대개 이 '프로'(아마 프로덕션의 준말인 듯)에 소속되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춘야연, 백야, 백산, 황기록, 운중행, 금시조, 하성민, 정진인, 별도, 유진, 강유, 도현, 금와 등 쟁쟁한 신인들이 선배의 지도 편달과 개인적인 재능, 필력을 바탕으로 무협의 새로운 판도를 짜 나간다. 이러한 공저 형식이 새로운 감각을 갖춘 신인을 육성하는 시스템이 될 수 있었지만 곧이어 불어닥친 환타지 열풍과 그에 편승한 신무협 환타지의 벽에 가로막혀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결과가 되었다.

김근우의 <바람의 마도사>나 이우혁의 <퇴마록>을 시작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국내 환타지 장르는 마침내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짧게는 너댓 권에서 길게 십여 권이 훨씬 넘는 환타지 작품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는데 그 바탕이 된 것은 통신과 인터넷의 온라인이었다. 하루에도 수천, 수만 명이 드나들며 볼 수 있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환경은 작품을 써서 출판사에 보내고 편집자와 선배들이 보고 판단하며 다시 오랫 동안의 결정 과정을 거쳐 겨우 출판되는 기존의 경직된 작품 환경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무엇보다 '직접' 작가와 독자가 만난다는 것, 또 독자는 곧바로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잇점을 가진 혁명적인 변화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제 출판사는 얼마나 많이 팔릴 것이냐는 고민을 할 필요 없이 온라인의 조회수를 살피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남보다 먼저 필자를 만나면 되었던 것이다.

온라인에는 환타지만의 세계가 있는 게 아니다. 동양적인 환타지라 할 수 있는 무협도 이 바람을 탔다. 무협도 크게 보면 환타지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있지만 어쨌거나 온라인에 연재되던 무협이 환타지의 열풍을 타고 '신무협 환타지'라는 다소 엉뚱한 카피를 달고 출판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동조의 <묵향>은 이 바람의 새로운 기폭제가 되었다. 무협 세계에서 환타지 세계로의 차원 이동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신선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퓨전 환타지라는 새로운 장르가 이루어졌다. <묵향>의 성공이 무협 부분과 환타지 부분의 어느 쪽에 힘입었느냐 하는 논란은 있지만 그 이후 <만선문의 후예>와 <비뢰도>, <황제의 검>과 같은 새로운 스타일의 무협 작품들이 속속 출판되어 많은 독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이들 신무협 환타지는 기존의 무협과 환타지의 특성을 일정 부분씩 갖고 탄생했는데 중원과 그 변방을 무대로 무공을 사용하고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사가 부분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 무협적인 특성이라면 길이가 일정하지 않게 길고 온라인에서 연재되었다가 출판되고 신세대적인 장난끼와 가벼운 말투 등은 환타지적인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온라인을 바탕으로 활성화된 신무협 장르는 새로운 무협 독자 군단을 거느림은 물론 기존의 독자들까지 상당 수 끌어들였는데 아직도 다수의 '아저씨' 군단은 사마달이나 와룡강 류의 기존 무협을 따르고 있어 거칠게 나누면 10대부터 20대, 그리고 일부의 30대를 포함한 신무협파와 30대 일부와 40대 이후의 구무협파로 양분되어 있는 상태다. 이로 인해 둘 사이에 낀 종래의 신무협 작가들이 이도 저도 아닌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때를 잘못 만난 탓이라고 여기기엔 그들의 실력이 만만치 않고 그들이 무협에 투신한 동기와 진정성이 너무 아까운 것이다.

이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앞서 언급한 중견 작가들과의 공저를 통해 작품을 선보인 작가들과 환타지 열풍 이전에 통신상에 작품을 연재하고 그것이 책으로 출판된 작가들이다. 특히 후자에 무협의 질을 한껏 끌어올린 대형 작가들이 많은데 <묘왕동주>와 <쟁선계>의 이재일, <농풍답정록>의 임준욱, <표류공주>의 최후식 등이다.

<묘왕동주>는 힘있는 문체와 박진감 넘치는 사건 전개로 독자의 시선을 잡아 끌었고 <쟁선계>는 유장하게 이어지는 이야기의 흐름이 대하 역사소설을 읽는 듯하고 <농풍답정록>에서 보여주는 짜임새와 구도 정신은 예사로 보아 넘기기 어렵다. 최근 완간된 조진행의 <천사지인>은 금강의 <위대한 후예>로 시작하여 <쟁선계>에서 이루어 놓은 ‘큰 이야기'의 맥을 이은 역작이라 할 수 있다. <표류공주>에 이르러 인간 정신의 극한과 사랑가의 절창(絶唱)으로 얻은 미학적 성취는 그 이전이나 이후 어느 작품에서도 접하기 어려운 독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최후식은 <표류공주> 하나만으로도 우리 나라 창작 무협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라섰다고 할 수 있겠지만 또한 그 하나뿐이라면 얼마나 아쉬움이 크겠는가.

이 작품들이 현 무림에 횡횡하는 가벼움에 밀려나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잊혀진다 한들 거기서 이룬 성취가 우리 무협의 폭과 깊이를 더해주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무협에서 악인을 주인공으로 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럴 경우 악인은 거의 끝까지 승승장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가야 하므로) 그것이 독자의 정서와는 영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고 해도 무늬만 악인이고 속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곧 위악적 악인을 주인공을 한 경우가 많은데 금시조의 <실혼전기>, 류사하의 <반인기>, 백산의 <악인문>이 대표적이다. 모두 중견 작가와의 공저를 통해 데뷔한 신무협 작가들이다. (이들보다 뒷 세대인 이대성의 <사악도인>같은 류는 일종의 ‘가짜악인전’인 셈이다.) 여기에다 <천하공부출소림>으로 서사 능력을 확인시킨 백야의 <패륜겁>에 이르면 진짜 명실상부한 '악인 전기'가 만들어진다. 야비하고 잔인하며 술수에 능하고 인정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악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는 이 작품이 거의 유일하다 할 정도로 독보적이다. (그런 악인이 어느 무협 작품에나 등장하기는 하지만 결국엔 주인공에게 척살된다. 그만큼 악인의 이미지는 강하지 않다.)

<패륜겁>은 끝까지 읽어나가기가 괴로운 정도로 주인공의 악행이 지극하다. 처음에는 살아남기 위해 시작한 악행이 점차 자신의 능력을 배가시키고 종국엔 천하를 집어삼키는데까지 나아간다. 그럼으로써 무림은 암울해지고 독자의 마음도 역시 무거워진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주인공과 동화되어 이야기의 흐름에 빠져드는데 이 작품의 경우엔 그것이 거의 용납되지 않는다. '시적 정의'(poetic justice)라는 문학 창작의 원칙이 무시되는 셈이다. 이런 작품은 누구나 쓸 수 있겠지만 실제로 쓴 경우는 백야뿐이다. 이것이 그의 시도가 의미있게 보이는 까닭이다.

무협 작가들 가운데 가장 세련되고 다양한 내용과 방식의 작품을 쓴 작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이가 야설록이다. 이미 무협뿐만 아니라 만화 스토리, 가상 역사와 에스에프 소설 등으로 다양한 관심과 능력을 보인 그는 이제 사업적인 수완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 한 방파의 방주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처럼 작품 한두 편으로 재능을 읽어낼 수 있는 작가는 그리 많지 않은데 한상운은 그 드문 예에 속한다. 1997년 <양각양>으로 무림에 출도한 그가 어떻게 작품 세계가 전혀 다른 고월과의 공저 형식으로 출발했는지 알 수 없지만 데뷔 때부터 보인 그의 재기는 그 이후 <독비객>과 <무림맹 연쇄 살인사건> 등으로 계속 이어진다. <양각양>에서 졸개들이 상관과 마주치자 '콩 줍는 흉내를 냈다'라거나 '모 심기'를 했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은 노력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상관에 대한 존경은 눈꼽만큼도 없으면서 허리를 구십 도로 굽혀 인사하는 이 모순적인 심리 상태를 이토록 정확히 표현해 낼 수 있는 작가라 얼마나 있겠는가.

그의 작품 경향은 코믹 무협이라 할 수 있겠지만 요즘 인기있는 <비뢰도>나 <만선문의 후예>, <걸인각성>과 같은 유형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웃음으로 표현하면 요즘 유행하는 코믹 무협이 '히히, 하하'로 나타낼 수 있고 한상운의 것은 '끅끅, 끽끽'이라 할 수 있다. 곧 한상운의 웃음은 훨씬 더 비틀려 있는 셈이다. <비뢰도>류의 웃음이 간지럽히는 것이라면 한상운은 바늘 같은 것으로 콕콕 찌르는 것이다. 이렇게 복잡하니 그의 웃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따를만한 독자는 그리 많지 않다. 책 표지의 카피와 같은 '블랙 코메디 무협'은 아직까지는 그만의 것이고 많은 독자가 따르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다. 그런 만큼 그만의 독자, 곧 매니아가 형성될 여지가 가장 농후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앞서 말한 장상수의 <삼우인기담>과 약간 다른 유형이기는 하지만 색다른 웃음을 창조하는 미학에 있어서는 같은 맥을 잇는 선상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출간되고 있는, 약간 나이든 신인 작가 김석진의 <삼류무사>는 코믹함으로선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곧 한상운에서 꽤 순화된, 능청스러우면서도 어느 정도 자연스러운 웃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태극검제>를 써서 큰 성공을 거둔 박찬규의 작품중에 <비연사애>란 네 권짜리 소설이 있다. 네 개의 슬픈 사랑이란 제목의 뜻처럼 비극적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작품은 구도나 인물 설정 따위가 완전히 80년대 이전의 구무협을 답습하고 있다. 절세의 미남과 미녀, 기연, 영약, 수많은 종류의 괴수 등 구무협의 모든 것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독특한 점은 ‘진짜’ 비극이라는 점이다. 초절정 무공을 가지고 있는 절세 미남 미녀의 사랑 이야기들이 주변의 오해와 상황 변화에 따라 암울하게 치달아 점차 파국에 이른다. 한국 무협의 역사에서 비극으로 끝나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표류공주를 비극으로 볼 수 있으나 마지막에 주인공의 사랑이 하나의 전설로 우뚝 선다는 점에서 달리 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독보적이다.

어떤 종류의 글도 마찬가지지만 무협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애초에 자신이 좋아서 쓰게 된다. 중국의 고전 무협을 비롯해 국내의 창작 무협을 읽다 보니 자신이 생각한 것들이 있을 것이고 그것을 글로 나타내 써 보니 쓰는 재미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한 번 읽혀보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완벽하게 만들어 냈을 때의 즐거움과 행복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작품을 써서 여러 사람에게 읽히고 괜찮은 반응이 있었을 때 갈림길에 서게 된다.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 독자가 좋아하는 것이 일치할 때야 아무런 갈등이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자가 원하는 것을 써야 하느냐 아니면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써야 하느냐.

자신이 온갖 심혈을 기울여 완성하고 싶은 것을 쓰게 되면 그것은 작품이 되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독자의 요구에만 따를 경우엔 상품이 된다. 모든 상품의 운명이 그렇듯이 무협 상품도 유행이나 흐름이 지나고 나면 고물이 되고 잊혀진다. 오래 기억될 필생의 역작을 만들어 내느냐 아니면 흐름을 잘 타 돈을 많이 버는 상품을 만들어 내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그 자신의 선택에 따른다. 그 어느 것도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무협 전체로서는 균형을 유지해야 바람직하다. 사회와 마찬가지로 무협의 판도도 다양성이 생명인 것이다. 아울러 무협 독자도 특정 흐름의 유행을 좇기보다는 여러 가지를 접해 보고 자신의 의견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


Comment ' 14

  • 작성자
    Lv.60 탁주누룩
    작성일
    07.02.28 22:12
    No. 1

    2002년도에 쓰신 글을 지금 올리시는 저의를 모르겠군요.
    무슨 말이 듣고 싶으신 겁니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 魔師
    작성일
    07.02.28 23:07
    No. 2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 현현고월
    작성일
    07.03.01 00:11
    No. 3

    버전업을 해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5 piopio
    작성일
    07.03.01 00:49
    No. 4

    때론 공감하며 때론 갸웃거리며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아덜름
    작성일
    07.03.01 20:40
    No. 5

    누구신지 모르지만 멋진 해설입니다.
    무협 연재에 상당한 도움이 되는군요.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4 천산노조
    작성일
    07.03.02 02:00
    No. 6

    정말 공감가고 글 또한 더없이 맛깔나네요.
    글을 쓴 연대를 넘어서 무슨말이 듣고싶냐는 리플이 달릴글은 아닌듯 싶군요. 2000년 이후 최신버전도 기대해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금팔이
    작성일
    07.03.02 17:34
    No. 7

    글에 나오는 무협 중 안 읽은 게 꽤 되는군요. 그거부터 읽어볼
    생각을 하는 1인.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Lv.22 디페랑스
    작성일
    07.03.02 22:15
    No. 8

    글이 쓰여진 지 거의 5년이 되어 유통기한이 지났다고 생각한다면 뭐 내릴 수도...
    하지만 현재 무협의 흐름을 정초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의 상황에 대한 약간이나마 정보를 제공했다는 의의는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 기간에 제가 그 업(도서대여)에 종사했기 때문에 좋은 작품을 꽤 접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이런 글도 쓸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 이후에 가끔 무협을 읽긴 했으나 양적으로 충분치 못하여 버전업을 하기는 적절치 않군요.
    하지만 아주 인상적인 <윤극사전기> 등 몇몇 작품에 대해서 다시 평가해 볼 가치가 있기에 기회가 닿으면 써 올리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 검도천신마
    작성일
    07.03.03 04:41
    No. 9

    처음 보는 저로서는 정말 감명깊게 읽은 글인데요.....
    한국 무협 장르의 연표를 본 것 같습니다
    끝부분에서 말한 것처럼 요즘 나오는 책들 중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보다
    상품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책들이 대부분인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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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39 취검
    작성일
    07.03.04 11:29
    No. 10

    비인님의 높은 식견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러나 1번 발뭉님의 댓글에는 절로 눈쌀이 찌뿌려집니다. 항상 바라는 바이지만, 좋은 글에는 좋은 댓글만 달릴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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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7 귀영자
    작성일
    07.03.05 10:49
    No. 11

    일부 중요한 작가나 작품이 빠져 보이고 일부 비평에는 공감이 가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대단한 식견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정말 무협소설을 많이 읽어도 이만한 글 쓰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방대한 작품들에 대한 감상이나 비평을 정리하고 종합햿다는
    그 노고도 평가 받을 만 하네요.
    2002년 이후에 눈에 띄는 작가나 작품이 이전보다 줄어든건 확시합니다.
    그래도 이왕이면 최근 것에 대한 비평도 부탁드립니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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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3 남선
    작성일
    07.03.06 10:56
    No. 12

    다른 건 몰라도 정말 와룡강 소설은 야설 그 자체 ㄱ-;

    사신검 보고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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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22 디페랑스
    작성일
    07.03.06 13:52
    No. 13

    와룡강의 소설에 대해 이미 많은 말들이 있어 따로 덧붙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그런데 와룡강의 이름으로 나온 몇몇 작품은 무협 중에서 수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환교>, <금포염왕>, <질풍록> 등.

    특히 질풍록에서 하나의 몸 속에 두 인물이 들어가 서로 죽기살기로 싸우는 부분은 분명 김정률의 <소드 엠퍼러>에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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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야인성
    작성일
    07.03.24 23:06
    No. 14

    천사지인,표류공주,비연사애,삼우인기담,실혼전기...
    이걸 재밌다고 할줄 아는 사람은 단순한 무협의 호쾌함이 아닌
    호쾌함 이상의 그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이죠..
    저도 그 사람들중 하나..그래서 이무협들은 재미있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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