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최지인
작품명 : 원고지 위의 마왕 1권
출판사 : 디앤씨미디어 시드노벨
800년 만에 부활한 흑색의 마왕 ‘가인’.
대기에 마나가 사라져 위기에 처한 가인은 마치 운명같이 한명의 소녀와 만난다.
순백의 소녀, ‘에리스’는 자신을 ‘작가’라 지칭하며 마왕의 재기를 돕는 대신, 슬럼프 탈출을 위한 새로운 신작 소설의 집필을 도우라고 말한다.
에리스가 ‘작가’라는 사실과 가인이 ‘마왕’이라는 비밀을 서로 숨기며 카토르바슈 신성학원에서 소설 기획을 시작한 두 사람.
하지만 그 집필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는데...
라이트노벨 전문 라이터 ‘크로이츠’ 최지인이 전하는, 잔잔한 원고지 위의 감동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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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공허의 상자와 제로의 마리아' 1권 이후, 다시금 '간략감상'이 아닌 모양세를 갖춘 '감상'으로 찾아뵙습니다. 오랜만이군요.
원고지 위의 마왕 1권. 한국산 라이트노벨 브랜드 시드노벨 출간작이며,2010년 5월 1일 발행.
작품 자체 보다는 일단 작가에 대해서 먼저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감상'을 쓰는 이유도 무엇보다 작가가 '그 사람'이니까 그런 면이 크니까요.
1. '크로이츠'라는 이름
현실의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인터넷 상에서, 그것도 이렇게 라이트노벨 감상을 끼적이는 '셸먼'이라는 페르소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들어보자면 바로 저 '크로이츠'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척박한 한국 라이트노벨계에서 몇 안돼는, '평론다운 평론'을 해 주던사람. 아니, 정확히는 일본에서 성립되고 있던 서브컬쳐 평론 이론들을, 그 중에서도 라이트노벨을 다루는 이론들을 정리해서 소개해준 사람입니다.
크로이츠님의 블로그를 알지 못했다면, 그리고 그 블로그의 방대한 자료와 크로이츠님이 번역하고, 정리하고, 또 나름대로 종합하여 쓰신 그 이론들을 접하지 못했다면 제 감상글 라이프는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라이트노벨이란 물건이 가지고 있는 '깊숙한 힘'을 자신있게 서술하는 그 자세. 그리고 그것이 성립할 수 있는 그 장르에 대한 역사와 정신에 대한 지식. 또 진지하게 그에 빠져들어 연구할 수 있는 방향성. 저는 그 모든 것에 영향을 받았지요. 그 글들로 인해 '작품'을 읽고 생각하는 시야가 매우 넓어졌다는 것에 얼마나 감사해야할지 모릅니다.한마디로 '오타쿠로서의 정신관'의 많은 부분을 크로이츠님께 빚졌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국내 장르계에서 '평론'이란 얼마나 부족하고 절실한 것인지도 알게 되었고.
또한 작품 하나하나에서 나름의 매력을 찾아내는 그 감상법은 제가 동경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록 소설 취향은 다릅니다만(죄송합니다, 크로이츠님. 종말의 크로니클은 도무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요. OTL), 작품의 감상을 단순히 자기기록이 아닌 '남이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때 어떻게 하는것이 올바를지에 대하여 크로이츠님께 배웠습니다.
이렇게 저 혼자 떠들어도 이제 인터넷 활동을 거의 접으신 마당이니(블로그도 정리하셨지요. 크로이츠님의 각종 유용한 글들은 사이트 '경소설 회랑' 등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사실은 좀 더 일찍, 출간되자마자 이 책을 사서 감상문을 써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래야 했습니다만... 그저 죄송하다는 말 밖에요.
2. 크로이츠의 위치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이 '크로이츠', '최지인'님의 작품, '원고지 위의 마왕'을 읽기가 꺼려졌을지도 모릅니다. 한국 라노베 평론계의 카리스마(...)가 소설을 썼다고 하니, 사람들은 매우 큰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그리고 출간되자 마자 올라온 여러 감상문들은
"애매하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전 '크로이츠'라는 이름에 실망하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3. 그리고 읽은 지금
전 한탄합니다. 국내 라노베계의 현실에 개탄스러울 지경입니다.
이게 애매하다면 도대체 눈이 얼마나 높기에!
아니, 재밌어 죽겠는데!
충분히 감동적인데!
정말 잘 쓴 책인데!
글에서 '크로이츠'의 향기가 물씬 묻어나오는데!
이게 왜 애매한 평가를 받는거지!? 진짜 이해할 수 없어!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도대체 뭘 기대한 거지?!
4. 스토리
800년 전. 세계 정복 직전까지 갔던 악의 마왕 가인. 용사 아스트레인의 검기에 쓰러진 그가 800년의 세월에 걸쳐 부활하였습니다.
허나, 마왕이기에 최강의 마법사였던 그는 대기의 마나가 고갈되어버리고 '마장지'를 사용한 서식마법이 발달한, 그리고 그 '마법'마저도 위험하다는 이유로 금지되어버린 이 시대에서는 마법 사용은 커녕, 마법으로 재구성한 육체의 유지마저도 힘들 지경.
우연히 침입하게 된 카토르바슈 신성학원에서 마왕은, 슬럼프에 빠진 천재작가이자, '마장지'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막대한 마력을 가진 특이체질 '에리스'를 만납니다.
그리고 에리스는 가인에게 협력을 약속하는 대신, 소설로 쓸 수 있을만한 '경험'을 얘기해 달라고 하는데...
5. 감상
다른거 다 떠나서 재밌어요. 마왕에 대한 설정과 서식 마법 등 세계관소품도 충분히 잘 짜여 있고, 캐릭터들의 매력도 모난 곳 없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가인과 에리스의 협력도, 거기에서 나오는 에리스를 비롯한 학생들의 고민도. 에리스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문제점과 거기에 얽힌 사정도.
그리고 '에리스가 쓰는 소설의 진짜 문제점'을 알아가는 과정과, 그 결과. 스토리 전개와 반전 구조. 그리고 캐릭터의 본질을 꿰뚫는 '성장'과 '결말'에서 오는 '감동'.
그 어느것 하나 빠질 것 없는 수작입니다. 읽는 내내 귀여운 캐릭터들의 행동과 곳곳에 퍼져있는 유머. 그리고 흡입력 있는 이야기로 눈을 때지 못했습니다.
캐릭터의 개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인상이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 캐릭터의 '매력'을 들어낼 장면은 충분히 등장하고,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더라도 절로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활개칩니다.
캐릭터에게 '가혹함'을 강요하는 그런 강렬한 아픔은 아니지만, 각 캐릭터들이 설득력 있는 사정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각자가 고민을 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성장'을, 얼버부리지 않고 철저하고 뚜렷하게 그립니다.
서로의 고민을 알아가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나타나는 '교류'가 있습니다.
작품 전체에 깔려서, 결말까지 확고하게 이어지는 '테마'가 있습니다.
독자에게 아양떨지 않고, 감정을 이입함으로 인해 저절로 생겨나는 캐릭터에 대한 애정의 발현. 그것이 '모에'. '최지인'이 아닌 '크로이츠' 시절에 주장하던 그 이론이 그야말로 녹아있지 않습니까.
이 소설에 '실망했다'는 그 사람들은 도대체 뭘 기대했던 걸까요. '라이트노벨을 즐겁게 쓰는 방법'?
아니 이렇게 재밌는 '엔터테인먼트'의 견본을 줬지 않습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던 이론의 채현품을 직접 만들었지 않습니까.
자극적이지 않은 성장 판타지라면 최근 '하트커낵트'를 읽었습니다만, 이것저것 '이런것도 좋구나'라고 생각하며 넘겼던 하트커낵트 보다 이 '원고지 위의 마왕'이 마음에 듭니다.
이정도면 일본의 어지간한 상업 라이트노벨보다 확실히 재미있습니다.
6. 별 상관없는 이야기
작 중에 한국 장르소설계를 풍자하는 파트가 있습니다만, 상당히 재미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이 책 전체에 그런 풍자적, 패러디적 요소가 곳곳에 퍼져 있지요. 용사 '아사트레인'이라던가(...).
에리스가 쓴 소설 들 중에서는 '랑그라시아나의 밤'을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세계를 구한 영웅들이 사랑과 질투때문에 파멸하게는 이야기라니. 구원도 뭣도 없이 오해와 질투와 감정이 휘몰아치는 비극이라니. 우와, 매력이 넘쳐도 철철 흐르잖습니까.
특히 칼뱅의 "이건 마녀들의 밤이다. 아침이 되어 빛의 아들이 깨어나기 전에, 끝내야만 한다."라는 대사가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7. 마치며
다소 흥분한 어조가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할 것 같은 표현도 있었던 것 같네요.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밌었다'라는 수준을 뛰어넘어, 확실히 재미있다고 단언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이걸 지금에서야 읽다니 하는 아쉬움마저 있어요.
일본에서 두고두고 화자되고 끊임없이 인기를 끄는 '명작'들에 비하면 확실히 그 무게가 가벼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부터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고 '라이트노벨'적이면서, '이야기적으로 우수한' 소설을 쓸 수 있다면, 꽤 오래동안 가지고 있던 '한국 라이트노벨'에 대한 편견을 마음놓고 깨도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걸로 연휴기간 읽은 책들에 대한 감상은 끝입니다. 애초부터 이 감상글을 가장 마지막에 쓸 것을 감안했기 때문에, 상당히 공을 들여 썼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장문 감상은 오랜만이라 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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