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백일
작품명 : 마도종사
출판사 :
십수 년도 더 전에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가 있었다. 제목도 그러하거니와 포스터도 꽤나 코믹하여 일견 아름답고 유쾌한 인생을 그려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막상 보고나니 이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없었다. 배경이 아우슈비츠인데다, 수백의 인명이 가축마냥 하루 아침에 도축되는 장면은 정말이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이처럼 비참한 현실을 감독 로베르토 베니니는 아름답다 말하고, 비극을 희극으로 포장하였으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 영화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관객과 평단의 압도적인 찬사를 받았으며 지금도 회자되는 역사에 남는 영화가 되었다. 아마도 기존 영화가 비극을 비극으로, 희극을 희극으로 보여주는 주력한 데 반해, 이를 정반대로 비튼 것이 주효한 듯 하다.
그저 내 개인적인 판단일지 모르나, 인생은 아름다워가 그 소재만큼이나 눈물 좔좔 쏟는 비극으로 포장되었다면 이런 성공은 거둘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인생의 희망을 얘기하고 절망을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비정보다는 애정을 디스토피아 보다는 유토피아를, 음울보다는 환희를, 슬픔보다는 기쁨을 말하며 또 즐겨 듣고자 한다.
하지만 현실은 절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즐거운 인생, 이는 결국 선언에 불과하며, 10대는 대학이, 20대는 취업이, 30대는 결혼과 육아가, 40대는 명퇴, 50대는 자녀의 결혼이, 60대는 늙어버린 육체가, 70대는 죽음이 즐거운 인생의 발목을 부여잡는다.
영화에서 죠슈아가 절대 천점을 모아 탱크를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장삼이사들에게서 10억은 로또를 믿고 갈 수밖에 없는 좀체 도달 불가능한 영역일 것이며, 죠슈아가 행여 살아남아 아버지의 그 코믹한 마지막 발걸음의 정체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 흘릴 피눈물만큼이나, 우리 역시 삶의 무게를 깨닫게 될 나이가 되면 젊은 날 영위했던 그 아름다움 이면에 비극을 발견하곤 눈물을 쏟게 될 지도 모른다.
무협은 어떠한가?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봄볕처럼 따스한 희망이 풍겨오는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선남선녀가 나와 악인을 물리치고 의협과 정의를 세우니 이 또한 아름답다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단언컨대, 무협은 절대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다. 수십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칼에 베이고 검에 찔리고 발 다리에 두들겨 맞아 사지가 절단되거나 신체가 부서지거나 피를 쏟거나 아니면 약을 먹고 죽거나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가니 이를 어찌 아름답다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의 존엄성 운운할 것도 없이 죽음이 이다지도 손쉬운터라 그 자체로 무섭고 비정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 무협의 본질이 그렇다 해서 내내 죽을상만 지을 수는 없는 일, 굳이 로베르토 베니니의 역설을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비극을 희극으로 포장할 권리가 있다. 더구나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고, 더러운 진창에서 아름다운 빛을 뽑아내는 것이 우리의 삶을 추동하는 동력임을 감안하면, 녹록찮은 삶을 환희로 갈음하고 현실에서는 절대 실현될 수 없을 것 같은 의협과 정의를 세우는 것 또한 유의미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함에 무협은 꿈꾸는 로망이든, 욕망의 표출이든, 현실의 역거울이든 그 어떤 의도이건 간에 아름답고 멋지게 포장되어야 한다. 한 여름 툇마루에 앉아 계곡물 소리 들으며 호쾌함에 빠져들거나, 깊은 밤 부모 몰래 가슴벅찬 환상에 젖어들거나, 팍팍한 삶에 피식피식 웃을 수 있는 대리만족이라도 느낄 수 있어야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쳐 그저 가볍고, 웃기고, 술자리 불알친구끼리 주고받을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일관하는, 혹은 주간지 가쉽성 기사같이 소소한 이야기꺼리만을 쏟아내는 것으로 편향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그 본질이 어떠하든 간에 모든 사물이 양면성이 있음을 인지하고 그 어떠한 종류의 편식이든 바람직하지 않음을 안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는 사실 독자에게 있어서나 작가에게 있어서나 독이 될 수밖에 없다.
백일의 마도종사는 현 무협의 경향과는 조금 다르게 무협을 직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그 무게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책의 전체적 분위기는 금강현철처럼 묵직하고 비장하며 모든 죽음들은 무겁기 이를 데 없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저마다 힘겨운 빚을 짊어지고 있어 각기 울분 혹은 분노, 죄책감, 욕망을 담은 눈으로 강호를 바라본다. 그들이 가슴 속에 숨겨둔 사연을 풀어낸다면 하루 밤낮도 모자란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가족을 버린 아버지나 그런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 그 아버지의 빚을 짊어진 아들, 조직을 배반한 원죄의식에 시달리는 살수, 만인의 기대에 힘겨워하는 대모, 그 누구하나 가볍고 허투루 볼 인물이 없다.
이 책의 저류에 흐르는 큰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정당치 못한 자가 대권을 잡고 정치적 반대파를 사마로 몰아 숙청하고, 무협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랄 수 있는 정면대결이 아닌 사기와 중상모략, 협잡으로 승리를 거머쥔다.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적 친분은 멀며 상대가 누구든 명령에 의해 물고 뜯고 싸우고 죽인다. 조직의 이익이라는 거대한 대의 속에서 선과 악, 정의과 불의의 구분은 한겨울 파자마만큼이나 쓰잘데기 없는 짓이다. 그야말로 가슴이 서늘하리만큼 현실을 생생히 그대로 담아냈다.
혹 거부감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무협은 본디 무겁고 비장한 것이며, 의협은 비협의 타도로 태생할 수밖에 없고, 사마는 현정으로, 부정은 의기로, 그렇게 칼과 주먹으로 무섭게 몰아부쳐 협을 세우는 것이 무협이 아니었던가.
마도종사에서 왜 마도(摩 道)가 마도(魔道)가 될 수밖에 없는지, 주인공의 험로를 따라가다 보면 그의 서슬퍼런 분노와 서글픈 절규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즐겁게 웃고 넘기는 책과는 또 다른 응어리진 가슴을 시원하게 풀어 헤치는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마도종사가 원체 묵직하다 해서 재미없을 것이라 짐작하는 것은 편견이다.
사실상 무협의 존재가치가 재미라 본다면, 마도종사는 그 어떤 책보다 이에 충실하다. 전투는 박진감 넘치기 이를 데 없고, 문장은 쾌속무비하며, 구성은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특히 오늘날의 저격총을 연상케 하는 십리장궁의 암살 과정은 꽤나 신선하며 그 장면 하나하나의 몰입도와 긴장감이 이루 말 할 수 없다.
다만 아쉬운 점을 꼽자면, 이야기의 강약과 완급조절이 다소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한 주인공의 감정을 처리하는 데 있어 너무 대범하고 담백하여 독자의 감정이입을 막는 작용을 하지 않았나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주인공이 패도적인 인물임을 감안하면 어느정도 흘겨 넘길 수 있으리라 본다.
실로 오래간만에 무릎을 치게 하는 멋진 무협 소설이 나왔음을 반기며, 사실상 마도종사의 전체 기조를 엿볼 수 있는 한 문장을 소개하는 것으로 감상이자 추천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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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을 본 적이 있는가. 외로움의 여정 끝에서 울분을 터뜨리는 유성의 빛살을 본 적이 있는가. 유성의 빛은 고독검사의 검. 유성의 빛이 울분을 터뜨리면 삼라만상의 운행이 정지되고 말리라.”
주인공 능비가 백마총에서 배운 검법. 그 오의가 고독과 울분이라니, 참으로 의미심장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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