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박새날
작품명 : 공작아들
출판사 : 마루&마야
어제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서점에 갔다가 공작아들이 있는 걸 보고 무심코 사버렸습니다. 문피아 연재 당시부터 재미있게 봤던지라 인터넷으로 주문하려고 생각하고 있다가 충동적으로 질렀네요.
소설도 상품인 만큼 값어치를 매기자면 공작아들을 사면서 쓴 24000원 중 제대로 돌려받았다고 생각되는 가치는 20000원 정도입니다. 특히 3권을 읽으면서 크게 하락된 경향이 있는데, 재미있게 읽은 것치곤 약간 신랄한 비평이 될 것 같아 감상란이 아니라 비평란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우선적으로 생긴 몇 가지 의구심을 풀어보자면,
1. 공작아들은 왜 격동하는가?
공작아들은 대륙 최강의 무가라고 일컬어지는 데오도르 공작가의 아들 크라우젤이 온갖 귀여움을 받으며 자라 한심한 인간의 표본이 되자, 이에 분노한 데오도르 공작이 지온 왕국 최고의 아카데미인 사자의 성에 크라우젤을 강제로 입학시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신분도 밝힐 수 없고, 제대로 인간이 되어서 나오지 않는다면 인연을 끊어버리겠다는 협박에 울며 겨자먹기로 학원에 들어간 크라우젤은 1년 6개월동안 사자의 성 최악의 쓰레기로 심각한 따돌림을 당하게 되죠. 그러나 어느 순간 쌓이고 쌓인 울분이 크라우젤을 자극하여 강함을 갈구하게 되고, 데오도르 공작과 깊은 연이 있던 학원의 최강자 이안베르크의 도움을 얻어 점차 강해진다는 인간승리적인 구색을 갖춘 내용입니다.
그러나 크라우젤의 갑작스런 변모에 당위성이 빈약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저뿐일까요?
1년 6개월동안 왕따로 살면서도 고칠 수 없었던 쓰레기 근성이 세실리아와의 한 번의 싸움, 이베리안과의 한 번의 일방적인 구타로 각성되어 크라우젤을 희대의 노력가로 변모시킨다는 것은.. 지나간 1년 6개월에 대한 해명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보다 더한 일을 숱하게 경험했을 크라우젤이 그 부분에서 폭발한다는 점이.. 아주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더군요. 물론 이안베르크의 도발과 1년 6개월간 주어지지 않았던 강해질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쌓여왔던 울분이 얽히며 시너지를 일으켰다는 점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크라우젤은 1년 6개월만 '찌질이'였던 게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찌질했습니다. 어려서부터 길러진 고약한 습성이 한 번의 계기로 완전히 고쳐진다는 것은.. 소설이니까 가능한 일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현실성이 약간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뭐, 이안베르크가 수시로 도발하여 공작 아들이 갖고 있는 프라이드를 건드렸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크라우젤의 어린시절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가 가진 '귀족의 기품'조차도 조금은 이해가 안 가더군요. 공작인 아버지를 보고 "엄마, 혼내줘!"라고 할 만큼 찔찔한 크라우젤이 과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제대로 된 자각이 존재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이 몸에 배어 있었는지, 아울러 귀족으로서의 책임감을 올바로 인지하고 있었는지.
크라우젤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조금 생깁니다.
2. 소설인가, 서사인가?
이안베르크와 오스칼에 대한 설명을 할 때, 미래완료가 심심찮게 사용됩니다.
[바야흐로 그것은 천하를 아우를 미래의 대공작과 희대의 기사의 만남이었다.]라는 식의 서술. 웅장한 느낌을 주는 데는 성공했지만 생각할수록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줄곧 현재형으로 서술하다가 불현듯 먼 훗날의 내용을 엮는다는 것이, 직선적인 상상의 여지를 남기기엔 좋지만 조금 서사적이고 생소한 느낌을 줍니다. 나쁘다곤 생각되지 않지만 과연 어울리는 단락인가 하는 생각이 여러 번 들더군요. 물론 그 이상 상황에 어울리는 서술을 찾으라면 저로서도 특별히 생각나는 대안이 없기에 길게 쓸 자신은 없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 이 서사적인 서술이었습니다.
3. 유리온 황녀의 존재의의.
유리온 황녀가 사자의 성에 입학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말로는 자신이 다스리게 될 전도유망한 학생들을 가까이서 보고 싶다고 말하지만 경호상의 이유로 모든 활동에 참가하는 것도 아니며, 일일이 따라다니며 보는 것도 아니었죠.(산악구보 때 참가하지 않으려 했었던 것처럼, 무리가 따르는 행동에선 열외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유리온 황녀에게 조명을 비춘 것도 아니고, 함께 공부를 하거나 누군가와 어울리는 모습을 깊이 다룬 것도 아니고. 그저 유리온 황녀의 역할은 크라우젤에게 호감을 보이다가 습격 받고, 크라우젤에게 작위를 주고 떠나는 일 정도로 여겨지네요. 크라우젤이 직접적으로 '호감을 느꼈다'고 언급되기까지 했음에도 비중이 약합니다. 훗날 그의 주인으로서 왕국을 호령해야 할 제 1 계승권자의 무게가 왜 이리 가볍단 말인지요. 다시 말해 몇 가지 복선과 작위 수여, 그리고 2부에서 크라우젤에게 호의적이게 될 이유를 해명하기 위해 좀 미리 나오신 것 같은데, 유리온 황녀를 1~3권에서 아예 지워버려도 이야기 진행은 거의 지장을 안 받을 겁니다. 복선 정도로 해석하고 넘어가기엔 유리온 황녀의 사회적 지위가 갖는 무게가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심지어 미리에는 '이 여잔 왕의 그릇이 아니다'고 생각하기까지 하죠. 직간접적으로 묘사되는 왕의 권위와 유리온 황녀가 갖는 이미지의 갭이 너무 벌어져, 내면 외면의 일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생각이 조금 듭니다.
4. 마무리의 허술함이 가져오는 가치하락.
본래는 체감가치 3만원이 넘어갈 공작아들의 주관적 가치책정가격을 4천원이나 낮추게 된 직접적인 원인으로 저는 마무리를 들고 싶네요. 1, 2권까지는 이상적인 리듬으로 전개되던 이야기가 3권에서 갑자기 급전개를 타기 시작합니다. 3권의 3분의 2권 이후부터는 전개가 너무 빨라 폭주해버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전개가 빠르다고 해야할지 중간과정이 생략되었다고 해야할지 애매합니다. 갑자기 4년이 흐른다거나, "졸업 검술제를 기대하시죠."라고 말한 뒤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졸업 검술제가 시작된다는 식의 전개.. 그 사이로 책 한 권 분량 정도가 빠져 있다는 느낌입니다. 너무도 부드럽게 흘러가던 1, 2권의 전개속도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죠. 이 부분이 의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조기종결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1부 끝이라고 하셨으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조금만 템포를 늦추고 여러 가지를 신경쓰셨어야 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네요.
4. 사랑은 어디로?
에이시크 백작이 있습니다. 과거의 크라우젤과 마찬가지로 한심한 인간이었죠. 기부입학으로 사자의 성에 들어와 미리에에게 한 눈에 반하는 비운의 남자입니다. 이 남자는 산악구보 때 크라우젤의 도움을 받으며 그에게 반하고 마지막엔 소심한 성격도 잊고 큰 소리로 크라우젤을 응원하는 자기발전적인 남자입니다.
하지만.. 크라우젤이 미리에를 실신시킬 때, 미리에에게 한 눈에 반했던 에이시크 백작은 어디로 갔던 걸까요? 크라우젤이 데오도르의 소공작이기 때문에 못 나왔나요? 아니면 데오도르 공작의 면전이기 때문에?
그럴 바에야 크라우젤을 통해 강해졌다는 이야기, 안나왔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미리에를 좋아했다면, 그 마지막 부분에서 일관된 태도로 멋진 모습을 보여주어 크라우젤이 미리에를 용서하게 하는 전개로 가거나.. 미리에를 구원하는 역할을 해줄 거라 생각했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소리소문없이 끝나는 모습을 보고 수습이 될 되었다는 느낌을 받은 거지요.
특히 내가 공작아들을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세.실.리.아..]는 도대체 왜 에필로그에서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죠-_-;
최강의 4인을 가리는 검술제 때 크라우젤과 싸운 뒤로는 나오지 않습니다. 최강의 4인이 되었다는 언급만 몇 번 나오고 끝이죠.
아마 2부에서 백작님으로서, 혹은 백작영애로서 활약하게 되지 싶지만 1부의 끝이라 명시한다면 벌여놓았던 일들은 제대로, 명쾌하게 수습되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고작 3권 분량이라 억측은 조심해야겠지만.. 세실리아가 이후로 안 나온다면 박새날님께 편지라도 쓰겠습니다-_-;
더 길게 쓰고 싶지만 슬슬 스크롤 압박이 시작될 것 같은 길이군요. 솔직히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웃음 코드도 그렇고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너무나 매력적이죠. 라이트노벨에 버금가는 케릭터성이라 잘라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마나 연공에 대한 체계적인 시스템 언급이 약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고 복잡했지만 그 정도는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독자분들은 이해하고 계신가요?
크라우젤은 결코 '선'이 아닙니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귀족의 권위'로 크라우젤을 괴롭혔다면,
크라우젤은 졸업한 순간 그들보다 더한 권위를 앞세워 그들을 억압한 복수자입니다. 크라우젤의 인간적인 면모와 근성, 노력 앞에 그의 행동이 이완되고 미화되는 경향이 있지만, 훗날 어찌 되건 3권 마지막의 크라우젤의 모습은 분명한 '악인'으로 인식되더군요.
사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통쾌하지만요. 3권까지 꾹꾹 눌러참았던 답답한 마음이 크라우젤의 대사 한 마디로 뻥 뚫리는 느낌이었습니다.
"나 지온의 남작이자 데오도르의 소공작 크라우젤 세리안 레비트 데 데오도르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다. 스스로 내게 목숨을 빚졌다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지금 당장 무릎을 꿇어라. 그리고 구걸해라."
"그 같잖은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연명할 수 있을지 혹 아는가?"
그 한 장면을 위한 1부라고 생각될 정도로 멋진 장면이었습니다.
대리만족을 멋지게 실현한 상품성 있는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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