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주훤
작품명 : 여왕의 하루
출판사 : 연재중(조아라 등등)
요즘 느낀건데... 점점 뛰어난 작품이 늘어나는 무협소설에 비해서, 판타지소설은 수작이라 느낄 만한 작품을 만나기가 힘드네요. 아는 분 추천으로 알게 된 이 '여왕의 하루'라는 소설은 근래 보기 드물게 재치있게 쓰여진 작품인 것 같습니다.
편의상 꺾인말을 썼으니 양해해 주셨으면 하고, 미리니름이 약간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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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마니의 기쁨
뭐랄까, 석탄 캐다 금광을 발견한 광산노동자의 기분이 이럴 것인가. 산삼밭을 발견하고 씸봐뜨아---!!!! 하고 외치는 심마니의 기분이 이럴 것인가. 너무나도 오랜만에 읽은 수작 판타지에 기쁜 마음 주체할 길이 없다.
주훤님께서 연재하고 계시는『여왕의 하루』는 차원이동 판타지 소설이다. 그러나 기존의 【현실세계 ↔ 무림】 혹은 【현실세계 ↔ 판타지】가 아닌, 【판타지 ↔ 판타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즉 이동 전 후 둘 다 이세계다.
스무살의 여왕 엘리카스는 강력한 결혼압력을 피하기 위해 호위기사인 란시스와 함께 야반도주하다가, 그만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 되는 이야기다. 딱 이까지 스토리 설명 들으면 삘이 오는 분들이 있다. 아마 많을 거다.
완전 말괄량이 민폐형 여왕에 그걸 돌봐주는 베이비시터형 호위기사, 개연성 말아먹은 뽕빨스토리 전개 등등... 절대 아니다. 그런 것과 아무 상관 없으니 사서 걱정하지 말자.
◇ 세심한 배려
여왕의 하루는 대단히 가벼운 필치로 쓰여지고 있다. 소소한 사건들은 가벼운 유머와 패러디를 담아 유쾌하고 발랄하게, 톡톡 튀듯 나아간다. 그러나 스토리의 축이 되는 사건을 전개할 때는 결코 가볍게만 진행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여타 소설보다 더욱 더 섬세하게 복선을 깔고 암시를 주면서 사전공작을 잘 펴놓은 다음에 무리없이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가출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엘리카스는 어릴적 '발광공주'라 불리면서 각종 기행을 하기는 했으나 여왕이 된 후에는 철저한 책임감으로 무장하고 스스로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결혼이 싫다고 해서 가볍게 가출을 결심하게 된다면 그것은 상당히 무리가 있는 전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는 여러 외적 요인을 배치하여 자연스레 사건을 유도한다. 엘리카스의 여동생이 남자에 눈이 멀어 대고모님을 불러들였고, 대고모는 그참에 미혼인 여왕을 결혼시키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는다. 그리하여 그녀가 매우 극단적인 수단을 취하고, 여동생 엘리아는 그 일로 죄책감을 느껴 언니에게 해결책을 제시한다.
거기에 엘리아는 여왕 대행을 하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고 극단적인 대고모의 수단에 대한 반발심도 어느정도 일조를 해서, 한동안 피해있어야겠다는 결심이 도출된다. 흔한 뽕빨물이었다면 그냥 '에잇 나 결혼 안할래' 하고 가출결심, 이걸로 끝이다. 작가가 얼마나 세심하게 진행시키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뛰어난 심리묘사
물론 가출의 배경에 외적인 요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게 있다. 그녀의 호위기사 란시스는 엘리카스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그의 마음을 엘리카스가 눈치채고 있다는 것.
여왕의 하루에서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한데,
주요인물의 심리묘사가 아주 환상적이다.
여왕으로써의 책임과 란시스에 대한 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고, 그리하여 괴롭더라도 멋지게 자기만의 결론을 내리며 행동하는 엘리카스. 어릴 때부터 보살펴온 엘리카스에 대한 연심을 품은 채 호위기사인 자기의 신분과 의무에 충실한 란시스.
두 사람의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는 마음, 닿을 듯 닿지 않는 미묘한 거리가 이 작품 최고의 묘미다. 드러내놓고 질척거리지 않고, 대놓고 자르지 않는다. 줄다리기 하듯, 곡예하듯..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즐겁게..
거기에 사이몬이라는 이계의 인물이 끼어들어 이들의 삼각관계(?)는 더욱 더 흥미진진, 두근두근, 예측할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든다.
◇ 강렬한 캐릭터들
캐릭터성이 아주 강력한 것도 정말 높이 평가하고 싶은 부분이다. 많지도 않은 분량 가운데 어찌나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캐릭터가 많은지..
물론 그 선두에는 우리의 여왕님 엘리카스가 있다. 즉위 전의 별명이 발광공주였을 만큼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그녀는 너무나 긍지높고, 책임감 강하고, 그리고 한없이 사랑스럽다.
란시스는 그런 그녀의 곁에서 옥체를 보호하느라 전전긍긍하고 사랑에 고뇌하는, 어찌보면 전형적인 캐릭터이다. 하지만 엘리카스가 워낙 빛나는 덕분에 란시스 역시 눈부시게 빛난다.
이물질(?)이라 표현해도 할말 없을 사이먼은 성질더럽고 잔인하고 강압적이지만, 동시에 매력적인 외모와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냉미남이 여주에게 조금씩 조금씩 녹아내리는 거 취향인 분들도 꽤 있는 걸로 안다.-_-; 실제로 아주 조금씩 살살 물이 되고 있다.
이들 셋은 메인캐릭터라 할 수 있지만, 이들 외에도 사이먼과 항상 티격태격하는 총령 할아버지라던가, 역시나 사이먼과 항상 투닥거리는 부관 가모프라던가, 또 역시나 사이먼과 사이 안좋은 왕자라던가.. 이런 캐릭터들도 매력 만점이다.(그런데, 사이먼 인간관계 정말 꽝이구나..)
◇ 세계관
독특한 세계관도 빼놓을 수 없겠다. 아직 연재분량이 많이 쌓이지 않아서 구체적인 부분은 드러나 있지 않지만, 현재까지 내용으로 보면 엘리카스와 란시스가 이동한 세계에서는 기계문명과 마법문명이 서로 전쟁하기 일보 직전이다. 처음에 총 든 군인이 나왔을 때는 현대 지구로 차원이동하는 소설인가 하고 순간 생각했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한쪽은 총과 비행기, 엘리베이터 등이 존재하는 과학문명의 국가이고 또 한쪽은 마법과 드래곤같은 게 존재하는 국가다. 사실 이런 이질적인 문명이 공존하는 세계관은 제대로 굴리기가 쉽지 않은데, 아직까지는 무척 부드럽게 잘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두 나라의 전쟁(아직 시작은 안했지만) 사이에서 엘리카스가 어떤 변수가 될런지 무척 기대가 된다.
◇ 반짝이는 위트
위에 열거한 많은 장점이 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읽기 시작한 후 단숨에 앉은 자리에서 다 읽게 된 근본원인은 그런 것들 때문은 아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저 밤하늘에 빛나고 있는 별들처럼 반짝이는 위트였다.
대사 한마디, 묘사 한줄마다 스며들어 있는 유머러스하고 재기넘치는 '끼'가 시종일관 나를 웃음짓게 하고, 캐릭터들에게 사랑을 느끼게 만들고, 스토리에 깊이 몰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영도님 작품을 읽을 때면 등장인물들의 재치넘치는 대사에 감탄하곤 했다. 여왕님의 하루를 읽어내려가면서 그때의 유쾌한 기분을 또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개그씬에서는 절묘하게 웃음을 유발하고, 감정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미묘한 심리를 독특하게 양념해서 깊은 맛을 낸다. 정말 감탄해버렸다.
◇ 총 평
읽는 내내 웃음을 터뜨리고, 두근두근거리고, 가슴아파하고, 한편한편 줄어드는 것을 아쉬워 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앞으로가 가장 기대되는 소설 베스트다.
http://blog.naver.com/serpent/110022669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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