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김강현
작품명 : 마신
출판사 : 드림북스
개인적으로 장르문학을 읽고 구성이나 문체의 오류 등등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 그 속애 내재된 의미를 읽고 감상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라 생각한다.
릴케가 말했듯 글이라는 것은 '출산'이요, 작가의 의지대로 통제되는 것이 아닌데 장르문학은 작가가 그 의지를 통제하여 대여점과 시장을 비롯한 상업성에 지대한 신경을 써야 하기 떄문이다. 촉박한 시간에 쫓기며 내면의 인물을 그대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라는 체에 한 번 걸러 개성을 거세한 뒤에야 표현하는 것이 가능한데 어찌 그런 마스코트에 가까운 인물에 지엄한 문학의 잣대를 들이대겠는가. 그러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식의 혹평밖에 건질 수 없으며 작가에 대한 몰이해와 만행이 된다.
그러나 <마신>, 이 책은 예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주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인물 <단형우> 자체에 대한 작가의 개입이 전무하다시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히 자신하건대 김강현이라는 작가가 가진 단형우에 대한 이해의 깊이는 독자와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주인공 단형우라는 인물은 작가가 상업의 신과 저속한 인식에 기반하여 만들어낸 싸구려 마스코트가 아닌, 작가가 의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심중의 문을 열고 불쑥 튀어나온 도깨비 같은 인물이다. 의지가 표출되는 곳에 날카로운 칼날을 드리우며 개성과 딱딱함을 걸러내는 체를 깨부수고 나타난 인물이니 어찌 제약 따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는 무심한 듯하면서도 초월적인 인물이다. 오랫동안 작가의 흉중에 들어앉아 긴 기다림을 감내하다 결국 크게 자라 작가의 심중에서 불현듯 뛰쳐나온 인물이다. 작중에서 700년간 지옥 속에서 버티다 세속으로 뛰쳐나온 것처럼 말이다... 하여 먼저 단형우라는 인물에게 경의를 표하며 감상을 시작한다.
<마신>은 천기자가 혈마자라는 악인을 제압하기 위해 주인공 단형우를 비롯한 기재들을 모아 동혈 속에 모아넣는 국면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천기자의 안배는 괴상한 우연으로 인하여 어그러지게 되고 단형우는 별안간 마계에 떨어져 오랜 시간을 고심참담하며 살아남아 결국 마계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700년이라는 긴 세월을 고통과 회한 속에서 살아온 그가 밝은 세상을 만났으니 이제 열락의 시대의 도래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한다.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라면 좌절하고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도 이상하지 않을 곳에서 단형우와 100명의 친구들은 살아왔다. 어찌 보면 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건만 서로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진 이들의 희생을 헛되이 할 수 없었기에 긴 고통 속에서도 살아왔던 것이다. 켜켜이 쌓인 그들의 희생 위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단형우라는 인물은 결국 그의 피와 악마들의 피로 점철되어 인간이 원래 느껴야 할 오욕칠정을 대부분 잃어버린다. 그런 그를 인세로 끌어들여 감정과 함께 세상의 평안함을 느끼게 해 주는 여인들이 바로 조설연, 우문혜, 제갈린이다. 조설연은 그를 처음으로 사람들의 사회 속으로 끌어들였고 우문혜는 그에게 감정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었으며 제갈린은 배려의 의미를 알려준다. 단형우의 마음 속에는 100명의 친구들 외에도 다른 이들에 대한 애정이 싹트며 그 애정을 지키기 위하여 간단히 혈마자를 들부수고 평안한 삶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누워 '흐르는 물과 뜬 구름'을 바라보며 잠을 청할 수 있게 된다. 허무함을 뛰어넘어 평안함을 찾았다고나 할까? 공허함과 삭막한 생존의 투쟁장에서 삶에 대한 욕구가 없기에 들불처럼 일어난 허무감과, 서로를 진정으로 위하는 사람들 속에서 즐기는, 생존에 대한 뚜렷한 위기의식이 없기에 느껴지는 허무함... 같은 허무라고 할 수 있으나 극과 극에 위치한 허무다.
이런 허무함과 평안함이 결말이므로 다른 고강한 무공을 지닌 이들이 광세무적의 무공으로 세상을 평정하고 호사를 누리는 것에 비하면 조촐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다. 그러나 또한 단형우가 가장 절실히 바랬던 결말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라는 존재와 감성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는 외계인이 인간의 행동과 감정을 보고 배우는 <ET> 와도 같다. 순수한 아이들이 서로 건넨 희생과 고난은 독자를 울린다. 순수함과 무지로 일관하는 단형우는 독자를 웃긴다. 그러나 그 단순한 행동 속에는 단형우의 메마른 단전에서 (신체의 밭이라는 뜻이니 이렇게 사용해도 되지 않을까?) 싹을 트는 사회에 대한 인식과 의식이 있다.
이것은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의지와 죽은 지식 외에 아무것도 갖추지 못한 주인공이 인세를 배워가며 삶의 보람과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구성에서는 일종의 성장소설과도 같다. 육체적인 성장으로 분류되는 무공의 성장 소설이 아닌 정신의 성장 소설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 성장의 결과로 단형우는 고금을 통털어 가장 만족스런 결말을 이룬다. 반지의 제왕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이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던가.
<이 이야기를 통해 독자에게 전해지는 바는...>이라는 말로 글을 맺으려 했으나 지웠다. 이런 이야기에 대한 감상으로 그런 야박한 문장을 쓰는 것은 도리가 아닐 성 싶다. 점점 더 짙푸르게 변해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이만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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