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크래커
작품명 : 포란(For Ran)
출판사 : 파피루스
일전에 공작아들 보면서, 그리고 포란을 보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이 있습니다. 바로 장르소설의 라이트노벨화(化)라는 건데요.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를 지녀 결국 원론으로 돌아오는 라이트노벨의 사이클 안에는 이미 사실상 장르소설 카테고리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라이트노벨화(化)란, NT노벨과 익스트림 노벨을 기준으로 히어로와 히로인, 악역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케릭터의 개성을 극대화한 소설을 말합니다.
이 점에 한해서는 포란을 읽은 사람이라면 부정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란이라는 캐릭터 하나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며, 그 주위의 등장인물들은 란에게 시련을 주고 경험을 쌓게 하는 조연에 지나지 않죠. 라칸이라는 한단계 윗 존재가 유일하게 그 테두리를 벗어나 있다고는 하나, 결국 란을 어긋나지 않도록 보좌해주고 점차로 성장시켜 간다는 면에선 단역이라는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주인공의 개성마저 잡아먹고 색체가 뚜렷해진 란 하나의 색깔을 작가는 극대화하여, 조금이라도 란에게 매력을 느낀 독자들을 헤어나올 수 없게 합니다. 이러한 기법은 NT노벨이나 비주얼노블 등에서 흔히 나오던 '츤데레'와 같은 <속성의 극대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되네요. 전문용어(?)로 란과 같은 귀여운 이미지의 캐릭터를 가리켜 '모에하다'라고 합니다. 포란의 경우는 '모에' 속성을 극대화하여 그 매력도를 선명하게 만들고, 속성의 특성상 저연령층과 여성 독자층까지도 간단히 겨냥할 수 있어 대중적인 어필마저 가능케 한 시장성이 충만한 소설입니다. 물론 부작용이 따르기는 하지만 말이죠.
일단 정리해보겠습니다.
1. 란.
간단히 포란의 줄거리를 밝혀보자면, [엘리시온]이라는 가상현실게임의 랭킹 1위였던 알캐미스트 소년 라칸이 2위이자 엘리시온 최대의 길드 '블러드 엠페러'의 수장 엑시리온에게 빈축을 사 666번 척살당하고 레벨이 1까지 떨어지면서 시작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복수심에 불탄 라칸은 남은 모든 것을 걸고 하나의 가디언을 제작하는데, 이론적으로 최강의 마수가 되어야 할 가디언이 황당하게도 모든 능력치 1에 매력만 잔뜩 가진 여자아이의 모습으로 태어나, 감춰진 힘을 찾기 위해 라칸이 이를 테이밍한다는 내용이죠.
그러나 위에서 말했다시피 포란에서는 주변 인물들의 색체를 잡아먹으면서까지 '란' 하나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발생하는데, 이 '란'이라는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면 더 이상 접근할 수 없다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글에 몰입하기 위해선 매우 복합적인 여건이 필요하지만, 포란에서는 단 하나만을 자신있게 강조해 내세운 만큼 이에 끌리지 못하면 몰입도 역시 확 사그라드는 게 사실이죠. 작가인 크래커님의 필력이 아주 뛰어나지 않았다면, 포란은 그대로 사장되는 소설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포란이 갖는 이점을 하나 추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필력이 아주 뛰어나다는 점입니다.
2. 연령층의 다양화를 꾀했다는 증거.
그렇게 말하기엔 크래커님의 의도했던 바가 아닐 수도 있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포란의 문체는 아주 단조로운 편입니다. 보기에 어려운 단어나 문장은 거의 없죠. 초등학생이라도 간단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그런 문장들을 모으고 모아 이야기를 엮는 것은 동화적 기법입니다. 포란의 연령층이 다양해진 것은 모에속성을 전반으로 내세운 란의 존재뿐만 아니라 접근하기 쉬운 문체의 영향이 큽니다. 다른 소설인 '이계다다' 역시 비슷한 문체로 쓰여진 걸로 봐선 크래커님의 고유한 문체라고나 할까. 이미 '글을 쓴다'는 경지를 넘어서 '독자에게 보여주다', '풀어내다'의 수준에 달한 능숙한 글쓰기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경험이 풍부한 프로 작가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강점을 크래커님은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전적으로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글을 가지고 노는 정도의 수준이라고 생각되더군요.
좋은 글은 노력을 통해서도 만들 수 있지만 그 특유의 감을 이용해서 놀랄 만큼 독창적인 문장을 만들어내는 작가들도 많습니다. 저는 전자를 노력형, 후자를 천재형으로 분류하는데, 크래커님은 제 기준에선 후자로 분류해도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이 되네요.
3. 속성의 극대화가 가지는 한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란의 귀여운 모습을 연출하려면 응당 극적인 세팅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상당히 전형적인 캐릭터를 내세워 전형적인 씬들을 보여줍니다. 포란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외관에 대한 묘사만 듣고도 그 캐릭터의 성격이나 말투 등을 100퍼센트 유추할 수 있습니다. 우스갯말로 이런 말이 있었죠. "잘생기면 동료, 못생기면 악당"이라고. 2권 중후반을 장식했던 카시어의 경우는 멀쩡하게 생긴 캐릭터라 나름대로 극적인 반전을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작가는 짧은 장면 변환을 통해 지면을 할애하여 카시어의 본모습을 처음부터 드러내 놓고 시작합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는 변화가 없을지 모르나, 긴장감 연출은 완전히 빵점입니다. 시작부터 밑천을 모두 드러내 놓고 전개되는지라 그 뒤의 내용까지도 전부 짐작케 하고 그 짐작이 사실로 맞아떨어지는 약점을 가지고 있죠. 어찌보면 매우 친절한 진행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이 부분을 자충수라고 생각했습니다.
4. <엘리시온>은 과연 어떤 게임인가?
이것은 포란 1편을 보면서부터 내내 떠나지 않고 멤돌던 의문입니다. 제 생각에 <엘리시온>은 게임이 아닙니다. 작가가 만든 그저 하나의 이세계일 뿐이지요. 인공지능이 생각을 하고, 유저가 유저에게 부복을 하고 목숨을 애걸하는 게임이라.. 현실 세계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 보니 "그런 시스템 제작이 가능해질 만큼의 미래세계 게임입니다"라는 설정만능대사 한 마디로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정말 그런 변으로 독자를 납득시키려 한다면 저는 상당히 실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엘리시온> 자체는 모순투성이에 당위성이 빈약한데다 자유도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밸런스가 엉망진창인 게임입니다. 이벤트라곤 해도 몬스터들이 사냥터를 마음대로 옮겨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자유도가 높다면 초보자 존에서 몹피도 가능하다는 얘긴데, 그럼 마음만 먹으면 한두 명의 고렙 유저가 게임 자체의 기능을 정지시켜 버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레벨 100의 유저가 고레벨 사냥터의 몬스터를 끌고 초보자 존에 눌러앉아 버리면 게임을 시작하는 유저들은 초보자 존에 사냥하러 나가는 순간 피죽이 됩니다. 초보자 존을 나갈 수 없으므로 게임을 지속할 수 없죠.
이런 식으로 한두 명이 게임 자체를 망가뜨리는 설정을 지니고 있는 <엘리시온>의 말도 안되는 자유도와 생각, 대화를 하는 인공지능의 정체가 저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크래커는 분명 필력과 창조성이 매우 뛰어난 작가이지만, 포란을 쓰면서 딱 하나 실패한 것이 있다면 바로 게임의 창조입니다. 이런 게임이기에 가능했을 에피소드들을 생각해서 웬만하면 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는 않았으나, 밸런스를 생각하지 않았던 점이 바로 <엘리시온>을 망작으로 만든 패인이라고 생각이 되네요.
5. 엄청난 캐릭터들.
아직 2권에 불과하기에 말을 아낄 수밖에 없지만 아무래도 전직 랭킹 1위가 주인공이기 때문인지 드러나는 면면들이 엄청나게 화려합니다. 그중에서도 홍월자 카시어는 대박이군요.
타이틀을 소환하는 순간 상대방의 올스텟 50%를 깎아버리는 개사기 먼치킨 스킬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다크 프리스트라는 히든 직업으로 어쌔신의 공속과 힐러의 치유스킬을 가졌습니다. 완전무결한 최강의 먼치킨이죠. 연금술사로서 라칸 역시 가요메르크의 구슬이나 솔리드 독, 토베의 사전 같은 무시무시한 무기를 지녔지만 캐릭터의 무력이 지나치게 개개인에게 편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특히 일레인의 마스터 스킬을 보니 느낌은 확신으로 굳어지더군요. 밸런스 밸런스.. 자꾸 밸런스 타령만 하게 되는데 캐릭터의 스킬분배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소수 캐릭터의 지나친 강함이 자꾸만 눈에 밟힙니다ㅠㅠ 중간보스급 악역들이 이 정도인데 드래곤을 때려잡은 최종보스 엑시리온은 도대체 어느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요. 그리고 그 녀석을 란이 어떻게 이긴다는 거죠..?
까마득하게 높은 적과의 벽이 절망감을 안겨줍니다. 멀어도 지나치게 멀다는 생각이 들 정도네요. 란도 단시간에 강해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레이트 웜과의 싸움만 봐도 싸울때마다 패널티를 얻는 라칸과는 달리 손짓 하나로 수만 명을 부리는 엑시리온의 전력이 너무 강합니다. 란 하나로 NPC도 아닌 수만 명의 유저를 젖히고 그 정점에 있는 최고최강의 엑시리온마저도 패퇴시킨다는 것은.. 랭킹 1위가 모든 것을 쏟아부은 가디언이 아니라 운영자가 와도 불가능한 일 아닐까요. 랭킹 1위라 해도 결국 한 명의 유저일 뿐입니다. 랭킹 2위와 3위가 협공을 하면 지는 게 정상이죠. 게다가 라칸은 전직 랭킹 1위입니다. 그런 라칸의 복수가 성공한다는 자체가 말도 안되게 여겨질 정도로 적들의 무력의 수준이 그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그마치 만 단위입니다. 그리고 그들 개개인이 라칸과 같은 '유저'입니다. 만 명의 유저를 젖히고 현 랭킹 1위인 엑시리온을 꺾는다라...
가능하길 바라지만 아무리 최강의 가디언이라도 무리인 건 무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스케일이 지나치게 크군요.
6. 마치면서.
그래도 문피아에 와서 본 소설 중 가장 좋아하는 '포란'의 비평글이라 가능하면 찬양하는 쪽으로 하고 싶었는데.. 비평을 쓰다 보니 또 지나치게 신랄한 비평이 되어버렸습니다. 얼마 전 이 비평글의 10분의 1도 안되는 고상한 비평에 게시판을 내려버린 작가분도 계셔서 더욱 조마조마한 마음입니다만, 혹시라도 이 비평을 읽고 포란을 읽으려다 포기하는 분이 있다면 큰 실수하시는 겁니다. 현재 쏟아져나오는 게임판타지 중 이만한 수작을 또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지적한 단점을 제외하면 장점밖에 안 남는 멋진 소설이기 때문에 장단점을 명확히 구분해서 장문의 비평글을 적고 싶으나, 시간이 허락하질 않는군요.
지금은 1, 2권을 읽고 비평글을 쓰지만, 3권부터는 감상란에 감상글로 올리는 편이 좋겠네요.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이것도 결국 제 개인적인 감상이기 때문에 반감을 갖는 분이 반드시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건 이렇게 해석해야 해요.'라는 덧글 달아주시면 제가 너무 난처합니다^^; 있는 그대로 비평한 것이니 립립이라는 독자의 생각은 이렇구나 라는 정도로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Comment '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