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그냥 역사책에 나오는 사례들만을 보아도 승자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와 가장 비슷한 사례를 들자면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폴란드는 폴란드 분할이라는 사건을 통해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게 말 그대로 분할되었습니다. 벨라루시아,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동부 폴란드는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갈리시아 로도메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서부 폴란드는 프로이센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폴란드라는 국가가 순식간에 공중분해되고 3개 국가의 영토로 변해버렸지요. 누가봐도 폴란드가 패자라는 것이 뻔히 보입니다. 폴란드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았나요? 폴란드의 언어와 풍습이 사라졌나요? 폴란드의 민족적 정체성이 지워졌나요? 폴란드는 3개 국가 사이에 분할된채 무려 100여년을 지냈지만 폴란드의 역사는 잘만 기록되고 잘만 남았으며 폴란드의 언어나 전통및 풍습같은 민족적 정체성도 잘만 남았습니다.
비슷한 사례 더 많습니다. 이건 역사라기보다는 인류학에 좀 더 가까운 사례인대, 아프리카의 티브족 관련 이야기를 한번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프리카의 티브족의 경제는 3개의 분야로 나뉘어져 있었고 그 3개는 각각 피라미드 형식으로 계급이 나뉘어져있었습니다. 가장 낮은 계급의 경제는 생활분야, 그 위가 위상분야, 가장 위가 결혼분야입니다. 모든 티브족은 낮은 계급의 경제를 이용해 상위 계급의 경제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좀 특이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었지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티브족만의 독특한 풍습입니다. 누가 연구했을까요? 유럽사람들과 미국사람들이 연구했습니다. 얼라? 승자가 승자의 역사가 아니라 패자의 역사를 써주네요?
역사학자들에게는 교차검증이라는 놈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2개 이상의 사료들을 교차해서 검증하는 것입니다. 과거 사람들은 분명 승자의 관점으로 기록을 남길 때가 제법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승자의 기록이 역사로서 남기 위해서는 교차검증을 통과해야하고 교차검증이라는 필터를 통과한 기록은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기록으로서 역사에 남게 됩니다.
그리고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가 그저 미국의 아량 덕분에 남은 것이고 지우고자 했다면 완전히 지워졌을 것이라고요? 너무 황당하고 기가 차서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말도 못하겠네요. 불가능합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가정해봅시다. 우가우가 땅에 울랄라 부족이 살고 있었는대 유럽 국가들이 갑자기 울랄라 부족을 지워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갑자기 총들고 달려와서 울랄라 부족을 한명도 남김없이 죽였고 울랄라 부족은 그렇게 존재했었다는 사실마저 잊혀졌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현대가 됬으며 인류학자와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울랄라 부족이 살던 곳에 발굴장이 들어서면 고고학자들은 인간의 거주 흔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창촉이나 토기를 발견하게 되겠고 탄소연대측정을 통해 몇년도에 울랄라 부족이 살았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대 고고학자들은 조금 더 연구하다가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대규모의 뼈무더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근처에서는 부러진 창촉, 납탄, 쇳조각, 그외 다양한 전투의 흔적도 발굴됩니다. 그 외에 고고학자들은 꽃가루 분석과 인류학자의 도움을 받아 정확히 어느 시기에 울랄라 부족이 이 지역에 정착했는지, 울랄라 부족 전에는 어떤 부족이 살고 있었는지, 그들의 숫자는 얼마나 됬었는지, 그들의 식생활은 어떻게 됬는지, 그들의 풍습은 어떻게 됬는지, 그들의 문화는 어떻게 됬는지, 그들의 발전상황은 어떻게 됬는지를 밝혀낼 수 있습니다.
그럼 역사학자는 울랄라 부족이 씻듯이 지워진 당시 근처에 어떤 조직이 있었는지를 확인한 후 관련 조직들의 공문서나 편지나 수필이나 일기나 소설같은 문서화 된 기록들을 조사해 정확히 어느 조직이 어떠한 이유로 울랄라 부족을 공격했는지를 밝혀낼 수 있습니다.
짜잔, 울랄라 부족은 문명화된 세계에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고 울랄라 부족은 단 한명도 남김없이 죽었지만 현대의 발달 된 고고학과 인류학과 역사학의 도움을 빌어 정확히 어느 시기에 울랄라 부족이 몇명이나 언제부터 언제까지 어떻게 무엇을 먹으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었고 어느 시기에 어떠한 이유로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공격당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 역사에는 몇년도부터 몇년도까지 우가우가땅에 울랄라 부족이 살았으며 누구누구에 의해서 몇년도에 어떠어떠한 이유로 공격당해 사라졌다라는 한줄의 기록이 남게 됩니다. 이 역사책만 본다면 단순히 한줄의 내용만 보일테니 아 지우기 참 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그 한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매달리는지를 알게 된다면 그런 말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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