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감평은 현재 ‘북풍표국사이트’의 개인연재방에서 연재 중이신 성권님의 <천하십절>에 대한 것이며 개인적으로 한 감평인 것을 밝힙니다. 아울러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은 잡설을 '감평'이란 명목 하에 올리게 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말씀 드립니다.(__)
1. 들어가기에 앞서
‘무협’이란 장르는 오랜 시간 나이의 높고 낮음을 떠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김용님으로 대표되는 중국정통무협부터 최근 용대운님의 <태극문>을 기폭제로 시작된 이른바 ‘신무협’까지...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동안 ‘무협’소설은 사람들의 대리만족을 풀어주는 도구로, 또는 재미의 정점을 추구하는 카타르시스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요즘 필자는 이런 질문을 종종 던져보곤 한다. ‘무협’소설은 하나의 ‘장르’소설로서의 가치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아직까지도 정말로 쉽게 내릴 수 없는 미묘하고도 난해한 것이었다.
아쉽게도 무협소설에서는 판타지계에서 자신 있게 내세우는 이영도님의 <드래곤라자>만큼의 작품이 보이지 않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물론 김용님의 <영웅문>같은 희대의 걸작이 있다하지만 그것은 방대한 스케일과 치밀한 구성, 그리고 살아있는 듯한 캐릭터와 더불어 김용님만의 절정에 다다른 필력이 합쳐져서 나온 것 일뿐, <드래곤라자>처럼 인간 본연에 관한 진지한 성찰과 물음 같은 것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물론 무협소설 자체의 특성 때문에 이런 것을 기대하기는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천하십절>의 작가 성권님은 이 질문에 대해서 약간은 부정적으로 보인다. 성권님 스스로도 일전에 밝혔듯이, 무협을 단순히 사람들이 일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것을 대신 해소해주는 대리만족의 도구 그 이상, 그 이하로도 보시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필자는 성권님의 <천하십절>이 요즘 단순 ‘재미’만을 추구한 채, 그야말로 삼류소설의 전철을 밟고 있는 ‘신무협’이란 탈을 쓴 많은 통신 무협과는 엄연히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2. 본
(1) <천하십절>은 군웅지이다?
무협소설 자체에서도 그 갈래를 구분 지어 본다면 흔히 세 개로 나누고들 한다. 구무협과 신무협, 마지막으로 정통무협. 첫번째로 구무협은 모두들 잘 아시다시피, 잘생긴 주인공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기연과 지나치게 남발되는 우연. 그리고 주인공을 따르는 절세미녀들과의 모험담(대게 ‘할렘’소설로 치닫곤 하죠) 내지는 사파나 마교로 명명되어지는 악의 세력에 맞서 정의를 실현한다는 스토리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에 반해 신무협은 다른 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개성적인 캐릭터들과 곳곳에서 발휘되는 유머스러운 장면, 덧붙여 글쓴이만의 독특한 문체와 구성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요즘 무협계에서 흐르는 젊은 피에 속하는 장르이다. 최근에 많이 쓰이고 있는 ‘정사대전’ 또한 신무협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정통무협이란 무엇인가. 대표적인 작품으로 김용님의 <영웅문>을 꼽을 수 있으며, 한명의 주인공이 나와 천상천하 유아독존격 활극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을 포함해 소설의 수많은 인물들에 각각의 생명과 이야기를 부여하는, 쉽게 말해 군웅지격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필자의 말이 쉬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면 나관중님의 <삼국지>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주인공 유비뿐만이 아니라 그 외 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나와 각자의 이야기를 펼치며 서로간에 유동적인 연계를 이루어나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군웅지 소설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따지고 볼 때 <천하십절>은 정통무협, 아니 군웅지 소설에 가깝다. ‘천하십절’이란 제목 자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하(강호를 말하는 것이겠죠)에서 가장 유명했던 열사람에 관한 스토리 라인을 지닌 소설인 것이다. 그렇다면 의당 특정 한두사람에 소설의 비중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 때문에 <천하십절>은 열 사람 개개인이 각각 자기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어느새 서로간에 관계를 맺는, 그런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천하십절>은 굉장히 어려운 방식의 서술을 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유상적과 색마 김세설, 그리고 천마 안운성 등 <천하십절>에 해당되는 열 사람 외에도 그 외 부수적인 인물들에게까지 글쓴이는 과거지사와 생명력 등을 부여했다. 물론 이것들은 자칫 잘못하면 소설에 엄청난 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소설의 중요한 요소 중 한가지가 바로 이야기템포의 조절로서, 이것에 실패하면 독자들은 지루함을 느끼게 되고 뒷부분을 궁금해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출판소설이라면 건너뛰면 그만이겠지만, 통신소설은 뒷부분을 볼 수 없기에 결국 소설 읽는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천하십절>은 약간의 약점을 보이게 된다. 중간중간 스토리 진행 중 몇 차례 등장하는 조연들에 관한 사항을 너무 세심하게 이것저것 독자들에게 이야기해주다 보니 결과적으로 소설의 ‘살’은 불어났지만 그 비대해진 살로 인해 소설의 전체적인 ‘힘’이 떨어진 모양새가 되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이 ‘특정주인공 중심화’를 막고 군웅지 소설의 특색을 유지키 위한 도구적 선택이라곤 하지만 그 선택의 성공은 반반이라고 할 수 있다.
(2) 진정한 ‘협(俠)’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글쓴이가 일상생활에서의 답답함을 끊어버리는 카타리시스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고는 하지만, 분명 글쓴이도 <천하십절>을 통해 독자들에게 하고픈 말은 있다. 바로 진정한 ‘협’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로 이어지곤 한다. 비선 조현릉과 취선 한선은 ‘강호대의’라는 허울좋은 명분 하에 조대인 일가를 무참히 살해하고, 유령문의 후예 진귀정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남양지부대인 유정충은 ‘세상은 다 그런 것이야’를 외치며 자기합리화와 동시에 기성세대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냥 조용히 살 것을 강요한다.
허나 <천하십절>의 협객들은 한결같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협’이란 것을 외친다. 대가도, 사례도 없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고, 또 인간이라면 응당 지켜나가야 할 그 한가지에 자신의 목숨까지 건 채, 위태로운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 설령 그것으로 인해 자신에게 죽음보다도 더한 위험이 닥칠지라도 말이다. 필자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내면 본연의 ‘선’이 ‘무협’이란 것을 통해 발휘된 최고의 가치라고 본다. 바로 이런 것들을 잘 살려야만 무협을 하나의 장르소설로써 굳힐 수가 있는 것이다.
- 호쾌하고 대범한 것은 사나이의 조건이지만 반대의 맹점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앞뒤 계산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심사숙고한다면 동시에 이룰 수 없는 것은 협의 행동. 한 순간의 쉬임도 없이 흘러가는 세상사에서 기회란 것은 그다지 많이 오지 않고, 그런 기회가 길게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불의의 현장을 발견한 순간 뛰어드는 호기가 없다면 약간의 주저조차도 다른 상황을 발생시키고 마는 것이 세상이고, 잠시의 주저중에 모든 일이 끝나버리기도 하는 것이 세상인 것이다. 사마동주에게 있어 주저라는 것은 없었고, 사려라는 것도 찾기 힘들었다. 그는 단지 일의 성패여부에 앞선 옳고 그름의 판단만으로 주저 없이 일에 뛰어들었고, 뛰어들기 전에도, 뛰어든 후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천하십절』본문 중에서
그렇다. 사실 세상사 모든 일을 ‘과연 이것이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인가?’ ‘혹시 이 일을 해서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따져만 간다면 어떻게 진정한 ‘협’을 이루겠는가? 만약 그렇다면 유정충처럼 철저히 기성세대와 타협하고 기생하는, 앞세대의 모순을 그대로 이어받은 자밖에는 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 우리들에게는 힘이 없다. 세상을 바꿀만한 그 무엇도 없는 것이다. 그래도 무협소설에는 이른바 ‘무공’이란 것을 지닌 협객들이 있어, 비록 픽션에 불과할지언정 우리가 가지지 못한 능력을 통해 우리대신 썩어빠진 기성세대들과 맞서 싸워주기에, 우리는 무협소설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천하십절>에서 논해진 ‘협’이라는 것이 여타 많은 무협소설에서도 충분히 논해진 것이며, 별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는 것은 필자도 동의한다. 이것 또한 <천하십절>에서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필자는 그 ‘협’이란 것을 논한 자체를 높이 본 것이 아니라, 소설 내내 흐르는 글쓴이만의 진정한 ‘협’찾기 노력이 눈에 보였을 뿐이다.
결국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협’을 추구하자는 것과, 무협소설에서 대게 난해한 문제로 논해지곤 하는 ‘힘’이란 것인 듯 하다. <천하십절>의 그 수많은 등장인물 중 그래도 주인공이라 꼬집을 수 있는 악이 오직 강함만을 추구하는 승부사적 기질을 지닌 자이니 말이다.
(3) 그밖에 아쉬웠던 부분들
<천하십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견 개성 있게 보이기도 하지만 또 전형적(혹은 평면적)이기도 하다. 마치 어느 소설에서 쓰였을법한 그런 인물들...그걸 보여주는 면면들이 조금씩 눈에 뛴다. 바꿔 말하면, 글쓴이의 인물 내면 묘사가 부족했다는 말이 된다. 너무 각 인물의 과거지사나 이벤트에 치중한 나머지, 각각의 세밀한 심리묘사는 뒷전이 되고 말았다. 그 영향인지 <천하십절>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적 갈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감정흐름이 너무 일직선적이라는 말이다.
두번째로, 개연성 부족을 꼽을 수 있다. 이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말은 곧 사건들간의 인과관계(원인과 결과)가 허술하다는 의미에 직결되며, 또한 그 사건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출현필요성과 설정가치를 하락시키게 된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그 소설의 기본 스토리 골격을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다.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는 말이 있다. 소설에서 구성의 치밀함이란 제일 밑바닥 기초 공사와도 같다. 그리고 그 구성의 치밀함은 당연히 개연성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지니게 된다. 때문에 <천하십절>이 모래 위에 쌓은 성이 되지 않으려면 항상 ‘왜?’라는 질문을 소설 요소 요소에 접목시켜야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면, <천하십절>에선 여타 많은 무협소설 속에 등장하는 일명 ‘9파1방’과 ‘마교’를 비롯한 익숙한 설정들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일견 <천하십절>을 다른 무협소설들과 구별짓는 귀중한 특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다지 특별나게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지 못했으므로 일반독자들에게 심한 괴리감을 줄 수도 있다. 그리고 글쓴이가 아무리 무협의 ‘비인간성’-조연들이 수시로 죽어나가는-을 강조한다고는 했지만 많은 지면을 투자해 간신히 이미지를 구축해놓은 캐릭터들을 허무하게 여럿 죽이는 것은 자칫 독자들의 소설에 대한 애정도를 감소시킬 수도 있다.
3. 감평을 마치며...
성권님의 <천하십절>은 보통 일반적인 무협소설과는 여러모로 많이 틀리다. 그때문에 자칫 낯설고 처음에는 쉽게 재미를 붙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천하십절>에는 일반무협소설이 가지지 못한 색다르고 가슴에 한줄기 감동이 전해지는 그런 것이 있다. 처음 무협소설에 입문한 사람들에게는 약간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라이트리더들이 아닌 독자들이 읽기에는 전혀 무리가 없는 글이라 여겨진다. 일단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기본적으로 잘 쓰여진 글이라는데 이견이 없으니 말이다. 앞으로도 <천하십절> 작가 성권님께 계속 좋은 글을 부탁드리는 바이며, 진정한 ‘협’을 찾으시려는 그 노력 변치 않으시기를 바란다.
이상 본 감평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드립니다.^^*
by Spirit of the Hw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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