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가우리
작품명 : 폭풍의 제왕
출판사 : 파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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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호쾌하다. 코믹하다. 감동적이다. 흥미로운 이야기로서 <폭풍의 제왕>이 성취한 완성도는 정말 대단하다. 전작인 <강철의 열제> 보다 서사 진행상의 강약 조절이 훨씬 매끄럽다. 가벼운 유쾌함과 진중한 감동의 완숙한 조합이 돋보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이야기꾼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능력 중 하나라고 여긴다. 대단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매력적인 캐릭터 메이킹이다. 콴, 탈라스, 디카프리오 등 각 캐릭터의 고유한 개성이 부담스럽지 않게 짜여 있고, 인물 간의 관계 역시 균형감 있게 잡혀있다.
군왕다운 군왕, 모사다운 모사, 장수다운 장수, 백성다운 백성. 각자의 지위에 걸맞는 캐릭터성의 부각과 그들이 자연스럽게 맞물려 들어가며 하나의 탄탄한 소규모 사회가 완성된다. 그러나 이 조합은 <강철의 열제>와 상당히 유사하다. 강력한 카리스마의 열제와 그 밑의 코믹하고 충직한 신하들, 지배자의 영도력과 정의로움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보답하는 백성들.
<강철의 열제>도 <폭풍의 제왕>도 이상적인 군주와 그를 따르는 세력집단을 묘사한다. 더군다나 주인공 측 세력은 소수이지만 정예중의 정예이고, 각자의 능력은 적대 세력인 제국의 엘리트를 우습게 능가한다. 모자란 것은 다만 숫자일 뿐이다. ‘소수 정예의 탄탄한 응집세력 vs 딱히 두드러지는 인물은 많지 않지만 위협적인 머릿수의 거대 집단’ 의 구도가 반복된다.
또, 전작의 주인공인 고진천과 이번 주인공 콴은 시작부터 완성형에 가까운 인물로 그려진다. 정신적으로도, 무력적으로도, 군왕으로서 갖춰야할 태도조차도 부족함이 없다. 이미 그들은 강대한 왕의 조건을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다. 때문에 외적인 압력을 헤쳐나가는 과정속에서 그들이 내면적으로 성숙하는 경우를 찾기 어렵다. 다른 인물들은 물론 독자들마저도 콴이나 고진천을 보면 그저 감탄과 경외하는 것 이외에 다른 감상을 갖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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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이야기 속의 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면 조금씩 성장해가는 캐릭터든, 이미 완성되어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캐릭터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 점에서 가우리 작가는 정말 탁월하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 정도로 매력적인 일군의 캐릭터들과 그들 간의 관계를 엮어낼 수 있는 역량이 있는데, 어째서 주인공의 대적자와 그의 세력에 대한 설정과 묘사는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가? 소수정예 집단인 콴의 세력과 비견할 만한, 온갖 매력적인 캐릭터들로 이루어진 또 다른 반동집단들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은가? 전작의 밀리오르와 신성제국군은 가우리 연합에 비하여 심하게 격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라는 설명이 나와도 이건 고진천과 예하 장수들만 나서면 추풍낙엽이다. <폭풍의 제왕>에서도 비슷하다. 명색이 황실 기사단인데 이건 아예 상대가 안 된다. 휘하의 장수들도 제국의 정규군을 우습게 알 만큼 출중하다. 아예 상대가 안 되니 긴장도 안 되고 뻔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나마 카리스마 있는 콴의 스승은 지위가 일개 장수에 불과하니 콴과 비교대상이 될 수 없고, 황태자는 똑똑하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제국의 나머지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적들도 비슷하다. 이대로라면 전작에서처럼 ‘소수 정예의 정의로운 주인공 국가 vs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거대세력’의 구도로 귀결될 공산이 농후해 보인다.
콴의 세력은, 민본주의에 기반하는 군주체제에 대한 이상적인 소설적 묘사의 한 모범이다. 인류 역사에 실존했던 정치체제의 이상적 구도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여기에 격렬하고 장중한 전쟁씬, 땀내나는 장면 속의 눈물과 감동에 대한 묘사는 이미 전작에서 검증된 바이다. 매력적인 일군의 캐릭터와 대규모 전쟁씬을 설계할 수 있다면, 진중한 신념을 지니고 온 힘을 다해 세상과 부딪혀가는 온갖 군상들의 쟁패를 그려낼 수 있다. 일개 인물 혹은 집단의 수준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 그리고 각 집단의 중추세력들간의 숨막히는 대결이 꽃피우는 군협소설이 가능한 것이다. 삼국지를 보자. 하나하나 우열을 가리기 힘든 수많은 군웅들이 옳고 그름을 가늠하기 어려운 명분의 충돌 속에서 명멸하는 강렬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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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제왕은 이미 그 자체로 멋진 작품이다. 하지만 이만한 능력을 보여주는 가우리 작가이기에 보다 거대한 스케일의 임팩트있고 스펙타클한 이야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콴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난 뒤의 이야기 전개조차 전혀 짐작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단은 조용히 작가의 행보를 따라가는 것도 기대가 된다. 여러번 언급했듯이, 이미 충분히 재미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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