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장르문학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있다. 사전에 따르면 장르문학은 문학 문예 양식의 갈래로 서정, 서사 또는 시 소설 따위로 나눈 기본형을 이른다고 한다. 다시 해석하자면 장르문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모순인 셈이다. 그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일컫는 장르문학이란 무엇일까. 딱 잘라서 말하면 장르문학은 순수문학이 아닌 문학을 의미한다. 순수문학은 사전적으로 예술적 가치를 추구하는 문학, 흥미 위주의 대중 통속 문학과도 구별된다라고 정의내려지는데, 고로 장르문학은 흥미 위주의 통속문학 정도로 풀이될 수 있겠다. 한국 문단은 이러한 장르문학을 천대한다. 거의 모든 장르문학 작가가 창작열을 불태우는 중국배경의 무협소설과 서양 중세 배경의 판타지는 이미 밟히고 찢겨 도서 대여점의 한 귀퉁이만 차지하는 사양문학이 되어 버린 것이다.
또 다른 이름으로 환상문학이라 일컬어지는 장르문학. 실현될 수 없는 환상만을 나열해대는 한국 장르문학은 자신이 만들어낸 함정에 빠져 있다. 무협소설은 중국적/남성적 세계관에 천착해 다양한 계층을 상대로한 저변 확대에 실패했고, 서양 판타지는 1회성 세계관의 덫에 빠져버렸다. 애초에 문단과 대중이 장르문학을 바라보는 시선도 문제지만,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그 자신에 있다라 할 수 있겠다. 소설 에뜨랑제의 저자 임허규는 이러한 현실과 일본 환상문학 시장의 차이점을 빗대어 말한다. 이런 함정에서 벗어난 유일한 예외가 일본의 환상문학들인데, 저는 그 성공요인이 일본인에게 익숙한 코드에 전세계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첨단 과학기술 개념이 믹스된 제 3의 세계관을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정교한 스토리, 섬세한 편집, 엄격한 품질관리가 더해지고, 막해한 자본과 마케팅이 가해지면서 안 될 작품도 되게 만드는 저력까지 보유하고 있지요.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내 취향은 정말 다양해서, 텍스트란 건 닥치고 읽곤 했었다. 테메레르와 반지의 제왕, 대런 섄 등 영미 판타지를 흡입하듯 읽었던 적도 있고 흔히 New Type Novel이라 불리는 일본 엔티 노벨이라든지, 그 엔티노벨의 가벼움을 차용한 한국 라이트 노벨 따위를 읽었던 기억도 난다. 그중 내가 가장 즐겨 읽었던 책들은 앞서 언급한 한국의 장르문학이었는데, 무협과 판타지를 넘나드는 무림 고수의 이야기들은 어린 나의 환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장르문학엔 순수문학에 없는 대리만족이 존재했다. 힘없고 나약했던 주인공이 조금씩 자신의 힘을 찾아 나서는 여정, 그 속에 피어나는 사랑과 우정. 유치함이 넘쳐나는 작품도 존재했지만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은 분명히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함정에 빠진 장르문학의 늪에서 배회하던 도중 나는, 이영도라는 이름을 들었다.
이영도의 소설은, 다른 책들과 달랐다. 그는 자신의 세계에 철학을 만들어냈고, 엘프 드워프 따위의 진부한 서양 판타지 개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수립해나갔다. 이영도의 세계에선 도깨비와 나가가 존재했고, 마음으로 대화하는 니름이 존재했다. 그의 세계에서 왕은, 결코 먼치킨 소드맛스타 따위의 개념 없는 존재가 아니었다. 타인의 눈물을 마실 수 있는 사람, 아니 모든 이의 눈물을 마셔야 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왕이었다. 나는 눈물을 마시는 새를 읽으며 나오미 노빅의 천진난만함을 읽었고, 어슐러 르 귄 혹은 톨킨이 창조해낸 넓은 세계를 보았다. 그의 글에는 그만의 철학이 가득했다. 책을 덮으며 나는 조그만 소름을 느꼈다. 아, 이 책이 영화로 제작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답잖은 순수문학의 타이틀보다 훨씬, 즐거웠던 책. 나는 이영도를 기억할 것이다. 웃돈을 얹어주고도 출판되는 번역본 환상소설들의 틈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가. 임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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