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운전기, 전형적인 진화형(進化形) 독자>>
“소설 읽다가 더 이상 읽을 게 없어 직접 쓰게 되었습니다.”
근래 흔히 보게 되는 이야기다. 이 자리를 빌어서 말하고 싶은 주제다.
유운전기의 탄생배경이 그렇다. 근래 대부분의 작품이 그러한 목적에서 적혀진다.
이를 거슬려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분노할 필요는 없다.
이 시대에 사는 우리가 장르를 좀먹는 작품들이라 매도할 지라도, 그 이전에 시대가 요구한
작품들이다. 스스로의 눈에 차지 않는다하여 존재가치가 상실되는 것은 아니다.
옛 박스무협이 무협의 황금기를 말아간 것 같아도 결국 시간의 차이였을 뿐이다.
좀 더 오래 우려먹을 수 있던 것을 한꺼번에 가져간 것뿐이다.
다만 진정한 작가들이 받아야 할 것을 협잡꾼들이 챙겨간 게 나는 슬플 뿐, 그 힘든 시련이
달가운 건 변함이 없다. 딛고 일어섰기에 더 성숙한 작품이 있어 달갑다.
하늘에 손가락질하고 땅에 발구를 천인공노할 이야기인가?
하지만 그 시절 쏟아진 작품들이 정형적인 코드를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닳고 닳게 만
들었기에 현재의 우리가 그에 일찍 벗어나, 신선한 시도를 원하고 또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신 무협만을 일컫는 게 아니다. 용대운 작가의 군림천하도 정통 직계인 듯 보이지만
실은 이미 변화해 있다.
무협 장르 전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심어진 것은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베껴 써도 작가가 베껴 썼기에 오히려 지금보다 기본 소양은 있었다. 반복된다 할지라도
독자는 많았기에 학은 떼지 않았을 것이다.
근본적 문제는 이곳이 한국이었고, 뒤로는 뭔 짓을 해도 앞에서는 헛기침을 하는 게 우리
네 양반심성이다. 색정적 코드가, 마녀사냥 도매금으로 넘어간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그 위로 다른 단점들이 코팅된 것 뿐이다.
뭐 그건 좋다. 하지만 이제와 많은 것이 바뀌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즐길 것들로
넘쳐난다. 한번 보면 즐겁고 두 번 보면 익숙하고 세 번 보면 고개를 흔드는 게 지금 사람들
이다. 기호가 바뀌어도 너무 바뀌어 멈춰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신무협이 정체된 것 같아도 실제론 끊임없는 변화가 있다. 많은 소설이 양산되는 동시에
수많은 발자국들이 바로 이 순간에도 무협이란 장르에 찍혀나간다. 이전 작품들이 걷지 않
았던 곳을 빠짐없이 밟아나간다.
이미 밟은 곳을 또 밟아나가기도 하지만 이 행동 또한 필요악이다. 밟고 밟아 식상함을 부
추기다보면 어느새 누군가가 새로운 부지를 밟아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그는 그곳까지 홀
로 걸은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자리한 자들에게 밀린 것이다.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소재
를 비껴나가며 얻은 것이다.
그 많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인간의 상상은 끝없다는 것이 장르의 생존을 보장한
다. 얼핏 비좁아 보여도 들어오는 만큼 팽창하니 끝없다.
그러니 아직 걱정에 목을 매진 않는다.
유운전기는 이러한 발걸음 중 하나다.
무휼작가는 의도적으로 서장에 독자로서의 선택을 밝혔다. 심리적 방패막이일 수 있으나 이
것이 구실이 되어 욕을 먹을 수 있다는 건 슬픈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진다.
독자이기에 독자가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몇 년 전 사람들은 소설 주인공이 절정의 미모를 가지는 것을 식상해 했다. 잘생긴 주인공
이란 답습코드가 오히려 해를 끼치기 시작하면서 이 후 나오는 소설들은 대부분, 많은 면에
서 한걸음 물러서 있었다.
‘나름대로 호감 가는 인상이다.’ 혹은 아예 우락부락한 산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시류와 함께 오히려 평범함의 역식상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
만이 아니다.
유운전기는 출판 무협 중 오랜만에 보게 되는, 절정에 근접한 꽃미남이 주인공이다.
한 번 더 보면 질려도 지금은 적당한 때다. 다들 시장터에 자리 잡을 때 홀로 대갓집에 들
어가 앉았다. 발로 차여 쫓겨나더라도 포식은 하고 쫓겨나리라.
이 소설이 품은 재미있는 소재 선택은 이와 유사하다. 작가였다면 끄집어내는 데 한번쯤 생
각을 해야 할 소재들을 그가 독자였기에 거리낌없이 발견하고 사용할 수 있었다.
관리라는 권력과, 독특한 무공이란 무력과, 집단으로 대표되는 세력, 막대한 금력, 마지막으
로 지력까지 주인공에게 쥐어주었다.
그 하나하나가 잘게 분해되어 소설 곳곳에 퍼져나갔다.
언뜻 흔해 보일 지라도 막상 읽게 되면 끌리는 소재들이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
주인공의 성격마저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빚었다. 칼날 같은 맺고 끊음과 이해타산적인 성
미를, 정정당당해 보이는 얼굴 밑에 숨긴다. 주인공의 유순한 행동에 짜증이 나는 독자라면
마치 가려운 곳을 긁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활극이다. 싸움이 많아 활극이 아니라 주인공의 행동반경이 넓어 활극(活劇)이
다.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는 주인공이다. 답답함이나 시름은 어울리지 않는다.
한 마디로 가벼운 계열을 훑는 사람에겐 더없이 적당하다.
재미있는 건 무휼작가의 임기응변이다. 기본적인 스토리나 설정조차 하지 않고 아무 생
각 없이 몇 주간 글을 올렸다고 말한다. 흔히 눈살 찌푸리기 쉬운 이야기가 다르게 들린 것
은 오히려 그런 시도에서 발견되는 재능 때문이다.
완성도 높은 스토리를 짜고 반전을 넣다보면 어쩔 수 없이 놓쳐가기 쉬운 단순한 재미들을,
하나하나 독자로서의 상상과 바람을 담아 끼워 넣어갈 수 있었다. 결국 한순간 한순간이 창
의력이었고 상상이 억압되지 않았다.
유운전기 소설 속에서 오,탈자를 본다. 대화에 힘이 없음을 느낀다. 하지만 무협이란
장르에서 작가로서의 성장에 더없이 중요한 것은 어휘력이 아닌 스토리 진행력이다.
출간을 하느냐 못하느냐는 대부분 이에 달렸다.
쓰고 쓰다보면 저절로 탄탄해 지는 게 문장력이기에, 시간이 약으로 지나 어느 정도 작가
티를 내는 건 금방이다. 이 점에 주목하니 무휼작가를 재단하기엔 아직 일러 보인다.
많이도 밟았다. 설정만으로도 재미를 가져다주는 유행 코드를 일컫는 말이다.
효력이 끝나는 것은 금방이다. 무휼작가분이 독자로서의 시선을 되새기며 열심히 재미를 창
조하려 노력하겠지만 길면 위험하다. 많아야 5권 이내로 깨끗이 마무리 짓고, 얻은 것을 되
새기면 다음 작품에선 더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돌아와, 무휼작가는 전형적인 진화형(進化形) 독자다.
전업 작가가 아니라 독자의 시선을 먼저 보기에 나름대로 장점을 가진다.
이를 욕할 수도 욕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를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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