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주 금요일, 우리 회사를 떠나 다른 곳에서 일하던
홍PD님이 놀러오셨었다.
손에는 커다란 유자차 병을 들고 오셨었는데,
다들 그 날은 차를 마실만한 시간이 되지 않아,
커피머신 옆에 둔 채 잊고 있었다.
오늘, 아침부터 추적추적 비도 오고 쌀쌀한 날씨에
달달하고 따뜻한 유자차 생각이 나서 난 머그컵을 들고
커피 머신 앞에 섰다.
유자차 마개의 포장지를 벗기고, 마개를 돌렸다.
"흡..!"
하지만 유자차 병은 그 커다란 덩치 만큼이나
거대한 포스를 풍기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감히 나를 네까짓 게 먹으려고 하냐는 듯한 그 자태에
묘한 승부욕이 피어올랐다.
너를 내가 먹고 말겠다.
그 후로 난 유자차와의 소리없는, 는 아니고
소리있는 사투를 벌였고, 내가 우스꽝스런 포즈로
그를 유혹했지만, 그 유자차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결국 힘이 빠진 나는 지원군을 불러야 겠다고 생각했다.
"김PD님 저, 이것 좀 열어주세요."
미간에 인상을 쓰고-아이 맥이 말썽을 부려서-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던 김PD님은 나를 슬쩍 돌아보곤 유자차 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한 채 유자차 마개를 잡고 돌리셨다.
하지만,
"흐읍...!"
그 유자차는 김PD님의 입에서 나직한 기합이 나오게끔 만들었고,
그제야 김PD님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걸 깨달으셨는지,
유자차 병을 정통으로 내려다보며 다시 한 번 힘을 주셨다.
하지만, 그 유자차는 끝판왕이었나 보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 1mm도.
대 여섯 차례 더 유자차 병에게 덤벼들던 김PD님은,
잠시 작전 타임을 요구하셨다.
나는 그 사이, '안 열리는 병은 고무줄로 해결!' 이라는
블로그 포스팅이 생각나서 회사를 이잡듯이 뒤져 고무줄 2개를
찾아왔다.
예전에도 안 열리던 커피 병 뚜껑을 고무줄로 열었던 전례가 있던
나는 그 만큼 고무줄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유자차 병 마개가 너무 커, 고무줄은 힘겹게 병 마개 밑에
걸터 앉을 뿐 마개를 '앙'하고 강하게 물지 못했다.
그래도 혹시나, 고무줄에 대한 맹신이 있었던 나는 유자차 병
마개를 잡고 돌렸고, 결과는 뻐근해오는 팔목의 통증 뿐이었다.
내가 그럴 동안 잠시 휴식을 취한 김PD님은 다시 유자차 병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이번엔 유자차 병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병 마개를 두 손으로 돌리기 시작하셨다.
그 모습에 나는 강렬한 믿음이 생겼다.
이번엔 김PD님이 유자차 병을 열어주시리라..!
물론 그 자세로 유자차 병과 사투를 벌이는 김PD님이
"흐압..!"
"으랏챠챠!"
"아나, 이 개X끼, 일부러 안 열리는 거 가져온 거 아냐?"
"으뚜따따따!"
와 같이.
기합성을 뱉어낸 것은 단지 밖에 내리는 비가 땅을 때리며
나는 소리와 같은 아주 자연적인 자연의 소리였을 뿐이다.
한참을 유자차 병과 엎치락 뒤치락 하시던 김PD님은
결국 'Good game'을 외치고 의자 위에 기절하셨다.
아아.. 이대로.. 무너지고 마는가..
"...개X끼, 안 먹고 말아..."
라고 나지막히 읊조리는 김PD님의 그 말이
어찌나 구슬프게 들리던지,
나는 그 때 불현듯 마지막 지원군이 생각났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탕비실로 급히 뛰어갔다.
그래, 우리에겐 그가 있었다.
언제나 천대받지만 한없이 소중한 그. 혹은 그녀..
고.무.장.갑
오오 고무고무고무시여!
나는 탕비실에서 고무장갑을 흡사
암 제거 수술실에 들어가는 의사처럼 장착하고
회사로 들어왔다.
물론 그 때, 날 보고있던 메인 작가님의 광대가
하늘로 승천할 것처럼 들리던 웃음소리는 단지
저 밖에 내리는 빗소리와 같이 자연적인 소리일 뿐이다.
하얗게 불타 의자에 널부러져있는 김PD님을 지나
나는 그 유자차와 다시 정면으로 맞섰다.
그 웅장한 자태에서 뿜어나오는 포스에
살짝 겁에 질렸지만, 나에겐 고무장갑, 그가 있었다.
내가 두 손으로 그 유자차를 부여잡고
한 두차례 힘을 쓰던 그 순간!
유자차 병은
열리긴 개뿔.
역시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아, 고무고무고무시여...
굳이 안 먹어도 되지만 괜히, 왠지, 아니 무척
그 유자차 병 안에 든 유자차를 떠서 뜨끈한 물에 풀어서
드링킹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 또한 패배해서 의자 위로 풀썩 쓰러지자,
김PD님이 정신을 차리시곤 나에게 고무장갑 한 짝을
요구하셨다.
내가 고무장갑을 벗어서 드리며
"근데 안에 물이 조금..."
"으악! 이게 뭐야 찝찝해!"
라는 작은 해프닝은 넘어가도록 하자.
다시 유자차 병을 다리 사이에 끼운 김PD님은
한 번의 심호흡과 함께 유자차 병 마개에 힘을 주기 시작했고,
"너 가져오면서 일부러 장갑 안에 물넣었냐."
라고 말한 것도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김PD님의 허벅지 암바(?)에 여러차례 숨통이
조였던지 유자차는 결국
'뻥'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달큰한 향을 쏟아냈다.
아아....
힘들었다...
난 지금 유자차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다.
음, 맛은 괜찮았다.
향긋하면서도 달달한 유자차.
그대들의 눈동자에 건배.
↑ 유자차 병 라이터와 크기 비교 사진
(커다래서 손으로 쥐고 열기가 더 힘들었네요 ㅠㅠ)
* * *
윗 글에 제 표현상 과장이 있긴 하지만
말이나 상황은 그대로 쓴 거에여...
아아 힘들었다...
다들 유자차 마시세요. 두번 마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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