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이상혁
작품명 : 눈의 나라 얼음의 꽃
출판사 : 청어람
(편의상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 Georg Lukács, <소설의 이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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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루카치의 말을 인용한 이유는, 근래의 장르문학을 접하는 심정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문장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 한때 우리들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서점이나 대여점을 기웃거리며 내키는 대로 책을 집어도 오감을 만족시켜 줄만큼 아름다운 작품들이 많았던 시대. 물론 최근에도 페이지가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일일이 세어볼 정도로 끈질긴 재미를 주는 멋진 작품들이 있긴 하지만, 예전에 비해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눈의 나라 얼음의 꽃>은 그 별빛 들 중 하나이다. 선명하게 빛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은은한 광채는 그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을 호출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제목부터가 대단히 동화적인 이 소설의 이야기는, 실상 도열(열을 훔치는)의 죄로 인해 가족을 잃은 오실룬의 귀향으로 시작되고 있다. 프롤로그를 통해 소년 오실룬과 소녀 오셀루나의 애틋한 모습이 그려지고 있지만 현실의 차가운 논리는 이들의 관계를 단절시켜 버린다. 대단히 이질적이고, 어찌 보면 모순적이다.
모순적이라는 말에는 조금 설명이 덧붙여져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이 작품의 핵심 소재인 ‘왕실의 은혜’를 상기해보자. 이 물건은 르에페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일종의 중앙 난방 시스템인데, 끓인 물을 각 지역으로 공급하여 난방이 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사람들은 현명한 왕의 은혜를 칭송하였으나 실제로 혜택을 받게 되는 계층은 정해져 있었다. 뜨거웠던 물이 왕실과 귀족의 거처를 지나면서 점차 열기를 잃어가기 때문이다. 왕은 모든 신민들이 따뜻한 겨울을 지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세상일이 늘 그렇듯 ‘왕실의 은혜’는 부유한 계층이 머무는 곳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뿐이다. 식은 물이 흐르는 파이프를 보는 빈민층은 ‘왕실의 은혜’에 더 이상 경외심을 품지 않는다. 안락과 고통을 동시에 생산해내는 모순의 결정체가 바로 ‘왕실의 은혜’인 것이다.
주인공인 오실룬과 오셀루나의 관계 또한 모순적이다. 이 둘은 나이는 어리지만 친구이자 잠재적 연인이었다. 백작 가문의 영애였던 오셀루나는 귀족과 평민이라는 신분의 격차를 넘어 성인이 되면 그와 정식으로 교제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는 와중에 오실룬의 가족이 모두 몰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중요한 지점은, 오실룬의 아버지의 불법행위를 적발한 것이 바로 오셀루나의 아버지였다는 사실이다.
오실룬의 아버지는 단순히 생존을 위해 투쟁했을 뿐이다. 그의 범법행위에는 일체의 악의도 존재하지 않았다. 빈민들에게 있어 생존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화두였다. 특히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겨울이 혹독한 르에페의 빈민들은 겨울의 추위가 그 무엇보다도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귀족인 오셀루나의 아버지는 이러한 빈민들의 사정을 알 턱이 없었다. 그들은 법대로 오실룬의 가족을 모두 사형에 처했다. 이러한 이유로 10년 만에 귀향한 오실룬이 목격한 ‘왕실의 은혜’엔 애증으로 가득하다. 오셀루나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과 처참한 과거가 동시에 떠오르며, 서로 모순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때문에 여러 귀족들을 만날 때 ‘잘 만들어진’ 상업적인 미소를 짓는가 한편, 눈사태에 휘말린 오셀루나를 구출해낼 때는 10년 전 무렵의 동심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이와 같은 모순관계는 작품의 후반부에서 오실룬을 큰 위기에 빠트리기도 한다. 즉 작품 내의 모순관계가 단순히 인물의 성격을 규정하고 관계구도를 그리는 차원을 넘어 작품의 전반적인 서사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렇게 꼼꼼하게 파헤쳐야 할 이유가 있을까?’라는 회의감을 표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소설을 보며 구성이 탄탄하다, 혹은 가치관이 명확하다고 간단히 평가하곤 한다. 잘못된 평가는 아니다. 어쩌면 그게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을 같은 범주 내에서도 세밀하게 감상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심미적 만족 또한 그곳에서 다양하게 충족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문학 비평의 존재 이유도 이와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 글을 통해 현재 장르문학과 장르비평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이들의 시대적 흐름을 점검하는 과정은 지금 쓰고 있는 비평처럼 즉흥적으로 나오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이 글에 나타난 여러 논점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자그마한 욕심이 있다면, 이미 노스럽 프라이가 언급한 바 있지만, 비평이라는 행위가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착실히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일 것이다. 단순히 소설이 저지른 부정한 행동에 대해 지적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적으로 대표되는 ‘부정적인 비평’이 가능하다면 그 역인 ‘긍정적인 비평’도 이 공간에서 충분히 가능할 것이고, 조금의 아량을 베푼다면 우리들은 그 두 가지 측면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믿고 있을 따름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눈의 나라 얼음의 꽃>의 세계는 모순적인 대상들이 서사의 중심축을 구성하고 있다. 미리 밝혀 두었어야 했지만 여기에서 사용된 모순이라는 용어는 가치판단적인 의도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중립적인 의미를 내재하고 있으며 이 작품을 해석하기 위한 자의적인 도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오실룬과 오셀루나의 관계에 나타난 모순적 양상들이 어떤 근본적인 의미를 담아내고 있는지 되짚어볼 필요를 느낀다. 작품을 보면, 이 두 남녀가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났고, 머리카락의 색 또한 은색으로 동일하다는 서술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의 이름은 각각 ‘얼음의 요정’과 ‘눈의 요정’을 뜻한다. 눈과 얼음의 근원이 물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실룬과 오셀루나는 통합된 개체에서 분화한 개별 존재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신화적인 비유가 허락된다면 다음과 같은 설명도 가능하다. 한 정신체에서 오실룬과 오셀루나라는 인간이 태어났고, 태어난 순간부터 육체적으로 분리된 그들은 갈등과 모순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다. 태초의 안정화된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그들은 끊임없이 대립하며 갈등한다. 결국에는 갈등이 해소되고 끝없는 평화를 맞이하게 된다. 사실 이는 신화적 서사의 기본 구조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갈등구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느 인물을 중심에 두느냐에 따라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오실룬과 오셀루나의 경우는 갈등을 통해 하나의 통합체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도열의 죄로 가족이 처형당한 순간부터 오실룬과 오셀루나는 화해될 수 없는 갈등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순수했던 시절 그들에겐 자신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다. 오셀루나의 병을 고치기 위해 불사조인 알-사다드가 지키고 있는 붉은 꽃을 손에 넣겠다는 것. 그러나 ‘왕실의 은혜’라는 얄궂은 운명은 이러한 유대관계를 단절시킨다.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오실룬의 목적은 위선으로 가득 찬 르에페 왕국을 전복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공작이 진행될수록 오실룬과 오셀루나의 갈등은 점차 회복되는 기미를 보인다. 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이 바로 파이통이다. 그는 오실룬으로부터 연구지원금을 받아 오셀루나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약물을 개발하고 있다. 여기에서 파악되는 것은 파이통이 두 남녀의 매개적 인물이고, 오실룬은 화해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눈사태가 오셀루나를 덮쳤을 때 오실룬이 그리 필사적으로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헐적으로 반복되는 이와 같은 두 남녀의 로맨스는 10년 전의 따스함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호출하여 서로에게 혼란을 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작품의 클라이막스에서도 마찬가지다. 붉은 꽃을 손에 넣기 위해 대결을 펼치는 부분에서는 1인칭 시점으로 전환되어 각자의 소원과 그 소원이 무엇인지 의문을 던진다. 그렇게 모든 갈등은 해소되고, 에필로그가 시작된다.
요컨대 <눈의 나라 얼음의 꽃>의 모순은 작품의 서사를 이끄는 핵심이다. 소설은 갈등의 문학이다. 특히 치열한 전투나 투쟁이 빈번하게 드러나는 판타지 소설에서는 인물 혹은 운명과의 갈등이 그려진 장면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러나 <눈의 나라 얼음의 꽃>은 조금 특별하다. 갈등의 힘이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영역, 다시 말해 인물과 소재의 차원에서 모순관계를 발생시키고,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갈등이 유발되고 있다. 만약 이 소설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위에서 지적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물론 관점에 따라서는 검과 마법이 난무하지 않아 재미없는 소설이라는 평가가 충분히 가능한 작품이다. 혹은 지나치게 낯선 세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낯선 세계로 떠나는 것이 진정한 모험의 시작은 아닐까. 이는 <눈의 나라 얼음의 꽃>의 특이한 배경으로부터 떠오른 의문이었다. 자연과학이 발흥한 시대. 불사조인 알-사다드의 존재는 허황된 전설일 뿐이었다. 그러나 불사조는 실존했다. 적어도 목숨을 담보로 그곳에 도착한 일곱 명의 사람들은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 속의 모순을 직접 경험한 것이다. 전설을 찾아 떠나는 과정, 낯선 세계로 향하는 그들의 모습을 그리며 작가는 이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슬그머니 던져준 것은 아닐까.
알-사다드가 자신의 깃털을 오실룬과 오셀루나에게 던지고 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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