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이영도
작품명 : 눈물을 마시는 새
출판사 : 황금가지
끙... 요즘 들어 글을 쓰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자괴감의 악마가 나를 사로잡았는지 새로이 글을 쓸 때마다 부끄러워지니 무슨 조화인가... 다른 이의 글을 살펴보면 이러한 심마에서 벗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 마구잡이로 감상을 써 보려 한다. 일단 최근에 읽었던 마신은 끝냈고, 어디 이영도 작가님의 대작 <눈물을 마시는 새>에 대한 감상을 적어볼까.
본인이 가장 먼저 읽은 문학다운 문학은 김훈의 <칼의 노래>다. 아직 중학생으로 어리숙했던 본인은 괴상한 사대주의에 빠져 한국문학을 굉장히 우습게 보았었는데 그 인식을 바꾸어주었던 것이 바로 <칼의 노래> 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섬세하고 절제된 문체와 묘사 그리고 가장 친숙하나 또한 생경한 조선의 풍광이 나를 잡아끌기도 했지만 내가 <칼의 노래>에 열광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순신이라는 인물이었다.
어째서 그는 그를 푸대접하는 조정에 헌신하는가? 어째서 그는 그가 이룩한 모든 업적이 한 줌 재로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서도 담담히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로 시작되는 명문을 올릴 수 있었을까? 그 혼자만의 힘으로 왜적을 몰아내다시피 하고서 어찌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조용히, 초연하게 죽어갈 수 있었을까... 영웅적이다 못해 초인적으로까지 느껴지는 그의 인격 그리고 결연한 의지는 가장 위대하고 바람직한 영웅의 상으로 그를 내 안에 각인시켰다.
나는 만인의 심상에 투사된 영웅 중 초인적인 면모를 이순신에게서 보았다면 그것의 악마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를 바로 <눈물을 마시는 새>의 케이건 드라카에게서 보았다.
서로 다른 존재의 화합! 천생을 뛰어넘는 교류와 화해 그리고 그 속에 싹트는 사랑! 모든 이 그리고 모든 종교가 바라마지 않는 지상과제요 이상이다.
흑인이라는 존재를 처음 발견했을 때 이른바 지성적인 백인들은 말했다.
<인간이라는 종에 가깝다고는 하나 그 생활양식이 야만적이고 생김생김이 다르니 어찌 같은 인간이겠는가?>
인간이라는 것의 존엄성이 참으로 다양하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구현되었던 시대이니만큼 그 생각은 괴괴하게 비틀어진 진화론을 이론의 발판으로 삼아 전 세계에 들불처럼 번져갔고 결국 흑인은 비참하게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온 세계에 사랑을 전파하는 종교인 카톨릭을 생활의 가장 큰 보람으로 삼았던 백인들이 그랬건댄 어찌 아라짓 같은 고대의 인간들이 그러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케이건은 그러한 인식에서 벗어났다. 다른 외모와 다른 생활양식이라는 것은 그에게 생소함과 경계로 다가오기보다는 외경의 대상으로써 새로운 발전의 원동력으로 보였다. 소위 세계화되었다고 자랑스럽게 떠드는 요즘에도 찾아보기 힘든 포용력이고 생각의 넓이다. 그러나 시대를 뛰어넘는 생각은 언제나 철퇴를 맞는가! 영웅적이나 또한 독선적이기 짝이 없는 그의 '사랑'은 배신과 그의 조국 아라짓의 멸망이라는 결과로 찾아왔고 편협한 그의 두번째 '사랑'은 키탈저 사냥꾼과 그의 아내의 죽음으로써 찾아왔다. 그가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런 비참한 결과를 얻어야만 했는가? 그래서 그는 울부짖고 한 마리 야수가 되어 아라짓의 의지를 이끄는 검으로 나가를 토막치고 키탈저 사냥꾼의 복수를 행했다.
그가 멸망시킨 조국 아라짓과 그가 죽인 키탈저 사냥꾼.
이 두 가지의 업보는 평생 케이건의 불행한 인생을 옭아죄는 굴레가 되어 그의 행동양식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 그 중 아라짓의 사슬에 매여 따라야 하는 대승정의 명령에 따라 그는 나가의 마수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는 나가를 왕으로 세운다. 변명하듯 눈물을 마시는 새에 대한 고담을 지껄이며 뒤돌아서는 케이건에게서는 지독한 씁쓸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것은 거듭된 배신에 부서지고 조각난 그의 마음에 남은 한 조각 포용과 이해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상황은 급변하고 결국 케이건이 화신이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 오랜 세월 케이건과 함께한 까닭에 케이건과 정신이 융합되어버린 신은 케이건을 따라 나가를 멸망시키려 든다. 신이 우화등선할 때에 그의 지식을 남겨둔 하늘치 유적은 말한다. <인간에게 내린 신의 선물을 상기시키면 그를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절체절명의 상황, 케이건의 행동을 구속하는 가장 큰 존재, 아라짓의 왕인 나가가 말한다. 네 말 대로 눈물을 마시는 새가 되어 나는 죽겠다고,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은 바로 왕이라고. 그러나 케이건은 말한다. 왕은 모든 이에게 내려지는 선물이지 인간에게 내려진 선물이 아니라고.
결국 케이건은 이성을 잃고 폭주하게 되고 거기서 그는 미래의 잔영을 본다. 미래의 존재는 천진하게 웃으며 말한다. 인간에게 내려진 선물은 나늬라는 미녀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 미녀는 지금 모든 이들을 이끌어나가는 자리에 서서 달리고 있다고.
그리고 결국 케이건은 진정한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복수자가 찾아오고 케이건은 조용히 고담을 뇌까리곤 싸움을 택한다.
냉철한 합리성에 의하여 기승전결이 이어지던 과거아는 다르게 후반부는 뜻 모를 뜬구름 같은 은유와 무책임한 예찬론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거미줄처럼 섬세하게 깔린 복선 덕분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지는 않지만 3권까지의 전개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드러난 케이건의 상처를 보며 탁상에 앉아 책을 볼 뿐인 독자들에게는 절절하게 느껴지지 않을 지 몰라도, 케이건에게 있어서만큼은 아스화리탈이 보여준 그 환상이 무엇보다도 큰 설득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케이건, 그는 시대에 앞서서, 그릇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남을 믿고 모든 것을 포용하려 들었기에 쓰러진 영웅이다. 굳건한 의지와 순수함을 두루 갖추었고 만인을 위하는 고결한 심지도 있지만 결국 현실에 부딪쳐 형이상학적인 찌꺼기와 멋진 이야기만 남겨두고 쓸쓸히 여일해야 하는 방랑자일지도 모른다. 이순신처럼 강토를 지킨다는 목적을 이룬 영웅의 삶은 후에 추모라도 되지만 케이건은 어떤가, 같은 뜻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홀연히 이지러질 뿐이잖는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비참한 인생이다. 실패한 영웅이다.
<인간의 마음은 미움으로 가득 차 있다.>
고대의 선현들이 남겼다는 비석, 거기에 비쩍 마른 소년이 독기 품은 눈으로 새겨놓은 악문이다. 독특한 풍화를 거쳐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었을 비석을 향해 누군가가 저벅저벅 걸어온다. 그리고 소년이 남긴 악문을 고친다.
<인간의 마음은 ...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누구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본인은 그것이 케이건 드라카라고 믿는다. 기억되기 위해서 사랑을 했던가? 합리적인 목적성을 위해 사랑을 즐기고 또 사랑을 판다면, 어찌 삶이 비참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나늬라는 것은 모든 이를 융화하고 이끌어나가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연인인다. 신은 인간에게 나늬를 선물로 내렸다고 했다. 곧 다른 이를 포용하는 사랑을 내린 것이다. 유치한 말이지만 케이건에게는 어찌 절실하지 않은 말이겠는가, 그가 홀로 걸어온 길을 신이라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보장한 셈이지 않겠는가. 그 보장과 격려에 힘입어 그를 신음케 하는 열독과도 같은 과거에서 벗어난 그가 마침내 의심과 미움으로 그가 구원했던 소년의 잔재를 지우고 사죄하려 비문을 지운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케이건은 실패한 영웅이다? 아니, 그는 그냥 영웅이다. 영웅이 어찌 실패하고 실패하지 않음으로 구분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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