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임준욱
작품명 : 쟁천구패 외
출판사 : 청어람
작가의 정서와는 다르지만 하고 싶었던 무협에 대한 이야기들...
이제 불혹에 접어든 임준욱님의 작품이다. 2005년 1월에 1권이 나왔는데 8권 완결된 것은 2006년 10월 말이니 얼마나 공들여서 글을 썼을까 생각이 든다.
글을 읽다보면 각 작품들의 주인공의 성품과 임준욱님의 성품이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사마진명이 그랬듯 한번 맡은 일은 누가 걱정하지 않을만큼 성실히 수행하고, 운청산이 그랬듯 임할때는 열심히 결과가 났을때는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포이종처럼 우직하고, 좌구산만큼 꼼꼼하고...(좌구산은 쟁천구패에 등장하는 조연급 배우지만 왠지 우쟁천은 임작가님과는 좀 다를것 같다는 느낌이 강해서...)
왜 이런 생각을 했냐하면 앞뒤의 내용을 맞추기 위해서 애를 쓴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이기 때문이다. 위의 등장인물중 임작가님과 가장 유사할 것 같은 사람은 좌구산일듯 싶다. 하지만 임작가님이 가장 닮고 싶어하는 사람은 오히려 우쟁천이 아닐지...
이제까지 나왔던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도가적인 사상을 가진 자유로운 영혼이여서 명성을 추구하지 않고 세력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본의 아니게 사건들에 말려들어서 황실을 전복하려고 하는 백련교의 후신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진가소전, 괴선) 상로일통을 위해 표국들을 모조리 접수하려는 세력과 다투고(농풍답정록) 장인과 뱃속의 아이를 헤친 세력과 싸움을 한다.(건곤불이기) 이제까지의 작품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남과 다투려고 하지 않고 남앞에 나서기를 싫어하되 자신의 직업에 충실할 뿐이다. 자신의 손에 닿는 사람들의 고통은 외면하지 않지만 자신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사람들의 고통까지는 일부러 도우려고 하지 않는다.
호풍환우하고 천지의 귀신을 부리는 경지에 다다른 운청산은 장강주변에 숨어살면서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인세를 구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세를 구제하려고 인위를 행할수록 오히려 일이 꼬이고 복잡해지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괴선에 등장하는 민선지도를 추구하던 백정휴조사가 모든 것은 미혹이였다고 한탄하고 승천도를 포기하고 떠나는 이유도 같다. 남을 바꿔서 세상이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신선이라는 존재는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 현생을 살면서 머리 속으로는 전생, 현생, 내생을 알기 때문에 만사를 평범하게 대한다. 운청산은 너무 냉정한 신선의 존재는 재미없다 하면서 남을 도움으로써 스스로를 돕는 적덕선의 길을 걸어간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세상을 보는 시선은 따뜻하다. 도교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은 현생의 고통이 내생의 즐거움으로 다가올 것을 무의식중에 알고 있지만 그래도 현생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안쓰럽게 쳐다보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부드럽게 위로한다. 그의 소설이 따뜻한 이유이다.
쟁천구패에서는 적덕선이 되고자 하는 주인공이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겠는가”라고 했던 부처님의 말씀이 생각나는 우쟁천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우쟁천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패자가 되어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한다. 아버지의 비극적인 삶과 할머니의 죽음을 겪으면서 약자가 겪어야 하는 설움을 너무나 잘 알고있는 그는 강자가 약자를 핍박하는 세상을 뜯어 고치고자 한다. 약자를 돕고 악인을 응징하는 막연한 협객행을 훨씬 뛰어넘은 개념이다.
이를 위해서 글의 중간중간에 전제조건을 풀어놓는다.
첫째, 인자무적이다. 맹자 양혜왕장구상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자든 현자든 간에 무식하고 배고픈 강도의 한 자루 흉도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지. 현실이 혹독하기 그지없는데 그 훌륭한 인덕에 감화당할 시간이 어디 있겠어? 찌르고 보는 거지” 우쟁천의 이야기다. “부처도 적이 있었다. 강자만이 인자무적할 수 있는 거야. 현실에서 힘없는 자는 호구일 따름이야” 화천상이 동감하면서 이야기한다. 다음 이야기에서 우쟁천의 입을 통해서 작가는 이야기한다. “패도와 왕도는 둘이 아니지. 힘을 누구에게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고, 어떻게 절제하느냐의 문제일 따름이지”
두 번째, 천명이다. 역시 우쟁천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이야기다. “한 부족의 흥망은, 그 부족 안에 어떤 인재와 현인이 있든 또 어떤 의인이 있든지 간에, 결국 지도자의 자질에 좌우됩니다. 안주하지 않고 이끌고 나아가려는 강인함을 지니고,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을 키우며, 욕심을 버린 공평한 분배를 행할 수 있다면 전 제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 곧 힘있는 자가 상식에 어긋나지 않게 힘을 쓴다면 그것이 곧 대의명분이요, 천명일 것입니다”
세 번째, 홍락이다. 우쟁천이 백가현에게 구애를 하면서 하는 이야기이다. “난 가난한 패자가 될 거야. 홍락천하! 내 꿈은 유리야. 아름답지만 깨지기 쉬워. 내가 욕심을 부리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게 되어 있어. 생각해봐, 내가 탐욕을 부리면 나를 따르는 사람들도 탐욕을 부릴 거야. 누군가는 잃어야겠지. 결국 힘없는 사람들이 그 누군가가 될 거야...”
네 번째, 대협이다. 우쟁천이 여곤에게 직언하면서 나오는 이야기다. “어르신께서는 천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공과 지위를 갖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혼원당, 그것도 하남혼원당의 영역 안에서만 그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셨습니다. 하남 밖의 많은 이들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셨습니다... 소생이 천하를 재패하고자 하는 뜻은 소생의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 모든 억압과 횡포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대협이 따로 나서지 않아도, 힘없는 자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억압과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는 것입니다.” 또 이야기 한다. “어르신! 저는 반드시 이 세상이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공포로서 군림할 것입니다. 하지만 약한자, 떳떳한 자들에게는 공기와 같은 존재가 될 것입니다.”
다섯 번째, 군주론이다. 우쟁천이 황자 주우탱에게 했던 이야기이다. “군주라고 해서 세상일을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각 방면의 대강을 알고 난 후에, 그 일에 정통한 아랫사람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그 덕은 모두 군주에게로 돌아가 후세에 영명한 군주로 평가받습니다. 가장 큰 군주의 덕목은 곧 사람을 보는 안목이고, 그에 따라 공정하게 신상필벌을 행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원수를 응징하되 목숨을 빼앗지 않는것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집단의 이해가 걸린 일에서는 목숨을 빼앗지 않고 군자연하는 것은 압도적인 힘의 우위에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라 우쟁천은 많은 피를 묻혀야 했다. 약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가족을 죽이고 강간하고 재물을 빼앗고 집을 불태운 자들에게 힘이 없서서 참아야만 하지만 힘이 있다면 반드시 복수하고자 한다. 8권에서 그 원한을 간직한 촌노가 홍락방을 찾아와 애원한다. “죽여주게, 그놈들의 살을 바르고 뼈를 부순 후 하초를 짓밟아주게. 그놈들의 눈을 파내고 대나무로 항문을 꿰어 죽여주게”
당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불필요한 살인이요, 손에 피를 묻혀 업보를 쌓는 일이지만 당한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인 것이다. 검선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청마저도 잔인하게 살해당한 소녀들의 시신을 보면서 살의를 일으키면서 자조한다. “적덕? 여인들에 대한 측은지심보다 분노가 먼저 이는 것을 보니 검선의 길은 내 길이 아닌 듯하구나”
소설속 홍락방의 배경이 되는 산서는 땅이 척박하고 장성이 가까워 물산이 많이 모이지 못하는 곳으로 큰 부자도 없고 그래서 큰 방파도 없는 곳이다. 산서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던 오대파가 몽고와의 항쟁에서 멸문하고 나서는 큰 방파가 나지 않고 흑도의 무리들이 주인역할을 하고 그나마 태원에만 정파에 해당하는 운도장, 복검방, 남양표국이 있을 뿐이라서 우쟁천이 산서를 일통하고 그 안에서 홍락을 행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큰 문파가 없으니 이권을 뺏기지 않으려 항쟁하는 세력이 없는데다가 그만그만한 조폭같은 흑도의 무리들은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에 있는 홍락방의 무인들이 응징하면 되었으니 피를 많이 볼일도 없어서 단전을 깨서 무공을 폐하면 되는 일이니까.
소설의 말미에서 결국 우쟁천이 천하를 재패하고 홍락천하를 이루지만 제검전이 천하를 제패하려고 피바람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홍락은 산서에서만 이뤄졌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홍락천하를 이루기 위해서 특별한 악행을 하지 않는 혼원당이나 북도련 남천맹등과 우챙천의 홍락방이 다툰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뭐 이런것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족이므로 과감히 생략한다.
이제까지의 작품들은 무협임에도 불구하고 서정성을 농후하게 띄고 있었지만 쟁천구패의 주인공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데 어떻게 서정성을 띌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쟁천구패의 거칠게 풀어가는 이야기에서도 작가의 따뜻한 시선은 달라지지 않았다. 소제목들을 살펴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하늘은 힘없는 자를 박대한다” “없다는 건 그렇게 서러운 거다” “무인의 생존법은 가슴 아프다” “보이지 않아도 흐르는 눈물은 있다” “강호, 힘없음이 죄악인 세상”
쟁천구패는 패를 추구하는 우쟁천의 이야기라기보다는 힘이 없어서 설움을 당한 사람들을 위로하는 레퀴엠인 셈이다. 비록 소설속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잠시라도 홍락천하가 된 산서에 사는 백성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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