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 한편으론 심도 깊고 한편으론 어이없는 800원의 논쟁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책을 정말 좋아한다.
하루 24시간 중 책을 손에서 놓는 경우는 18시간 정도다. 물론 그 18시간에서도 바로 옆에 책이 있는(소장이 아닌 보기 위한 대기) 시간이 10시간쯤 되는 것 같다.
지난주에 40만 원가량의 책(그간 살까말까 고민하던.)을 지르고 손에 들어왔을 때의 뿌듯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나는 그중에 '퍼언 연대기'를 말하겠다.
일단...
지루하다.
내용상의 이렇다 할 특별함도, 문장상의 대단함도, 특출난 세계구성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고, 번역 판타지답게 지루하다. 아마 이 글을 문피아에 연재했다면, 1편과 2편의 연독률은 10%에도 채 미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에서 800원의 가치가 결정된다.
만약 내가(책을 이렇게나 좋아하는) 그 책을 빌려왔다면 나는 이 책을 보고 있을까? 아니다. 지루함을 참고 볼만큼의 가치를 부여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면 반납을 하며 '이거 정말 재미없네요.'라고 말을 했을 것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렇게나 많은 상을 받았다는 퍼언 연대기는 '800원의 가치도 못하는 책.'이 되고 만다.
개연성도 후지고 재미도 없는...
하지만 난 이 책(전3권)을 사기 위해 40,000원 가까이의 금액을 투자했다. 800원의 가치를 생각하며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꾹 참고 읽었다.
지금 1권이 끝나가는데 '돈'이 아깝지 않다.
물론 '강추'라거나 '보세염.'은 아니다. 그냥 '나쁘진 않네.' 정도이다. 1권의 가격은 12,800원. 페이지는 520페이지, 중간중간 버리는 페이지를 빼면 490페이지쯤 된다.
돈은....
아깝지 않다.
단지 800원의 가치를 생각했을 때, 그렇게나 아까웠던 돈이 12,800원이 되니 이거 꽤 재미 있다.
명작들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군림천하가 재미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난 군림천하가 재미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냥 지루한 무협이다. 그 안에서의 깊이를 논하려 하지 말길 바란다. 나 역시 독서의 깊이는 누구에게도 꿇린다 생각하지 않으니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군림천하는 '800원' 가치의 군림천하다. 아마 내가 군림천하 전질을 구입하고 있다면 퍼언 연대기와 마찬가지로 아깝지 않다 생각하고 또 명작이라고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800원을 지급한 군림천하는, 800원 가치를 못한 책에 불과했다. 이건 사실이니 굳이 날 비꼴 이유는 없다.
좋은 책?
800원 내고 빌려보며 좋은 책을 운운하는 것은, 이미 극단적인 자기만족에 불과하다고 말하겠다. 800원 가치의 좋은 책이란, 그저 재미있으면 된다. 그냥 그 순간 만족하면 된다. 취향에 맞으면 된다.
시사성?
작품성?
서사성?
뭐가 중요한가? 그냥 내가 보는 이 순간이 즐거우면 되고 그것이 끝나면 기억에서도 사라진다. 이게 바로 800원의 가치다.
800원을 지급하고 800원의 기대를 하고 보기에, 10,000원의 가치가 있는 책이 800원 가치의 기대에 부흥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10,000원 가치의 기대로서 800원 가치의 책을 보며 만족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누구의 수준이 높고 누구의 수준이 낮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냥 '가치의 기준'이 다를 뿐이다.
지금은 취향이라는 말로 왜곡되었지만 개인적으로 볼 때 그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기준차이다.
그렇기에 문피아 감상란이나 비평란에 보면 가끔 어이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어떤 사람은 800원 가치로서 '감상'을 했고, 어떤 사람은 10,000원의 안목으로 '비평'을 했다. 전자는 아예 빌려보았고, 후자는 사서 보았다.
작가에겐 어떤 독자가 좋을까?
당연하게도 그 '가치의 기준'에 부합되는 독자가 좋다.
좋은 책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작가에겐 후자가, 대여점용 책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작가에겐 전자가. 마찬가지로 이 또한 가치의 차이다.
내가 말하고 묻고 싶은 부분은 이것이다.
10,000원의 퀄리티를 원한다면 그 가치에 어울리는 책을 사서 보면 된다. 그러면 10,000원의 가치에 그 이상의 가치가 더해져 그 작가가 마치 20,000원 가치의 작품을 만든 그런 느낌에 빠진다.
10,000원 퀄리티를 원하며 800원을 지급하면?
내가 볼 땐, 3,000원 정도의 만족은 할 수 있을 것이다.
800원 사이에서 모처럼 만난 3,000원 가치에 대단히 만족스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 그 10,000원 가치와 그 이상의 감동은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10,000원 가치를 생각하며 800원 가치를 노리고 쓴 작품들을 폄하하지 말았으면 한다.
중요한 것이 변화라면 변화를 하면 된다.
'내'가 하면 된다.
책 많이 읽는 것이 자랑도 아니고, 책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자랑이 아니다. 그냥 '만족'이다. 만족만 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는 몇몇 정말 좋아하는 작가들이 있다. 만약 그 작가들이 10만원짜리 100페이지 책을 낸다고 해도 나는 그 책을 꼭 소장할 것이다. 그 돈을 내고 그 책을 본다면 10만원이 아니라, 20만원의 가치를 내게 전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탓이다.
뭘 말하려 했는지 쓰는 동안 까먹어 어수선해져버렸지만, 가치를 논하기 위해선 그 가치를 지급해야 함을 말하며 이만 정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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