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소를 읽고 나니 참으로 마음이 답답하다.
작가의 의도를 도무지 모르겠다. 아직 본격적인 사건의 전개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 상태라 앞으로 어떻게 이어갈 지 모르겠지만 이 때가지 게재된 글만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많은 잔혹함이 널려져 있지 않나 싶다.
다른 글에 비해 독특하게 긴 서장 부분.
단지 ‘거지새끼’, ‘고아새끼’라는 말로 인해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잔인해 질 수 있는 가? 마지막 객잔 주인은 진가영에게 특별히 몹쓸 짓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자신의 미래를 위해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가족 모두를.
자신은 중년의 남자와 떠날 것인 데도 말이다.
위지성에 이르면 더욱 혼란이 온다. 그에게 할당된 ‘장’의 제목은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다들 진가영이 주인공으로 알고 있다가 위지성을 위한 ‘장’에 이르러 허무하게 죽는 것을 보고 다들 속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진가영은 죽지 않았다. 위지성으로 전이 되었을 뿐이다. 위지성은 진가영에게 모든 것을 물려받았다. 생각하는 방식, 행동 요령, 그리고 그의 간마저 위지성의 내부에 깊숙이 들어 앉아 있는 것이다. 위지성이 곧 진가영이다. 진가영의 억지스러운 잔혹함과 위지성의 알 수 없는 과거로 인한 증폭된 잔혹함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서 생각된다.
그리고 위지성이 보여주는 일상적인 잔혹함. 그는 흡혈귀가 아니다. 피를 먹지 못하면 죽어버리는 그런 반인의 생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니라 단지 내공증진을 위해 피를 먹는다. 그것도 처음의 묘사는 이빨로 사람의 시체를 뜯는 다. 아무런 회한도 갈등도 없이 물어뜯고 마시고 씹어먹는다. 살수행각을 나서면서 화전민의 어린아이에 대한 그의 행동은 한 편의 스너프 비디오나 다름 아니다.
비록 소설이 어떤 상황이라도 표현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하더 래도 그것은 미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잔혹함을 표현함에 있어 꼭 사람을 동강내거나 찢어발겨야 만 잔혹한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단지의 고통만으로도 충분히 잔혹함을 보여줄 수 있고 공포를 전달할 수도 있다. 그런데 희소에서의 위지성의 잔혹함은 그에게 있어서는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렸다. 한 끼의 음식을 위해 닭을 잡듯이 그렇게 사람을 대한다. 남녀노소, 선악을 가리지도 않는다. 일상이 된 그의 도살을 보면서 잔혹함, 공포보다는 혐오감이 앞선다.
위지성이 주인공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주인공이고 아니고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누가 주인공이 되었건 위지성은 굉장히 비중 있게 다뤄질 것임이 분명하다. 물론 희소는 지금 시작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가 될 지, 도입 부분의 잔혹함이 어떻게 승화가 될 지는 작가만이 알 것이다. 다만 위지성의 일상이 된 도살 방식이 앞으로도 계속된다면 읽을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다.
희소는 기쁜 웃음이란 뜻이다. 아직 희소에서 이 웃음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작가의 필명이 묘하다. 가짜 웃음이란 뜻이다. 자신이 그려낸 잔혹함에 치를 떠는 독자들을 보면서 짓는 웃음이란 뜻일까? 슬픈 희소라는 생각을 하면서 차마 이 글을 추천하지는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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