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한 책을 두 번 읽는 일은
정말 흔치 않은 일입니다.
워낙 다독과 속독을 하는지라
두 번도 아닌 세 번이라면
정말 옷깃을 여미고 읽는 책이지요..
그런 점에서
윤극사전기를 추천합니다.
첫번째 읽던 몇년 전
읽다 말고 순간순간
제 블로그에 옮기고 싶은 장면들로 가득했으나
귀찮아 넘어갔었는데
수 년이 지나고
다시 생각이 나서 읽으니
또한 옮길 것이 있어 옮기고
또 수 년이 지나
옮겨 둔 블로그를 읽으니 가슴에 맺히는 것이 있어
다시 읽으니 옮길 것이 더 나오고...
작가의 깊은 생각과 이념이 감동스럽고 배울 점이 큼을 느끼며
풍경과 이야기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아름답고 유려하니...
대단한 실력.. 이라고 간단히 말하기가 부끄러운
너무나 대단하신 작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독을 권합니다.
-----------------------
다시 만나기 이전의 안진오를 본 것은 십 년이 훨씬 넘었다.
어쩌다가 그들이 그렇게 되었는지,
자기가 이렇게 되었는지는 몰랐다.
청동봉 암여우의 여의주를 탐내던 안진오는
추억으로만 남아 있었다.
안진오에게도 윤극사는 자기가 추억으로 남았을 거라 생각했다.
백초곡 사람들의 면면마다 어려 있는 추억이
봄밤의 살구꽃만큼 아름다웠지만
가을 밤 달만큼이나 아득하게 느껴졌다.
지금 윤극사에게는 배꽃같이 하얀 얼굴을
어깨에 기댄 이영이 있을 뿐이었다.
끝까지 그들을 쫓아가겠다고 외쳤지만
윤극사는 바람이 바뀌면 북으로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찾아야 하지만
그들을 찾기 위해서 코를 벌름거리는 사냥개가 될 수는 없었다.
윤극사는 의원이었다.
수천 환자의 죽음과 제세원의 아홉 신의와
열여덟 의원, 의생들의 죽음을 어깨에 올려놓고
하루 하루를 사명(使命) 속에서 살아가는 의원이었다.
눈이 가물거리는 이영을 안아서 침대에 옮겼다.
이영이 풀어진 미소를 짓는다.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가린다.
윤극사는 이불을 움켜쥔 이영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지금의 길이 윤극사의 길이었다.
비록 그 길에 수많은 수모와 고통과 후회와
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
풍혼 노인이 물었다.
"의술은 왜 배우느냐?"
"그건....."
윤극사는 당황했다.
왜 배우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백초곡에서 자라면서 다른 사람들이 다 배우고 있었기에
자기도 당연히 배워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의술을 배우는 외에 다른 삶의 방법도 알지 못했다.
백초곡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자기도 언젠가는 훌륭한 의술로
사람들을 많이 구해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픈 사람이 자기의 치료를 받고 건강해지는 건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남이 묻는데 그렇게 말하기도 적당하지 않고
답이 되는지도 몰랐다.
"잘 모르겠어요"
풍혼 노인이 물었다.
"병을 치료하는 것이 좋으냐?"
윤극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풍혼 노인이 침상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가 조용하지만 위엄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큰 의원이 되고 싶지 않으냐?"
윤극사는 이청무 같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풍혼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청무는 고작 사람의 몸이나 치료하는 작은 의원이다.
내가 말하는 건 그와 비교도 안 되는 큰 의원을 말한다."
윤극사는 눈을 크게 떴다. 이청무보다 훨씬 큰 의원이라니?
이청무는 백초곡과 제세원을 통틀어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실력자다.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가슴이 뛰었다.
될 수만 있다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풍혼 노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몸을 치료하는 의원은, 아무리 크다 해도 작다.
그러나 세상을 치유하려는 의원은 아무리 작아도 크다."
혼란스러웠다. 세상을 치료하는 의사라니?
역병 같은 전염병을 치료하는 의사라면
좀 더 큰 의사일 것 같았다.
위험하기도 하고 그 의미도 훨씬 크다.
풍혼노인이 말했다.
"몸은 의와 약으로 치료하겠지만,
세상은 의와 협으로 치유한다."
저녁을 먹고 제구 신의 이융대가 가르치는
섭생과 양생의 술을 배우는 동안에도,
손발을 씻고 침실로 돌아와 누웠을 때도
노인의 말이 머리 속에서 울렸다.
막연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 윤극사전기, 1,2권 중에서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