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황규영
작품명 : 표사
출판사 : 청어람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가만가만하다.
크게 소리 치는 법 없고, 언성 높이는 일조차 별로 없다.
사랑을 얘기할 때도, 복수를 얘기할 때도, 심지어는 피 튀기는 격투 장면에서도 그는 어디까지나 침착하고 차분한 어조를 잃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낮은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힘이 있다.
인물 하나하나의 품은 생각과 감정의 흐름이 느껴지고, 격렬한 공방의 시작과 끝이 눈앞에 그린듯 펼쳐진다.
*그는 자상하고 꼼꼼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history, 감정, 생각...)를 갖고 있다. 소설 속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소설에서는 더욱더 모든 사람이 자기 얘기를 떠들 수는 없다. 등장하는 인물마다 각각의 비중이 다르기 때문이고,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성과 흐름을 흐트러트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할말을 다 한다.
표사 속에는 누구 하나 그의 자상함과 꼼꼼함의 혜택을 받지 않은 인물이 없다.
그렇게 모든 인물의 이야기를 다 하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별 부담 없이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하는 것은 그의 탁월한 균형감각일 것이다. 이야기가 흘러가는 어느 시점에서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한 인물의 이야기가 들어가야 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자상함과 꼼꼼함의 혜택은 등장인물 못지않게 독자에게도 베풀어진다.
그는 차분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무엇 하나 지나치는 법 없이 자세히 설명해준다.
간간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다시 그것을 풀어주는 타이밍의 신속함은 표사의 책장 넘기는 속도를 배가시킨다.
이어지는 오해와 우연의 중첩마저도 너무나 자연스러워 끄덕끄덕 설득되고 만다.
*그는 뒤끝이 있다.
표사를 읽는 내내, 매 단락이 끝날 때마다 나는 감탄했다.
그가 단락을 맺으며 구사하는 마지막 문장은 정말이지 특별하다.
그 단락 동안 응축된 긴장을 일시에 터트려 버리는 것일 때도 있고,
이어질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슬쩍 불러일으키거나,
예상치 못했던 유쾌한 반전이거나,
막연한 기대, 심상치 않은 복선, 깔끔한 뒷설거지....
그는 단 한 문장으로 그런 여러가지 변주를 훌륭하게 해낸다.
가히 '황규영식 마침표'라 부를 만한 문장들이다.
*그는 범상치 않은 작명 센스를 가졌다.
민택, 석민, 지영, 미진, 정배, 재호, 윤길, 지언, 동훈, 승현....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참으로 범상한 이름들이다(그래서 나는 진지하게 의심한다. 표사 속 인물들의 이름은 분명 실존인물,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이름일 것이라고).
어디 그뿐인가.
만사를 대행해준다고 해서 만사대행문, 그와 비슷한 일을 하지만 정당한 일만을 도와준다고 해서 정사협동문, 인신매매조직인 취인문, 고리대금업을 하는 수전문, 장물처리 전문의 활용문.....
이쯤 되면 그의 작명 센스가 범상치 않다는 데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문득,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장면도 생각난다. 케빈 스페이시의 그 경이스런, 거의 거의 작화증적인 말솜씨!)
따지고 보면 '표사'라는 제목부터가 그렇다.
광룡이라는 막강한 주인공과 강력한 유인력을 가진 흥미진진 이야기에 '표사'라는 제목은 어딘지 모자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아도 그렇다.
우선 주인공 민택의 경우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준다'는 의미일 뿐, 그다지 투철한 직업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지도, 그 일에 굉장한 애착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이런저런 식으로 얽힌 관계 때문에, 혹은 뭐 달리 하고 싶은 일도 없으니까...정도로 느껴진다는 얘기다.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반응은 더하다.
어느 누구도 그가 '순수한' 표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겉껍질, 뭔가(무시무시한 다른 것)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 기껏해야 임시적인 은신처쯤으로 여길 뿐이다.
어째서 이토록 힘할탱이-_- 없는 제목을 붙였을까...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표사'는 역시 '표사'다.
이야기의 시작이 표사로 부터 생겨났고, 그 흐름이 표국을 중심으로 이어진다.
가까이서 보면 '광룡과 같은 인물이 순수한 표사일 리가 없다'는 오해로 부터 거의 모든 큰 이야기들이 벌어지며, 그 단순한 하나의 오해로 부터 더 많은 작은 이야기들이 주렁주렁 엮여나간다.
멀리서 보면, 칠성표국이라는 지방의 조그만 표국이 우여곡절(물론 모든 우여곡절의 중심에는 광룡이 있다!) 끝에 무럭무럭 커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갸웃하던 고개를 새삼 끄덕이는 동작으로 바꿀 수밖에 없게 하는 작명 센스다.
*그는 지금 지쳤거나 빠졌거나....
표사 4권을 읽으면서 어째 좀...나는 불안한 마음이 되었다.
그는 지금 글을 쓰는 데 지쳤거나, 뭔가 (글 쓰는 일 말고) 다른 데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쳤거나 취했을 때의 몇 가지 증상이 있다.
활기가 없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말하는 데 조리가 없고, 같은 말을 반복한다. 뭔가를 빠트리거나 놓치고, 마무리가 분명치 않다.....
표사 4권에서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는 지쳤을까? 취했을까?
아니면....그냥 내 눈이 변했거나 틀린 걸까?
그 답이 뭔지 나는 모르고, 또 사실 답이 뭐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왕 이야기되어버린 4권이 아니라 앞으로 이야기될 5권, 6권, 7권...이니까.
나는 다만, 내가 좋아하는 '표사'의 앞으로 이야기들을 '끝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재밌는 책을 읽는 일은 나를 살게 하는 가장 큰 이유니까.
...나는 살고 싶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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