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은 꿈꾸는 식물의 자양분인가?
어린 소년이 절세의 무공을 배우며 강호의 고수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처절한 복수에 성공하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아름답고 차갑지만 재기넘치는 소녀와 뜨거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온갖 모험을 겪으면서 보물을 찾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보잘것 없고 약한 이가 강호의 고수가 되어 힘있는 자들의 부정을 응징하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현실에서 보기힘든 기이한 것들의 환상들도 재미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얻고, 섹시한 미녀들을 품에 안으며, 기진이보들을 손에 움켜쥐는 이야기는 재미있다.
다시 한 번.
무협은 꿈꾸는 식물의 자양분인가?
김용의 <녹정기>는 어떠한가?
어린 소년이 황제의 신임을 얻어 높은 관직에 오르고, 아름다운 미녀들을 아내로 맞으며, 엄청난 재산을 주물럭거리고, 세상의 힘있는 위선자들을 엿 먹이며, 온갖 고난을 세치 혓바닥 하나만으로 농락해 댄다. 거기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죄다 주인공이 간여하게 함으로써 남모르는 사건들의 비밀을 즐기게 하고, 혹은 그러한 일들을 주관하게도 한다.
한 마디로 주인공은 어린 소년에서 이제는 세상에서 제일로 중요한 인물이 되었으면서도 현세의 고통과 번뇌에서 자유롭다.
녹정기에서 어린 소년 위소보를 둘러싼 이야기들은 현실의 모습이다.
권력을 둘러싼 황궁, 민족의 독립, 강호의 은원, 사랑, 사이비 종교, 신의와 배신, 남편들을 모두 잃어버린 시대의 여성, 해탈을 찾는 인간, 헤어나지 못하는 천박한 삶, 변태, 원하지 않는 주변사건들에 끌려다니는 나약한 인간, 탐욕...
작게는 개인에서부터 크게는 나라, 민족의 이야기들까지.
위소보는 이런 모든 현실과 관계하지만 그것은 마치 꿈처럼 몽롱하다.
사람들은 위소보에게 말을 걸고, 위소보는 그들과 대화하지만 한 화면에서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녹정기>는 재미있다. 너무도 재미있다.
그렇다면 녹정기는 꿈꾸는 식물의 자양분인가?
녹정기는 "농담"이다.
찌든 현실 속 챗바퀴 돌듯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힘없고 굽실대는 약한 아버지가 집에 오는 길, 포장마차에 들러 쇠주 한 잔 마실 때, 떨리는 손을 따라 불현듯 소리없이 눈물이 흐르면, 뜬금없이 들려오는 걸쭉한 음담패설이 섞인 그런 농담.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숨을 헐떡거리도록 웃게 만드는 ...
주변에는 똑똑한 놈들 천지라서 겉으로는 매너있는 채 미소짓고 다니지만,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고 생각하며 항상 긴장을 유지하고, 배신도 당해보고, 살아남아 위로 올라서기 위해 친하게 지내던 사람을 외면해 보기도 한 삼 사십대, 감설고토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아는 나이,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고 문득 거울을 보면 쓸쓸하고 차가운 눈, 그리고 입에 걸린 냉소. 그런 이들에게 녹정기란 것은 처음엔 씁쓸한 미소 한 모금을 베어 물게 하지만, 곧 가슴 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가식없는 웃음을 찾아 주고, 부족한 여유를 채워준다.
녹정기는 귀찮다고 하는 친구의 손을 잡아끌어 자랑스레 보여주는 곱고 환하며 아름다운 전신 미인도이다.
술이다. 부족하지 않을 만큼 많은 양에 가끔은 취하도록 마시고 싶은..
녹정기는 친구에게 보내준 선물이다.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간직하게 만드는 그런 선물 말이다.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