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모래시계'의 작가 송지나가 극본을 쓴 '태왕사신기'가 만화 '바람의 나라'의 표절이니 아니니 하고 조금 시끄럽다. 문제의 만화를 보지 않았으니 송지나의 극본이 과연 만화의 표절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아마 만화를 보고 나서도 판정을 내리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다만, 표절이라는 그 민감한 주제를 둘러싸고 주루루 떠오르는 몇 가지 생각들을 두서 없이 늘어놓아 본다면.... 1. 아마 국민학교 2학년 아니면 3학년 때였을 것이다. 단짝이던 영식이네 집으로 놀러가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내 속에서 갑자기 노래 하나가 솟아올랐다. 빨간불 노란불 파란불, 빨간불 노란불 파란불, 깜박깜박 뻐끔, 깜박깜박 뻐끔.... 내가 만들어 놓고도 그다지 마음에 드는 노래는 아니었다. 아무튼 신호등을 표현한 그 노래의 멜로디를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가 작곡한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무려 20년이나 시간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그 멜로디가 실제로는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똑딱....' 하는 노래의 변형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2. 헬렌 켈러는 여학생 시절에 환상적인 동화를 한 편 썼다. 그 동화를 읽은 헬렌 켈러의 학교 친구들은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 시절에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던 '요정의 여왕'이라는 다른 동화를 헬렌 켈러의 동화가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모방 내지는 표절을 할 의도가 전혀 없었던 헬렌 켈러는 매우 억울해 했다. 그러나 얼마 뒤에 그녀는 자신이 어렸을 때 누군가가 '요정의 여왕'이란 동화를 그녀에게 들려 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3. 나는 한때 만화 스토리를 써서 만화가에게 파는 일에 손을 댄 적이 있다. 한번은 '천년의 사랑'이란 제목의 스토리를 써서 만화가에게 넘겼다. 전생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던 여인의 영혼이 명계를 탈출하여 현대의 서울에 사는 남자 주인공을 찾아온다는 내용이었다. 그 만화가는 내가 쓴 스토리를 사 놓고도 다른 제작 일정이 밀려 있었는지 묵혀 두고만 있다가 몇 년 뒤에야 만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내가 썼던 스토리와 거의 완전히 일치하는 내용의 영화가 나와 큰 히트를 치고 난 다음이었다. '은행나무 침대'가 그 영화 제목이었다. (게다가, 어떤 유명 소설가가 내 스토리의 제목 '천년의 사랑'과 똑같은 제목의 소설을 발표하였기 때문에 내 만화는 화실에서 급조한 '바람의 노래 달 그림자'라는 이상야릇한 제목을 달고 있었다.) 4. MBC의 대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히트를 쳤을 때, 많은 사랑을 받던 그 드라마 주제곡이 사실은 영화 '드레스드 투 킬'의 주제곡의 표절이라는 지적이 경쟁 방송국의 어느 프로그램을 통해 들어왔다. 문제의 곡들을 비교해 들어 본 사람들은 실제로 그 두 곡이 거의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똑같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5. 예화는 이 정도로 그치고ㅡ '은행나무 침대'가 내가 만들었던 스토리의 표절이라고는 생각치 않는다. 무엇보다, 내 스토리가 만화가의 손을 떠나 영화 제작자에게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까. 두 스토리가 같았던 것은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대개 비슷한 패턴으로 이루어져 있는 때문이지 싶다. 누구나 그 정도의 스토리는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남자와 여자 유령, 이 둘만 설정하고 나면 나머지는 줄줄 따라서 튀어나오게 돼 있다. 그 남자를 사랑하는 또다른 현대의 여자, 그리고 여자 유령을 사랑하는 명계의 또다른 남자, 명계로부터의 추적....등등. 6. '여명의 눈동자'와 '드레스드 투 킬'의 두 주제곡을 비교해 들어 보면 두 멜로디가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닮아 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여명'의 작곡가가 '드레스드'를 표절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의도적으로 표절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한 두 작품 간의 유사성을 감추려고 들지 그토록 선명하게 드러난 상태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여명'의 작곡가는 분명 그 영화 '드레스드 투 킬'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고는 그 사실을 잊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영화의 아름다운 주제곡에서 받은 깊은 인상은 그의 무의식 저 어딘가에 아로새겨졌을 것이다. '여명'의 주제곡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무의식의 도움에 기대던 그 작곡가는 갑자기 튀어나온 그 멜로디가 정말 자기 것인 줄 착각하였을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는 다른 이가 만든 멜로디임을 전혀 깨닫지 못하였을 것이다. 7. 예화는 그만 들겠다고 앞에서 말했지만, 표절이란 주제를 다룰 때 빠뜨릴 수 없는 얘기가 생각났다. 20여 년 전에 '사랑과 진실'이란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서 커다란 사랑을 받은 적이 있다. 딸 둘을 키우던 가난한 여인이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 그 동안 숨겨 왔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 비밀인즉, 두 딸 중 한 명은 실제로는 자기 딸이 아니라 재벌가의 혈육이라는 것이다. 어쩌다가 혼자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된 여인의 진짜 딸은 언니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기는커녕 자신이 재벌가의 혈육인 척 가장하고 언니 대신에 재벌가로 들어간다.... 김수현이 썼던 위 스토리에서 재벌가를 백작 가문으로 바꾸면 '유리의 성'이라는 일본 만화와 설정이 똑같아진다. 이것은 표절일까, 아닐까? 이건 좀 까다로운 문제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나라면 표절이 아니라고 판정을 내릴 것이다. 설정이야 얼마든지 중복될 수 있는 거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때문에, 서로 사이가 나쁜 부모들을 둔 두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새로이 쓰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다. 힙폴리투스와 페드라를 다룬 신화가 이미 있다고 해서 젊은 의붓 어머니와 양아들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써서는 안 된다는 법도 없다. 사람 사는 모습이야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들여다보더라도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는데 같은 상황 설정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창작 활동 자체가 발을 디딜 여지가 없어질 것이다. '사랑과 진실'이 '유리의 성'과 비슷한 설정에서 출발하였다고 해서 전자가 후자의 표절이란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설정 위에서 진행되는 작품의 실제적인 내용을 통해 세계와 삶에 대한 그 작가 나름의 해석이 드러나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ㅡ 여기에 표절과 표절 아닌 것을 가르는 기준이 있을 것이다. 설령 그 '나름의 해석'이라는 것이 대단히 통속적이고 평이한 수준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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