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백야
작품명 : 신주오대세가
출판사 : 로크미디어
백야 님의 소설이 나와서 간만에 감상을 남깁니다. 이번 감상글도 평어체로 썼습니다.
기다리는 것과 기대하는 것. 그리고 꿈꾸는 것.
나는 기다린다. 많은 것을 기다린다. 기회를 기다리고,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고, 더 나은 세상을 기다린다. 미래의 나를 기다린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사람의 삶이란 현재에서 미래로의 끊임없는 의미부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자신의 상황을 미래에 이입하므로, 나는 기다림이라는 상황에 습관화되어 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
장르 문학에서 처음으로 기다림이라는 것을 이우혁 님의 퇴마록이 알게 해줬다. 혼세편이 거 짐 1년에 한 권씩 나왔을 때, 어렸던 나이에 처음으로 진득한 기다림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장르 문학에서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은 많다.
이영도 님의 차기작을 기다리고, 이우혁 님의 새로운 소설을 기다린다. 또한, 언제 나올지 모를 용대운 님의 ‘군림천하’ 다음 권도 기다린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기다리는 것이 나왔을 때의 기쁨은 남다르다. 읽고 싶은 욕구는 물론이고, 기대감과 기분 좋을 흥분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 작가 백야 님의 새로운 소설을 마주했을 때의 기분은 다른 기다림과 그것에서 오는 기쁨과는 조금 달랐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그래,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백야 님의 소설이 비상하기를.
‘태양의 전설 바람의 노래’의 조기 종결. 이미 예전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 때의 착잡함은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내 마음에 묻어 있다. 지금보다 어렸던 시절의 내가 그곳에 있었다. 친했던 책방 아저씨에게 사정했던 내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하지만 내 사정에도 아량 곧 하지 않고 ‘태양의 전설 바람의 노래’는 반품 처리됐다. 너무나도 안 나간다고 내게 미안해하던 책방 아저씨의 얼굴도 떠오른다. 작가 이름으로 책을 드려 온다던 그가 백야라는 이름을 낯설어 하던 것이 놀라웠다. 아저씨, 그러면서 무협 작가에 대해서 아는 척을 했던 거에요? 라고는 착하진 않지만 독한 말은 못하는 내가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소리는 아녔어서 속으로만 곱씹었다.
이 책을 보려고 결국 다른 책방 여러 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슬펐다. 자주 가는 책방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없던 현실이 슬펐던 것이 아니다. 책방 아저씨가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서 슬픈 것도 아니었다 (물론 약간의 배신감은 존재하고있었다). 이토록 훌륭한 소설이 반품처리 되는 현실이 슬펐다. 이런 글이, 이토록 정성스레 준비되어 훌륭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소설이 외면받는 세상이 슬펐다. 결국 조기에 종결되어 그 뒤의 이야기를 볼 수 없던 때엔 허무함 만이 감돌았다. ‘아무리 책방 시스템이 이렇다지만, 아무리 읽는 독자의 연령이 낮아져 좋은 책을 접하기 점점 어렵다지만, 그래도.. 정말 이건 아니잖아.’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는 문장은 마음속에서만 울릴 밖에.
하지만 아무리 내가 이렇게 분해한다고 해도, 억울해하고 안타까워한다고 해도, 글을 쓰는 작가 본인의 안타까움만 할까. 그 좌절을 이해하는 척 치기를 부리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그저 백야 님 소설의 훌륭함을 아는 그의 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백야라는 이름을 마주할 때의 안타까움은 다른 작가의 이름을 접할 때와는 다른 감정일 수밖에 없다.
백야. 그 훌륭하고 완숙미 넘치는 필력에도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이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꿈꾼다. 이번에야말로 그의 글이 드높게 비상하기를, 그의 이름이 지금 장르 문학을 새롭게 접하는 어린 독자들에게까지 퍼지기를. 시대를 잘 타고나서, 운이 좋아서 글 같지도 않은 것을 쓰면서도 출판을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야기를 질질 끌어 100권쯤 돼야 끝날 것 같은 글을 쓰는 사람도 있다. 자기 복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나는 보고 싶다. 상황과 상관없이, 훌륭한 필력과 좋은 이야기 구성, 진지한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는 작가의 소설이 유명해지는 것을 이 장르 문학 세계에서 보고 싶은 것이다. 인기도나 판매 부수보다도 글의 완성도에 신경을 쓰는 작가가 성공하는 것을 보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멋진 일일 것이다.
알고 있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의 글은 호흡이 길다. 그의 글은 진중하다. 현 장르 문학의 트랜드에는 맞지 않는다. 백야 님의 글은 최소 20대 이후의 독자들에게나 즐거이 읽힐만한 소설들이 대부분이고, 이번 신작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런 멋진 일을 꿈꾸고 싶다. 이것이, 내가 그나마 현 한국 무협 시장에 기대하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낭만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백야 작가의 이번 소설 ‘신주오대세가’를 전 연령에게 추천한다.
신주오대세가
백야 님의 비상을 바라면서도, 아니 어쩌면 백야 님의 진정한 비상을 바라기에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태양의 전설 바람의 노래’의 전개 방식은 이야기 전개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무척이나 흥미롭지만, 반대로 장르시장엔 최악의 진행방식이었다.
과거와 현재의 복합적인 진행 방식과 흐름은 백야 님의 필력에 의하여 놀라울 정도의 흡입력을 표출했다. 개인적으론 이러한 전개 방식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한번 흐름을 놓친다면 다시 따라잡기는 그다지 쉽지 않을 것이다. 즉, 중간에 흥미를 잃을 소지가 다분했다. 또 한, 한꺼번에 출판되는 것이 아닌 차례대로 책이 추후에 나오는 현 장르 문학 시스템에서 바라본다면 문제는 더욱 두드러진다. 다음 권의 텀이 한 달만 되어도 전 이야기의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는 독자도 있다. ‘태양의 전설 바람의 노래’ 같은 경우엔 두세 달에 한 권씩 나왔다. 출판 주기가 느린 것은 그만큼 백야 님이 책에 공을 들인다는 것의 반증일 것이다. 그의 노력이 책에 절절이 묻어났다. 하지만 짧지 않은 출판 주기와 더불어 이야기의 전개 방식의 복잡함은 새롭게 유입되는 장르 소설 독자들의 관심을 사로잡기엔 약간의 무리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기다림을 싫어하는 어린 독자들에게 어필하긴 힘든 진행 방식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부분을 의식하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주오대세가’ 초반의 진행방식은 쉽고 평이하다. 어떤 독자들도 무리 없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럽다. 이야기는 단순함에서 복잡함으로 흐른다. 거기다 부차적인 설명도 상당히 꼼꼼하게 되어 있다. 이런 부분까지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아주 조금 들기도 하지만, 백야 님의 소설을 새롭게 접하거나 무협을 처음 읽는 독자들에겐 무척 기꺼운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것까지 고려하셨던 것 같은데, 확신은 쉽지 않다. 추측을 배제하고서 바라봐도 무척이나 친절한 글임은 분명하다. 백야 님의 소설을 전부터 접해봤던 나는 그 시작의 단순함과 평이함에 깜짝 놀랐으나, 추후에는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복잡해져 가는 것을 보고는 초기의 우려가 단순한 기우였음에 안도했다. 오히려 점차적으로 복잡해져 가는 이야기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정신없이 책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그렇지. 백야 님의 필력이 어디 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균형과 구도
‘신주오대세가’에도 이전부터 느꼈던 백야 님의 장점은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 장점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백야 님의 글에는 눈에 띄는 특징이 없다. 문체가 남성미를 물씬 풍기지도 않고, 글 속도의 쾌감이나, 카타르시스를 자극함에 있어 전형화된 틀도 없다.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 구도도 없다. 깜짝 놀랄 정도의 참신함도 역시도 없다. 그럼에도 내가 백야 님의 글을 최고라고 치는 이유는 완벽에 가까운 균형과 등장인물들 간의 섬세한 구도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특별하게 두드러진 특징이 없지만, 그 모든 특징이 골고루 적당하고 효과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인간의 내면 묘사는 섬세하나 유약하지 않고, 글 전체의 분위기는 남성적이나 패도 적이지 않으며, 인간의 정이 느껴지지만 지나치게 오버스럽지 않다. 이야기의 진행과 흐름에 있어서도 훌륭한 절제와 매끄러움을 보여준다.
글을 씀에 있어 독특하거나 현란한 필력과 표현력을 보이고 싶은 욕구는 때로 참으로 처치 곤란하다.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사용하면 칭송을 받을 수 있지만, 지나치면 되레 담담히 쓴 것만 못하다. 소설에서 지나친 표현력은 책 이야기의 자장가에서 비몽사몽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독자의 정신을 깨워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실제로 자다가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은 대부분 꿈의 이질감이 수용할 수 있는 한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이 소설에서도 일어난다. 순식간에 몰입되어 헤어나오지도 못하고, 문체가 어쩐지 저쩐지 파악도 못 하고서는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긴 꿈에서 깨어나 어슴푸레한 푸른 아침를 천천히 마주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정도 수준의 소설들은 단지 이야기가 흥미롭고 필력과 표현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그 표현을 적절히 자제하는 능력이 없이는 힘들다. 내가 봤을 때 백야 님의 절제와 통제력은 대단히 훌륭하다. 조금 과도하게 표현하고 싶은 부분에서 그러한 욕구를 이겨내고 다듬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물론 많은 작가분이 이러한 일을 하고 계시지만, 나는 백야 님의 그러한 밸런스 감각이 군계일학이라 여기고 있다. 이야기의 완급 조절 – 밸런스 만큼 재능과 센스, 경험을 요하는 부분도 없다.
특히나 현 장르 시장처럼 1,2권이 먼저 나오고 나머지가 한 달, 두 달에 한 권씩 나오는 현실에서 전체 소설의 진행에 있어 완급을 조절하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 쉽지 않은 일임을 알기에, 이야기만 조금 흥미롭고 참신하다면 완급 조절을 못 해도 이해하며 넘어가는 것이 현실. 또 한, 신진 작가들에게 그런 밸런스를 요구하는 것도 사실상 무리였다. 그래서 그러한 현상을 그저 인정하며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백야 님의 밸런스가 돋보이는 것이다. 언제나 약간 무언가 아쉬운 듯, 무언가 빈듯한 감정을 느끼다가 백야 님의 소설을 읽고 나서야 전체 요리 풀코스와 마지막의 산뜻한 디저트까지 먹은 듯한 완성된 포만감을 느낀다. 내가 언제나 약간은 아쉽게 느꼈던 그 부분이 이야기의 완성도, 글의 완성도, 즉 소설 전체의 밸런스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의 완급에 훌륭하게 내부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 등장인물들 간의 섬세한 대립 구도 이다. 아마도 이 대립구도의 대단함을 설명하지 않고서는 백야 님의 이야기 진행 방식을 극찬하는 이 글이 어설프게 느껴질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필력 좋고 이야기 완급을 훌륭하게 수행하시는 작가 분들을 놔두고 백야 님만 칭찬한 꼴이 될테니.
바꿔 말해, 등장인물 간의 구도야말로 백야 님이 쓰시는 이야기의 절묘한 밸런스, 그 중심이라고 생각한다.
다독은 하지 않았지만, 꽤 많은 무협을 읽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나는 대립자는 누구였나 생각해 본다. 바로 두 명이 떠오른다.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포스를 자랑했던 ‘신승’의 절세신마. 그리고 백야 님의 ‘천하공부출소림’에 나오는 천재 백마린. 주인공이 천재인 경우는 많으나, 주인공의 적이 천재인 경우는 그다지 본 기억이 없다. 설령 천재라 해도 그 천부적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듯 묘사되는 것이 대부분. 그러나 백마린은 달랐다. 상당히 오래전에 읽었음에도 아직 기억이 날 정도로.
주인공이 다 해먹는 소설에서 흥미진진함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인공을 평범하게 만드는 것은 위험한 시도이다. 어느 정도로 구도를 잡는가, 역시 밸런스의 문제이다. 주인공을 제외하고도 매력적인 부분이 많은 등장인물의 존재는 고급 요리의 환상적인 향신료와 같다. 메인 주제를 더욱 돋보이는 역할을 해준다. 미술로 예를 들면 바로크 시대의 카라바지오 라는 화가가 있었다. 이전 르네상스 시대에 엄청나게 발전했던 이상적인 구도와 원근법은 후대 미술에 엄청난 영향을 준다. 하지만 카라바지오 대에 와서야 강력한 조명, 어두운 그림자의 대비로 밝음을 더욱 부각시키는 방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짙은 어둠이 밝음을 더욱 돋보여주게 한다. 이런 방식은 나중에 히틀러가 그의 연설에서 써먹게 되지만. 여하튼, 그저 밝기만 하다면 그 밝음은 퇴색되어버린다. 밝은 빛이 밝은 것이 아니게 된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신주오대세가’의 등장인물들은 어떠한가. 초반엔 주인공인 조운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노련하고, 생각이 깊으며, 경험이 풍부하다. 조금 지나치게 능력을 몰아준 것이 아닌가 했는데, 이후에 남궁자명의 등장과 함께 이런 생각은 사라졌다. 그로 말미암아 이전까지 꽤 탄탄하게 상황을 이해하고 진행해가던 조운의 방식이 생각보다 어설프다는 것이 드러난다. 즉, 남궁자명이 등장하자 조운의 빈틈이 '보여지기' 시작한다. 이것은 흥미롭다. 그리고 그 빈틈을 자연스레 자명이 채운다. 거기다 묵묵히 뒤를 바쳐주는 고력. 잦은 문제를 일으켜 이야기를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끌어가는 조커같은 원굉도의 존재. 이 존재들의 구도가 참으로 흥미롭게 맞물려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억지스러움 없이 이야기가 복잡해져 가는 것은 원굉도의 존재가 크다. 그 외에도 적이었던 오치광의 사람 됨에 놀랐고, 최혼의 사내다움이 멋지다.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맛이 배여 있다. 바로 백야 님이 묘사하고 싶으셨다던 인간적인 캐릭터들. 거기에 더하여 남궁자흔.
남궁자흔
“난 늘 양심에 찔려. 녀석들의 뜨거운 눈빛을 볼 때나 녀석들의 올곧은 충성심을 느낄 때나 그리고 나와 세가에 대한 맹목적인 존경심을 느낄 때나..... 언제나 양심의 가책을 받지. 지금도 마찬가지야. 녀석은 내 명령을 진실로 알고 진심으로 이행할 생각이지. 그래서 난 가책을 받는 거고”
“양심의 가책은 양심의 가책을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세가의 대의 앞에서는 내 양심 따위야 저 방계에다가 이성의 자식 목숨처럼 하잘것없는 거니까.”
‘신주오대세가’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남궁자흔을 지목하고 싶다. 이 캐릭터의 완성도는 남다르다. 소설의 초반에 남궁자흔이 조운을 사지로 보내면서 위와 같은 소리를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는 그저 세가를 중요시하는 사람 좋은 상관, 그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남궁자흔은 후에 자신의 치욕적인 패배를 무마하기 위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다했던 조운을 판다. 분명 마음속으로는 조운이 내통하지 않았다는 확신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앞날을 위해 그의 희생을 안타까워하지 않으며, 심지어 자신의 변명이 세가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자 안도한다.
그는 이후에 이것을 조운에게 설명하게 된다. 자신의 잘못을 수하에게, 그것도 방계의 이성인 조운에게 담담히 말할 정도로 남궁자흔은 보통 인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담담한 사실의 토로이며, 그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고백은 해도 바꾸려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또한 도움을 받았을 때 예전에 수하였던 자들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시할 정도로 대범하기도 하다. 전형적인 강직한 인물의 표상. 높은 자존심에 훌륭한 사람됨, 뛰어난 지식과 훌륭한 무공 실력. 하지만 그를 바라보는 나는 불안하다. 그가 언제 적이 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의 곧은 심지를 봤을 때 갑자기 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맺고 끊음을 중요시한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적으로 돌아서게 된다면 그는 반드시 자신에게 합당한 이유를 부여할 테고,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타입은 무섭다. 뛰어난 능력이 무섭고, 그 냉철한 이성이 무서우며, 자신의 결정에 대한 완벽한 확신이 무섭다.
조운은 그의 생명의 은인이다. 하지만 조운이 기연을 얻었을 때 무척이나 분해하며, 은연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질투의 표출이리라. 또한, 조운에게 쏟아지는 맹목적인 신뢰가 부러웠던 걸지도 모른다. 여기에 그의 복잡함이 잘 표출된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조운의 기연에 알리고는, 다른 사람들이 흥분하자 애써 태연한 척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 말한다. 갑작스레 고고한 척하며 잡아뗀다. 마치 ‘너희의 혼란스러움과 배신감은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너희에게 사실을 말해줬을 뿐, 조운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심지어 나는 질투조차 하고 있지 않다’ 라고 말하는듯하다. 이런 남궁자흔에 대한 인간적이며 다면적인 표현력이 즐거웠다. 이토록 복잡하고 매력적인, 동시에 속을 알 수 없어 무서운 캐릭터를 무협 소설에서 본 적이 있던가.
비정한 세상, 비열한 사람
일전에 한상운 님의 ‘무림사계’에 대한 감상을 쓰며 인간적인 강호인에 대해서 조금 언급했던 기억이 난다. 기본적으로 ‘무림사계’와 백야 님이 보여주고 싶다던 ‘사람’의 이야기가 중심인 ‘신주오대세가’는 똑같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그 표현 방식이 전혀 다르다. ‘무림사계’가 파락호, 인간쓰레기처럼 여기던 하류 인생의 사람들 안에 존재하는 인간적인 모습, 전혀 다른 모습, 그리고 그들이 나아가려 하는 의지를 보여주기 위했던 여정이었다면, ‘신주오대세가’는 강호를 살아가는 인간 내면의 복잡성을 차분한 시선으로 담담히 표출해나간다. 냉정하고 비정하지만 동시에 인간적인 그 비열하며 또한 숭고한 모습이 바로 사람의 모습 그 자체가 아닌가.
예를 들면, 당신에게 친구가 있다. 당신은 그 친구와 친하지만 때로 그 친구의 무신경함이 짜증이 나기도 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 무신경한 친구 놈이 선물이라며 로또 복권을 한 장 줬다. 분명 당신의 생일을 잊고 있다가 갑작스레 당황하여 자기가 산 것을, 이런 것도 선물이라고 건네준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일주일 지나고 번호를 확인하니 2등 당첨이었다. 이번 2등 당첨은 1억이었다. 이제 당신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친구에게 이 사실을 말하면 경우 상 절반을 줘야 할 것이다. 더 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이 산 로또니 전부 자신 것이라 할지도 모른다. 거기다 당신은 빚이 4000만 원이 있다. 친구에게 절반만 준다고 해도 빚 갚고 나면 1000만 원이 남는다. 물론 큰돈이지만, 친구에게 말하지 않으면 6000만 원이 남는다. 그렇다고 말 안 하자니 양심에 찔린다. 거기다 친구 놈이 로또 번호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 역시 문제가 된다. 물론 당신은 무신경한 친구가 번호까지 기억할 정도로 예리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혹시 기억한다면? 그렇다고 솔직히 말하기도 뭐한 것이 친구가 절반에 만족하지 않다면 우정에 금이 가는 것은 자명하다. 친구에게 말하는 것이 우정을 지키는 것이 될 것인가, 아니면 말하지 않는 것이 우정을 지키는 것이 될 것일까? 이때 당신은 당신의 양심을 무시할 것인가, 그래도 그것이 도리라 여기며 존중할 것인가?
물론 양심을 더 중요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는 누구도 쉽게 결정이나 결론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 이런 것이 인간의 모습임은 굳이 설명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상황의 분기점에서의 미묘한 심리와 고뇌가 ‘신주오대세가’에서 훌륭히 표현되고 있다. 조운이 남궁자광을 구하려 할 때나, 조운이 남궁자명의 신분을 노출하는 것을 고민할 때 특히 그러하다. 이 외에도 소설 구석구석에 인물들의 고뇌과 다면성은 깊게 배여있다. 인간적인 비열함도 예외는 아니다.
남궁자흔에서 볼 수 있던 인간적이며 동시에 냉정한 모습. 큰 도움 받고서도 자신의 이득을 위해 방계 이성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추후에는 형제애마저 거리낌 없이 버리는 변화를 보여주는 남궁자광. 남궁자로를 희생양으로 여기려고 키웠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들어선 정을 무서워하는 복면인.
명암 대비처럼 이와 같은 비열함이 있기에 숭고함 역시 더욱 빛을 발한다. 수하를 아끼는 열혈 기질을 가진 오치광의 대범함. 자신의 동료는 반드시 지키고 살리려 하는 조운의 곧은 심지. 묵묵히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의 뒤에서 도움을 주는 고력의 희생정신. 시니컬한 분위기를 풍기던 남궁자명의 정에 굶주린 연약한 모습이 무척이나 인간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들이 모여 구도와 대립을 이루며 움직이는 이 소설의 균형 감각의 완성도는 훌륭하다.
비열한 사람들 속에서, 비정한 세상을 마주한 주인공 일행이 어떻게 그들의 따스함을, 곧은 마음을 지켜가는지, 혹은 어떻게 비정함에 물들어 변화하는지, 다음 내용이 무척 기대된다.
쓰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백야 님, 돌아오신 것 축하하고 건필하시길 바랍니다. 새로 출간하신 책,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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