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몇일간 골라 읽은 무협들이 얼마나 밋밋하고 진부하던지 마요네즈에 밥 비벼먹었을 때 느낄법한 거북함을 떨칠 수 없었다.
새로운 재미, 색다른 작품에 대한 갈증으로 목말라 하던 즈음... 이곳 고무림 감평란에서 장상수의 '삼우인기담'에 대한 눈에 띄는 평가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삼우인기담(三遇人奇談). 세 바보들의 기이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소설의 효용이 읽은 재미와 대리만족이라 할 때 삼우인기담은 이러한 원리에 너무도 충실한 의미있는 작품으로 평하고 싶다.
삼우인기담을 펼쳐 읽으며 3가지 측면에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파격적인 형식미와 인상 깊은 등장인물과 대사, 너무도 재미있는 스토리가 그것이다.
-. 이 작품의 구성은 매우 파격적이다.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한 사건을 등장인물의 시점에 따라 다르게 풀어나가는 구성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을 읽는 듯한 지적 재미를 안겨준다.
전 4권중 3권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며 1권은 주인공인 그, 2권은 그의 직속상관이자 그와 애증 관계인 인각 각주, 3권은 그의 처의 시각으로 '그 때 그 사건'을 반복적으로 풀어낸다. 또 마지막 4권은 영화 '박하사탕'과 '메멘토'처럼 시간의 흐름을 역순으로 풀어나간다.
이같은 파격적인 구성이 주는 재미가 의외로 쏠쏠한데, 등장인물의 심리묘사가 무척 뛰어나, 1권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주인공의 행동들이 권을 더해가며 수수께끼 풀리듯 풀려나가는 등 한 편의 잘 짜여진 반전영화를 보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파격은 작품이 끝나는 순간까지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단 명도 등장하지 않는 점이다. 평소 소설을 읽을 때 등장인물의 홍수 속에서 '얘가 누구였던가' 헤매곤 하는 나로서는 이름을 철저히 배제하고 그, 그의 처, 여도둑, 흑살수, 회주 등의 직위 또는 대명사로만 지칭되는 이러한 한 시도가 무척 친근하게 다가왔다.
-. 이 작품의 또다른 강점은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심리묘사다.
삼우인기담은 제목과 달리 똑똑한 사람들이 무척 많이 등장한다. 단순히 설정으로 "얘는 똑똑해"하고 우기는 여타 작품들과 달리, 왜 그 사람이 똑똑한지를 대사와 심계로 유감없이 보여준다.
사건의 발단이 된 장원 침투사건을 둘러싸고 펼쳐진 인각 각주와 그의 처, 여도둑 사이에 펼쳐지는 치밀한 두뇌싸움이 그렇고, 축융세가 살수행에서 주인공과 여도둑간의 속고 속이는 사기행각, 주인공 부부의 흑사회 탈출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의 처, 여보좌 등의 똑똑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때론 추리소설을 읽는 듯 때로는 전략소설을 읽는 듯 치밀하게 짜여진 사건의 전개와 심리묘사는 이 소설에 들인 작가의 정성을 능히 짐작케 한다.
-. 무엇보다 삼우인기담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은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다는 점이다.
삼우인기담의 줄거리는 단순하게 말하면 '무협으로 쓴 바보온달 이야기' 쯤으로 요약할 수 있다.
거지출신의 성격 개같고 지지리 못생기고, 멍청하기까지 한 하급살수가 똑똑하고 현숙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아내를 만나, 그녀의 내조로 사람구실도 하게 되고 어여쁜 자녀들도 얻게 된다는 '인생 성공담'이 이 작품의 주요 골자다.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남녀간의 사랑, 애증과 그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는 매우 사실적이고 그래서 더욱 독자들의 피부에 와 닿는다.
사실 처음 1권을 읽을 때 주인공이 살수 견습을 나가 잠들어 있는 여성을 강간하고 그 여성이 그에게 순응하는 장면이라든지, 주인공이 그 여자를 유곽에 팔아치우는 장면에서는 너무도 황당한 설정이요, 짜증나는 주인공이라 책을 덮을뻔한 적도 있었다. 그 때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결과적으로 내게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 됐지만 혹시 아직 이 작품을 읽어보지 않은 독자라면 작품 초반의 이런 이상한 부분들이 나중에 어떻게 변해가는지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보자.
-. 삼우인기담의 내용이 지나치게 남성 우월주의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분명 그러한 부분이 있다. 이 작품에서 맺어지는 부부관계가 모두 강간과 순응으로 이뤄진다는 점(그와 그의처, 그와 인각각주, 소회주와 여보좌), 소설 곳곳에서 남녀의 성관계를 '먹는다'고 거리낌없이 표현하는 부분은 본인으로서도 다소 눈에 거슬렸다.
다만, 이러한 부분은 '삼우인기담' 전체를 놓고 평가할 때 아주 작은 흠일 뿐이며 그보다 더 나은 장점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 이 작품에 대한 나의 변론이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책을 읽은 것 같다.
특히나 요즘처럼 취업난과 장기 불황으로 사람사는 것이 각박하기만 때, 삼우인기담을 통해 한동안 잊고 지내던 사나이의 낭만과 로맨스,통쾌함으로 잠시나마 세속의 고민을 잊을 수 있었으니..... 그것으로 좋은 일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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