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명 : 네르킬차일의 별
작가 : 도버리
연재 : 문피아 일반연재
요즘 장르문학계에서 정통판타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일반문학에 비해 쉽게 쓰이는 게 장르문학이지만 맛깔나게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손이 많이 가는게 정통판타지이기에 제대로 매조지하는 작가들이 많지 않죠.
더구나 시장의 유행이 양판물, 환생물,기갑물, 게임물, 현대판타지 등으로 계속 흘러가면서 이런 클리셰와 유행에 맞지 않는 고전적인 판타지를 고리타분하게 느끼는 독자도 있는게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의와 협을 말하는 정통 무협이 무협소설 시장에서 가지는 높은 위상 만큼이나 검과 마, 그리고 환상과 모험을 다루는 정통 판타지 역시 유행으로는 따질 수 없는 매력이 있는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써나가기가 어려운 탓 때문일까요? 앞서 말한 것처럼 정말 제대로 된 판타지, 양판의 안일한 설정을 탈피하여 자신의 설정을 가진 판타지, 제대로 된 필력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판타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 소설은 자신있게 읽어볼만 하다고 추천할 수 있어 기쁩니다.
네르킬차일의 별.
1. 필력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글솜씨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많은 소설이 초반에 번뜩이는 발상과 설정으로 작품을 끌어가다가 소재 동력이 고갈되면 갈피를 못잡고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이런 글솜씨의 부족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일겁니다.
이문열이 담배연기가 올라가는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식으로 글을 연마했다는 일화처럼 별 시덥잖은 소재로도 맛깔나게 이야기를 끌어가는 재주도 글쟁이에게는 필요한 소양이죠.
도버리 작가의 글월은 간결하면서도 화려해서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문장은 보통 2줄을 넘어가지 않아 읽기가 편하고 이해가 쉬우면서도 필요한 정보는 적절히 제공합니다. 장황한 문장으로 문장의 앞과 뒤를 왕복해야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소설들을 읽는 것에 비하면 참 수월하게 읽히는 소설이라 좋습니다. 이렇게 짧게 서술되는 소설은 무미건조하기 쉽지만 네르킬차일의 별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적절한 단어 선택과 꼭 필요한 것만 묘사하는 절제력으로 글의 가지를 쳐냈다고 보는 쪽이 맞습니다.
프롤로그인 ‘메샤의 트리플캐스터’는 정말 맛깔나는 도버리 작가의 필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편이라도 한번 보시면 이해되실 겁니다.
2. 플롯
이야기의 전개도 문장처럼 간결하면서 거칠 것이 없습니다. 더 길게 가도 될 챕터가 너무 빨리 끝나 아쉽기도 할 정도입니다. 질질 끌면서 분량만 빼먹는 소설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미덕이라 장점이라 볼 수 있지만, 계속 몰아치는 사건으로 인해 피곤한 느낌이 드는 부분도 있습니다. 사건 중간 중간에 쉴 틈이 있기는 하지마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고 이런 부분에 좀 더 신경을 써 주셨으면 밸런스가 더 좋아졌을 것 같아요.
물론 이 부분은 제 취향과 관점에 의한 평가이고 밀도있는 전개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딱 적절하다! 라고 여기실 수준입니다.
사건의 흐름은 매끄럽고 무리없이 전개되지만, 각 사건들의 분량 조절은 약간 불균형적이라는 느낌도 듭니다. 키슬로의 불 챕터 같은 경우는 좀 더 길게 가도 되었을 거 같고, 얼음마녀 챕터는 너무 축약되고 생략된 듯 하여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 건 아예 반권~1권 분량은 들여 설명해야 더 맛깔나게 독자가 이해할 수 있을 내용 같습니다.
약간 걸리는 점이 있다면 최종보스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카이릭과의 조우 비율이 너무 높다는 겁니다. 초반에 나와 “꿇어라. 이것이 너와 나의 눈높이 차이다.” 정도로 임팩트를 주는 건 좋지만 사건마다 마지막에는 카이릭이 나와 주인공 일행을 탈탈 털어주니 주인공이 너무 없어보이고 위태로워 보입니다. 던젼을 깰 때 마다 보스는 마왕이 나오는 격이라고 할까요? 하나씩 깨부수면서 성장하는 왕도적 재미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시드가 성장을 해도 그것 이상으로 카이릭이 강해지고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먹는 식이라 감흥도 덜합니다..
3. 설정
판타지 소설에서의 설정은 빙산과 같아야 합니다. 10을 설정해두면 그 중의 1 정도만 수면 위로 떠올라 눈에 보여야 설득력을 갖추고 완성도를 높힌다고 봅니다. 많은 작가들이 빠지는 함정이 내가 설정한 10을 모두 꺼내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휩쓸리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다 설명하려니 글은 글 대로 장황해지고 독자가 궁금해할 여백 자체가 없이 거품처럼 가벼운 소설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네르킬차일의 설정은 매우 탄탄하고 독창적인 면이 많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설명은 딱 적절한 수준, 독자의 흥미를 돋구는 수준에 멈춘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주인공 시드가 기사이기 때문에 기사들이 믿는 신 레놀테인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오지만, 레놀타인 교의 구조가 어떻느니, 교리가 어떻느니, 역사가 어떻느니 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에 필요한 만큼만 서술되죠. 바람직합니다.
9서클과 오러블레이드, 양판월드의 설정은 대부분 배제하고 있어 좋다..라고 말하면 작가분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배제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를 이미 구축하고 있는 소설이기 때문에 흔해빠진 양산형 설정을 언급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드러난 1보다 감춰진 9가 더 궁금한 네르킬차일의 별입니다.
4. 인물
네르킬차일의 별 의 인물 군상 역시 매력적이고 소설의 등장인물로 구분되기 쉽고 특징있게 만들어져 있어 보기 좋고 이해가 쉽습니다. 제롬과 카이릭, 플라엘라의 인물 완성도는 상당히 높아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아마 초기부터 구상한 뼈대가 되는 이야기에 가장 근접한 인물들이 아닐까 생각도 됩니다.
그렇지만 주인공 시드는 좀 존재감이 부족합니다. 묘사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인물 성격이나 특징을 드러낸 사건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우유부단한 성격도 아닌데 뭔가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습니다. 너무 강한 카이릭에게 항상 얻어터져서 그런 느낌일까요? 제롬이 너무 강하고 카이릭이 강하고 플라엘라가 강해서 묻히는 것 때문일까요?
강력한 적에 맞서 시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조커 제롬의 존재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같이 파티를 꾸려서 다니기에는 제롬은 너무 강합니다. 히코 세이쥬로와 같이 여행을 하는 히무라 켄신의 이야기를 그리는 바람의 검심을 읽으면 아마 이런 느낌일거 같기도 하네요.
인물의 소모가 너무 빠른 감도 있습니다. 카이릭에게 개조된 시드의 동생 크리스, 얼음 마녀 나이켈, 마법사 에이슨은 더 등장시킬 수 있는 매력적인 인물들인데 처치곤란한 존재처럼 너무 서둘러서 황급히 ‘정리’해 버린 느낌이 강합니다. 분량을 줄이려고 하신게 아닌지 모르지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총평
전체적인 완성도가 매우 높고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정통 판타지 소설입니다. 오히려 너무 정통적인 판타지라 인스턴트 판타지 애독자들은 당황하실수도 있지만, 그런 인공적인 입맛을 날려버릴 만큼 깊은 재미가 있습니다.
물론 제 짧은 안목으로 몇몇 단점을 지적했지만 그것은 소설의 전체적 완성도에 비하면 매우 사소한 문제라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후반으로 가면서 조금씩 글 쓰시는데 피로감이 엿보이기도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좋은 소설은 좋은 독자분들이 많이 읽어줘야 더 꽃을 피울 수 있는데 ‘네르킬차일의 별’ 이라는 꽃은 아직 알아봐주는 사람이 적은 것 같아 더 안타깝습니다.
좋은 소설을 읽으면 작가의 다른 작품,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도버리 작가님이 네르킬차일의 별을 훌륭히 완성하시기를 바라고, 다음 작품 역시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분명 글을 쓰실수록 더 좋은 작품을 쓰실 수 있는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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