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칭 생략합니다.)
얼마전 감비란에 궁귀검신에 대한 논란도 있었고, 궁귀검신2도 시작되고 해서, 궁귀검신을 다시 읽어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냥 대충 훑어보았다. 도저히 정독이 되지 않았다. 처음 웹상에서 연재되는 것을 읽을 때도, 읽는 내내 불편한 심정으로 정독하지 못했던 작품을, 재독을 하면서 정독하려고 했던 것 자체가 지나친 욕심이었던 같다. ^^;;;
빠른 스토리 진행과 그리고, 오해받는 주인공과 통쾌한 복수극에 재미와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작품이지만, 나에게는 불편한 감정(속된말로 짜증) 외에는 별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예외가 있다면 당가에서 주인공이 오해로 핍박받는 장면에서는 '분노'의 감정을 공감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 외에 당소희에게 복수하는 장면이나, 정파와 패천궁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날뛰는 장면에서는 통쾌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왜 통쾌감을 느끼지 못하고, 읽는 내내 불편한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다.
1. 작품 서술방식의 특징과 단점
전체적으로 궁귀검신을 살펴보면, 주로 대화와 설명을 통해서 이야기가 진행이 되고 있다. 묘사는 싸우는 장면에 한해서 자세히 나온다. 이러한 작품서술방식은 스토리의 빠른 진행을 가능하게 한다. 배경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생략한 채, 만나고, 대화하고, 부족한 부분은 설명해버리니 스토리 진행이 빠르지 않을려고 해도 빠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묘사가 전혀없는 것은 아니다. 싸우는 장면에 한해서는 자세히 묘사한다.
빠른 스토리 진행과 자세한 싸움장면 묘사, 박진감이 넘친다는 느낌이 절로 든다.
그러나 싸움장면을 제외한 일반적인 장면에 대한 묘사는 배경묘사나 등장인물 심리묘사의 부족을 가져온다. 등장인물이 어떤 상황에 처해서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치밀한 묘사가 없다. 그러니 등장인물은 몰개성적으로 비춰진다. 대화나 설명에 개성이 부여하고자 하여도, 일상적인 장면에서의 자세한 묘사가 부족하니 개성이 드러날 수가 없다.
특히 심리묘사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는다. 암왕이 손녀를 죽이는 장면에서 암왕의 고뇌에 대한 묘사 많지 않다. 을지소문과 싸우면 정파가 힘들어진다는 상황논리 몇 마디 늘어놓는게 다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을지소문의 반응이다. 할아버지가 친손녀를 죽이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게 해놓고, 나오는 대사는 '어르신' 몇 번 부르고 끝이다. 을지소문이 그 장면을 보고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 이후에는 소림사의 노승과 구양풍, 그리고 자신의 의형제를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면서 웃는 장면이 나온다. 할아버지가 손녀를 죽이게 해놓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어떤 반성 혹은 반응도 없이 그냥 이야기가 진행된다.
대개가 이런 식이다. 오해를 받거나, 복수에 대한 부분에는 꽤 자세한 심리묘사가 나오면서도 그 이외의 감정에 대해서는 묘사가 거의 없다. 빠른 이야기 진행을 위해, 일상적인 배경과 심리묘사를 포기함으로써 등장인물의 개성 혹은 인간적인 면모를 느낄 수가 없게된 것이다.
감정이입의 여지가 없다. 결국 남는 것은 박진감 넘치는 싸움묘사뿐이다.
2. 이해할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행동들.
등장인물들의 행동들도 정말 공감하기 힘든 면이 많다. 몇 가지 상황논리를 내세워서 그것을 합리화하고 있다. 하지만 논리자체도 빈약한데다, 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심리묘사도 없으므로 공허하게 밖에 들리지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원로원의 고수들을 살펴보자. 이들은 관패를 좋아하지 않고, 세력싸움에는 관심이 없어서 정파와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한다. 논리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패천궁의 인물들이 싸움에서 수없이 죽어나가는데, 그것에 대해 크게 염두에 두지 않는다. 싸움에 나서서도 을지소문이 등장하면, 을지소문에게만 관심을 보이고 싸우다, 패하거나 죽는다.
그러나 을지소문과의 비무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당장은 공적인 일에 나섰으면, 그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 정석이다. 더구나 자신들이 패하면 자신들의 후배들이 죽어나갈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비무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궁귀검신에 등장하는 고수급은 다 이렇다. 밑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죽어나가고 있는데, 크게 가슴 아파하지 않는다. 언제나 상황논리로 이것을 이해한다. 머리만 있고, 가슴은 없는 인간들이다.
패천수호대도 마찬가지이다. 도전을 받았다는 소문에 성주를 떠나서 을지소문을 찾아나선다. 한창 세력 싸움중이고 어떤 음모에 말려들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리를 비운다. 패천궁의 자존심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궁귀검신에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다. 정파와의 싸움이 끝나고 얼마든지 대결할 수도 있는 문제인 것을 나서서 평지풍파 일으킨다. 그로인해 결국 관패는 죽는다.
그리고 환야는 을지소문과 싸우며 죽어가는 패천수호대를 지켜본다. 그리고 을지소문의 이러저런 상황논리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고 넘어간다. 100여명이 죽었는데.... 아는 사람도 꽤 있을텐데....
역시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을지소문이다. 자신은 오해로 철면피 죽였다고, 처절하게 복수하면서, 먼저 공격했다고 하지만 패천수호대 다 죽여버린다. 그것도 정파와 패천궁의 대결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해놓은 상태에서 말이다. 물론 자신의 의형제와 친우를 위해서라는 구실도 있다. 하지만 결과는 정파를 위해 행동한 것이다. 여기에 대한 고민도 없다. 그저 그러한 상황을 조성시킨 제갈영영에 대한 원망과 복수로 해결한다.
아무리 자신의 친인들을 구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방법이나 그 결과로 인한 파장이 어떠한 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자신의 의형이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데, 패천궁의 핵심세력인 패천수호대를 과감하게 없애버린다. ㅡ.ㅡ;;;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한 고민은 을지소문의 사고를 넘어서는 영역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박진감 넘치는 싸움장면 그 자체인 것이다.
다시 원로원의 문제로 돌아가보자. 패천수호대가 없어지고도, 원로원의 등장으로 전세는 뒤집어지지 않고, 패천성이 우위를 지킨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원로원이 등장하여 개입하였으면, 큰 싸움이나 희생없이 간단하게 승부가 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쪽이 압도적인 힘이 있을 경우에는 도리어 피해가 없이 승부가 나는 법이으로.....
결국 원로원 고수들의 신선놀음 혹은 고고한 척 때문에 수많은 인물들이 죽어나갔다는 것이다. 구양풍은 한술 더 뜬다. 자신이 세운 세력과 정파가 싸우게된 상황속에서,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은 찾지 않고, 언젠가는 일어날 일 이라며 그냥 손놓아 버린다.
등장인물 모두에게서 '최소한의 희생'이라는 의식보다는,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는 상황논리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논리의 결과는 언제나 멋있는 싸움이다.
3. '최소한의 희생'이라는 전제 없이 멋있는 활극만이 중요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결과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것을 감안되면 당연히 스토리 진행 아니 이야기 자체가 안될 수도 있다. 그래도 정도가 지나치다.
궁귀검신의 모든 이야기는 '가능하면 최소한의 희생'이라는 전제없이, 통쾌한 복수극과 박진감 넘치는 싸움장면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복수극과 박진감 넘치는 싸움장면을 위해 나머지 요소들이 모두 희생되고 있다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등장인물의 이해할 수 없는 혹은 개연성 없는 행동들을 통해서라도 극적인 장면과 통쾌한 복수극을 연출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협에서 '최소한의 희생'이라는 의식이 없는 등장인물과 스토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극적인 재미와 박진감을 위해 '최소한의 희생'이라는 전제를 희생시킨 작품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좀더 깊이, 이제는 한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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