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의 등장과 그닥 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물론 일조를 하기는 했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봅니다. 총의 성능은 석궁에 비해 그다지 나을 것이 없고, 장궁에 비해서도 현격하게 떨어지죠. 문제는 인구수와 장창입니다.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 시대로 접어들게 되자, 외래의 기술들이 손쉽게 전수되기 시작한 뒤 서유럽의 인구가 대폭적으로 늘어났죠. 그래서 가용 병력수가 많아졌습니다.
그 이전 시대...그러니까 영국의 플랜태저넷이나 프랑스의 카페 가문들이 지배하던 명실공히 “중세” 의 전투규모는 끽해야 1~2만명입니다. 그 유명한 백년전쟁에서 발등에 불떨어진 프랑스의 총병력은 허세를 포함해 3만을 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 병력동원 규모가 10만은 가지요...사코 디 로마에 참가한 신롬의 병력은 란츠크네히트 포함해 최소추정 4만 이상?
벌써 숫자가 달라지죠. 그렇게 되니까 어디까지나 보조전력인 땅개전력이 되게 중시된 겁니다. 예전엔 어디까지나 오합지졸에 숫자도 안되는 공1방1체1의 경험치1짜리, 그것도 기사 숫자에 비해 크게 많을 것도 없는(병력이 1만 5천이면 기사5천에 보병1만<-용병 포함)...
그런데 르네상스 접어들면 보병 모여라! 하면 3만, 4만이 되죠...얘네들을 어떻게 활용할 거냐... 그 대안이 장창입니다. 훈련비용은 없다고 봐도 되고, 운용난이도는 제로에 수렴하죠. "기사 무섭냐? 그럼 뭉쳐^^ 무섭다고 팀원 버리고 도망치고 그러면 말탄 놈들이 쫒아와서 전부 등짝 빠갠다?" 한 마디면 되니까요. 무서우면 똘똘 뭉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 무지렁이 농민들에게 이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테르시오, 스위스 장창병대, 란츠크네히트 전부 르네상스 시기에 맹활약했죠. 거기다가 석궁병이나 총병을 덧붙이는 것인데, 석궁이나 총이나 생산비나 훈련비는 비슷했지만 야전에서는 총이 더 좋습니다...그 굉음이나 연기는 말이란 짐승을 지리게 만들기 좋으니까요. 좀 더 덧붙이자면, 신립의 기마병대가 일본의 조총병대에 지리고 개박살난 부분에도 공헌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총이든 석궁이든 어디까지나 보조전력이고, 기본은 장창병대죠. 위의 장창병대 3종에 일본의 이시가루, 명나라의(명장 척계광이 고안한) 절강병의 원앙진법(밀집창병전술) 모두 전부 1450년대~1600년대의 일이죠. 그때까지 활약하던 기사의 집단돌격전술을 일단 석궁이든 총이든 활이든 쏘아서 기를 꺾고, 싸구려 장창병의 밀집집단이 겁먹지 않고 똘똘 뭉쳐서 밀어붙이기만 하면 이긴다 이거죠. 전력 양성비용을 따지면 전력손실 교환비도 지극히 우수하고요.
사실 투사무기 없어도 되요. 장창병대의 질이 우수하다면. 란츠크네히트나 스위스창병대는 그런 거 안 쓰고도 부르봉, 부르고뉴, 합스부르크의 정예기사대를 박살내고 또 박살냈죠. 즉 무슨 투사무기를 쓰든 그건 개박살내기 직전의 기사단의 돌격기세를 꺾어 “창병대의 피해를 경감시키고자” 했을 뿐이죠. 어차피 이기긴 이기는데 피해를 줄이면 좋으니까.
따라서 판금갑옷+돌격마+랜스 삼위일체 조합의 중요한 축인 판금갑옷이 소용없어지는 겁니다. 물론 근거리에서 쏴서 명중하면 즉사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건 석궁도 가능하고 활도 가능해요. 잉글랜드의 장궁은 강선개발 전의 총보다 월등히 강력합니다(물론 양성비용이... 장궁 당기려면 쌀포대 2개 무게로 데드리프트 할 줄 알아야 당깁니다. 명중연습은 그 다음에 또 시켜야 되고요...상비군 편성은 도저히 재력이 안되니까 영국왕이 심심하면 맨날 모든 영국민은 장궁으로 놀면서 연습해라라고 칙령 발표...).
결국 판금갑옷의 멸종에 있어서 총은 거들었을 뿐이란 겁니다. 그냥 서유럽의 인구수가 늘어나고, 그 인구수를 활용하기 위한 집단장창전술로 기사들을 모조리 카운터쳤을 뿐이에요. 스위스 장창 민병대(이름 생각 안남...), 독일 장창 용병대인 란츠크네히트, 일본의 창병대인 이시가루, 스페인 장창병대인 떼르시오, 명나라 밀집창병대인 절강병 모두가 그렇습니다. 이 중에 스위스, 독일, 명나라 장창병대는 총병대는커녕 궁수대도 따로 부대를 편성해서 운용하지 않았습니다... 척계광이 운용한 명나라 창병집단전술을 원앙진법이라 불렀는데 궁수는 썼음직한데 잘 모르겠네요.
그렇지만 정작 기사들이 멸종한 다음에는, 기사들을 카운터치는 장창병대는 소용이 떨어져 모조리 폐기처분됩니다. 그리고 다름아닌 ‘총병대’ 에 카운터당하면서요. 빠르게 돌격하는 기사들은 맞받아 칠 수 있지만, 너무너무 느려터져서 총병대에는 학살당하거든요.
그러는 와중에 기병전력은 중기병에서 경기병(의장대, 권총기병, 용기병, 검劍기병)으로 비중이 바뀌어서 무려 20세기 초까지 운용되고요. 기사<창병<총병<기사의 카운터 관계 중에서 가장 비싼 기사들이 먼저 도태되고(판금갑옷도 같이 사요나라~) 창병이 도태되니까 그 다음부터 ‘로맨틱하고 고상한 귀족전술(이라 쓰고 병신전술이라 읽는다)’ 이라 묘사되는 ‘라인배틀’ 시대로 옮겨가게 되는 겁니다. 물론 라인배틀 때에도 경기병, 포병, 장창병이 전부 등장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보조전력이고요. 뭐 제가 알기로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 결론적으로 판금갑옷은 총이 아니라 창 때문에 멸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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