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는 조변석개작심삼일변화무쌍신주제일환마! 벽호(壁虎)
벽호
장경 작, 1999년, 시공사 드래곤북스
“나의 검을 소일(消日)하게 할 자는 천하에 단 한 명뿐일 줄 알았다.
진가의 피를 이을 후인! 그러나 이제 한 명 더 있음을 인정한다.
앞으로 십 년! 나는 그 두 명을 보기 위해 다시 올 것이다.
진가의 위를 이을 자를 데려가기 위해! 비검을 위해!
십 년이면 네 검의 어설픔을 메울 시간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그때 한번 쓰러진 자는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 본문 중에서 -
존칭은 생략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형상을 본 따 사람을 만들었다고 한다.
무협 작가들 또한 자신들이 창조한 주인공의 모습에 그들의 형상을 심었으리라.
금강은 그 지고한 이상을 대운풍에, 임준욱은 따뜻한 가슴을 사마진명에, 운곡은 글쎄? 자신의 어디에서 진금행을 창조했을까? 아마도 외양이리라! 히.
그렇다면 과연 장경은?
성인학, 소호, 심연호, 명강량, 위무일, 늑유온, 손우. 이들 중 그의 모습과 가장 닮은 이는 누구일까?
아니다. 이들은 아닐 것이다.
그는 아마도 “벽호”에게 자신의 전부를 올인 했을 것이다.
좋아하는 것이라곤 술과 여자뿐, 그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자. 파락호! 벽호. 그야말로 장경의 진정한 분신이 아닐까?
“벽호”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장경의 8 작품 중 가장 손 떼가 덜 탄 작품.
지난 주, 근 3년만에 벽호를 꺼내 들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천산검로, 빙하탄 같이 1년에도 수 번을 읽는 작품들에 비해 벽호는 정말 오랜만에 집어들었다.
5년 전 처음 읽을 당시와 3년 전 그리고 지금에 와서 읽는 벽호의 느낌은 전혀 달랐다.
5년 전에는 늑유온에 미쳐 있을 때라 벽호가 조금은 어설프게 보였다. 3년 전에는 4권 완결이 아쉬웠다. 두 어 권 분량의 이야기를 더 보고 싶다는 욕심이 무진장 생겼다.
지금에 와서 나는 황금인형이 갑자기 튀어나온 작품이 아님을 벽호를 통해 확연히 깨달았다. 아니 오히려 그 익살과 해학은 순화되고 정제된 황금인형보다 더 노골적이고 거칠게 묘사되고 있다.
8 작품 중 손 떼가 가장 덜 탄 작품답게 이전에는 벽호도 나에게 편한 작품만은 아니었다.
늑유온, 심연호에 비해 너무도 다른 성격을 지닌 벽호와 친해지기 쉽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제는 벽호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진, 초, 연, 제, 한, 위, 조. 춘추전국시대, 낭인의 후예, 전국 칠패.
천년무문을 꿈꾸며, 강호를 암약, 강호의 주인으로 행세하기 시작하고, 작금의 천하제일인 무적패검 공양안은 그들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아채고 강호를 강북의 북칠성련, 강남의 남십자성으로 양분한 후, 천검루에 은거하며 전통의 명문 구파일방의 명숙들과 은밀히 칠패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강호의 앞날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법.
칠패를 위시해 북칠성련, 남십자성 그리고 구파일방의 눈과 귀가 연등가의 파락호 벽호에게 집중되는 의외의 사태가 발생하고, 술과 여자를 제외하면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롭기를 바라는 벽호 역시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강호의 은원에 개입하게 되는데...
“물론 아쉬움이야 나도 컸지. 하, 하지만 대, 대홍은 나의 수하야.
아랫사람의 여자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정말 의리 없는 짓이라구.“ - 중략 -
“헉! 헉! 빠, 빨리 빼... 나, 나는 정말 여, 염치없는 자가 되, 되기 싫다구.”
“하학, 악! 다, 당신도 좋잖아요. 그, 그냥 모르는 척.... 그리고 빼야 할 물건은 다, 당신이 가지고 있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으흑!” - 중략 -
“이, 이런 경우 가, 감히 뺄 수 있는 나, 남자가 있다면 나와 보라고 그래!”
사실 처음 읽을 당시에는 벽호가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인줄도 몰랐다. 종사의 기질을 가진 늑유온에 비해 벽호의 염치없는 짓에 실망했기 때문에 이야기가 눈에 들어오질 않았던 것 같다.
좋아하는 배우가 비열한 악역을 맡았을 때나 잘생긴 배우가 분장으로 추악한 모습으로 나올 때의 느낌과 비슷했을 것이다. 주인공의 겉치장에 지나치게 연연해했던 것 같다.
아마 보는 안목과 적은 나이도 한 몫 했으리라.
이런 느낌은 나뿐만 아니라 천산검로, 장풍파랑, 암왕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조금은 가졌으리라 본다.
황금인형 서문에 보면, 장경은 “가볍게 달려가지만 절대 가볍지 않을 장경의 발걸음을 보게 되실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가장 부합하는 작품이 “벽호”가 아닐까 생각한다.
“헤헤헤!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모든 무사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때문에 그들은 술을 찾아 여자를 찾아 두려움을 잊으려 하지.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나는 나를 아껴주고 나를 기억해 주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두려움을 잊는다. 죽음 후에도 그들이 나를 추억할 것이라 생각하면 가슴이 훈훈해지거든. 나는 사람은 사람에게 그 무엇으로 남아 있기를 바래서 사는 것 같다.” - 본문 중에서 -
아마도 이 글이야말로 장경이 추구하는 무협의 주제를 대변하고 있을 것이고 내가, 독자들이 장경에게 바라는 장경무협의 영원한 화두가 아닐까 싶다.
무겁게 달리든 가볍게 달려가든 장경의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고 해마다 그의 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세대의 진정한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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