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 작가님 작품을 한 편 보고나면 나는 진이 빠진다.
마치 맛있는 중국음식을 포식하고 난 후에 느껴지는 느끼함이랄까? 이번에 읽은 작
품인 ' 추혈객 ' 에서도 작가님 특유의 설정과 스토리는 나무랄데 없이 가위로 재단
한듯 깔끔하지만, 처음의 몰입감과는 달리 글을 다 읽고 난 지금엔 조금씩 아쉬움이
밀려온다. 내가 본 설봉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장단점은 다음과 같다.
1 치밀한 설정, 비단 전투장면의 묘사뿐만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접선되는 부
분이나, 요소에 지뢰처럼 깔아둔 복선들이 후에 연쇄적으로 폭발하는듯한 절정단
계에서는 감탄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기존의 무협소설에서 개연성없이 두리뭉실하
게 다루어졌던 무공경지 라던가 인체의 혈도에 관계된 지식이나 그에 편승한 독특
한 무공의 창조등등..작가님의 한계가 어디인지 측정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그러
나 그런 송곳같이 날카롭고 치밀한 설정에만 치중한 나머지 마치, 그 사람이 이렇
게 하면 이렇게 되게 되있고 뭐든지 계획한 대로 미래의 일들이 퍼즐처럼 짜맞춰
지는 전개가 매 작품마다 반복되어 독자들을 지치게한다. 그 예로 등장인물 중 머
리가 좋은 사람이 이건 이렇게 될 것이다 하면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곧바로 이루
어지고, 마치 현대의 매스미디어 체제를 갖춘 시대처럼 소문이나 평판의 전달속도
가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라 하겠다. 물론 이것은 어찌보면 무협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재미의 요소이겠지만, 작가님의 작품내에 흐르는 분위기 자체가 현실과 진
지함을 일관되게 고수하는 차에 이런 전지전능한 일들이(이것마저도 치밀한 설정
을 포장하여.)계속 벌어진다면 독자로서는 결국엔 혼란함과 식상함을 느낄 수 밖
에 없다는 생각이다.
2 무공의 분류와 체제, 이제껏 설봉 작가님만큼 수많은 무공의 창조와 그에따른 부
가설정 마저도 완벽하게 서술해놓은 작가분을 뵌 적이없다. 특히, 위에서도 잠시
설명한 바와같이 인체의 혈도나 신비한 부분을 새롭게 해석, 그것을 소재로 인용
하여 독특한 무공을 창조해내는 분야에서는 작가님을 따를 분이 없다고 감히 생각
한다. 하다못해 단순한 이름이긴 하지만(그래서 더 인상적인지도...)항상 구파일
방이나 오대세가 같은 진저리나게 등장하는 문파들을 배제하고 독특한 행동양식과
문규를 지닌 새로운 문파들을 매번 작품상에 등장시켜 활약하게 만드신 부분은 높
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어느것도 도를 넘으면 부담이 되는 법, 하나의
작품에서도 넘처나는 많은 무공과 수많은 상황의 설정등을 하나하나 설명하듯이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방식은 차라리 그것의 설명과 익히고 배워가는 과정을
생략하고 빨리 이야기가 전개되길 바랄 지경이 된다. 머리속에 세워두신 설정들을
모두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음이신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분들에 대한 친절이
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물가에 내놓는 심정으로 키우면 응석받이가 되듯, 조
금은 독자들에게도 스스로 생각하고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끔 숨통을 트여 주셨으
면 좋겠다. 처음엔 대단하고 새롭게만 보이던 설정들도 자꾸만 반복되다 보면 이
내 식상해 지기 마련이기에...
3 주인공이나 조연급 인물들의 몰개성화.
남해 삼십육검의 비건, 사신의 종리추, 추혈객의 사령운, 대형설서린의 독사, 이
들, 설봉님 작품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외따로히 등장하여 기다렸다는 듯이 합류
한 여러 조연들과 함께 거대한 음모를 꾸민 집단에 맞서 항쟁한다. 이렇게 큰 갈
래로만 본다면 별 문제 없겠지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과 얽히는 인간
군상들이 모두 비슷비슷 하다는 데엔 이제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느낌이다.
주인공은 모두 냉철한 이성에 외유내강하며 대국을 바라볼줄 아는 안목을 지니고
사람을 이끌리게 하는 매력이 있다, 라고 억지로나마 정의할수 있는 지경에 다다
르지 않았는가? 주인공이 있고 그 아래에 머리쓰는 군사가 있으며, 여러 고수들이
주위에 운집해 있다는 가정이라면 종리추가 이끄는 살문이나 독사가 수장인 패거
리나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겠는가? 더이상 집단과 집단이 힘을 겨루는, 음모론에
서 비롯한 이야기 구조를 벗어나 이제는 좀더 다양한 주제로 나아갈 때가 되었다
고 본다. 등장인물들이 툭툭 내뱉는 대사들이 요즘말투인데 반해, 배경은 음모와
귀계가 판치고 전지전능한 요소들이 군데군데 보이는 식이라면 더 이상의 감정이
입은 기대키가 어려운 상황이다. 실례로 대형 설서린에서 요빙이 독사를 위해 죽
는 장면에서도 나는 이상하게 감정이입이 어려웠다. 글의 내용은 머릿속에서 생각
으로 슬픈 장면이라고 말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주인공인 독사를 강호로 내몰기 위
해 계획된 수순이라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판단이 든 것이다.
설봉 작가님은 이 시대에 다시없을 최고의 무협작가중 한 분이시다.
그 분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나 많은 불평을 털어놓았지만, 한낱 헛소리로 치부해
도 좋을만큼 작가님의 역량과 재능은 감히 생각해 볼 수 조차 없을 지경이다.
존경하고 또 무궁한 발전을 바라는 만큼 평소 작품을 보면서 느꼈던 섭섭한 점들
을 드러내었으나 차마 누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보다 많은 독자분들이 설봉
님의 작품을 접해보길 바라며, 그분의 신간을 기다리며 나처럼 목이매이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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