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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사람들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
13.09.09 18:32
조회
2,072

교외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생긴 일이었다.

차 맨뒤의 길다란 좌석, 바로 내가 서 있는 코앞에 앉아 있는 남자 한 명이 히죽히죽 웃고 있는 모습이 어느 순간 내 주의를 끌었다.
사람의 웃음이라는 것은 원래 그렇게 웃는 모습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을 때 더 커지는 법이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ㅡ그러니까 '나는 지금 이 상황을 웃을 만한 상황으로 여기노라' 하는 의사 표시를 할 필요가 없을 때, 우리가 짓는 웃음은 말하자면 '경제형'이 된다. 손님을 초대하지 않은 식탁에서 꽃과 양초가 치워지듯이.
그런데 무슨 이유로 웃는지 알 수 없지만 상대도 없이 혼자서 웃는 그 남자의 웃음이 턱없이 개방적이고 폭이 큰 점이 내 주의를 끌었던 것이다. 그러나ㅡ 
  '뭔가 이유가 있어서 저렇게 웃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이내 그에게 관심을 끊었다.

이윽고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내리는 바람에 그와 나란히 앉게 된 뒤에도 나는 그에게 신경을 쏟지 않았다.

 

 

 

 

그렇게 나란히 앉아 한참을 흔들리며 가는데 갑자기, 밑도끝도 없이 불쑥 내 코앞을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그가 내 얼굴 앞에 손을 내민 것이었다.

십 원짜리 동전 세 개가 그 손바닥에 놓여 있었다.
잠시 멍해 있던 나는 그가 나더러 그 동전들을 가지라고 내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아까 그가 짓던 미소의 미욱스러움이 이제 보니 뇌성마비 환자의 미욱스러움이었다는 사실도....
그러나 그가 왜 내게 동전을 주려 드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어쨌건 동전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주겠다는 것을 받는 일이 어려울 것은 없었다.

 

 

 

 
잠깐 망설이다가 나는 그 동전을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부이(기분이) 좋아서.... "
뇌성마비 환자 특유의 어기적거리는 방식으로 입을 움직이며 그가 말했다.

기분이 좋아서 내게 동전을 준다는 소리 같았다.
  '기분이 좋은데 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동전을 주는 거지?'
뇌성마비 환자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지 싶었다.
나는 다시 웃었다. 그러자 내 반응에 용기를 얻은 듯 그가 다시 말했다.
  "무울(먹을) 줄 모르는 술을 무웄더마는 기부이 좋아서.... "
  "누구하고 술을 무웄는데?"
그가 누구와 술을 먹었건 내가 궁금할 게 뭐 있겠는가. 아무튼 그의 행동이 나를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았음을 알려 주고자 던진 질문일 뿐이었다.
  "혼자서."
한번 말문을 연 그는 입을 어기적 어기적거리며 얘기를 계속하려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막지 않았다.

 

 

 

 


이건 내 귀한 미덕이라 생각하는데,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일단 성심껏 대하는 습성이 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이더라도 그의 초라한 외적 조건 때문에 내게서 무시받는 일은 없다고 봐도 된다.(물론, 누군가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초라하다는 이유로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내 쪽의 조건이 번듯하지 못하다는 점도 있다.)
아무튼 상대 쪽에서 먼저 뭔가를 가지고 내 성질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그가 내게 아무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 분명하더라도 일단은 내가 살면서 마주치게 된 한 인격을 존중해 주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은 꽤 고역이었다.
나는 원래 남달리 말귀가 어두운 편이다.

청각기능에 문제가 있다기보다, 누가 뭐라고 얘기를 하면 그 발언이 단순한 음향을 넘어서 의미를 띤 메시지가 되어 머릿속에 전달되는 시간이 내 경우는 다른 이들보다 좀더 걸리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 데다가 이렇게 뇌성마비 환자의 알아듣기 힘든 발음까지 겹쳤으니....

 


그가 어렵사리 단어들을 입밖으로 꺼내면 나는 그 대여섯 중에서 하나를 간신히 캐치하여 그가 내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어림짐작하는, 그런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대화는 무척 힘이 들었다.
게다가 그의 얘기를 실상 내가 거의 알아듣지 못하고 있음을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 어쩌다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으면 놓치지 않고 열심히 맞장구를 치고, 그러지 못할 때는 그가 하는 말에 대한 공감 또는 회의 어느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어정쩡한 미소를 유지하려다 보니 더더욱 신경 소모가 심한 것이었다.
  ㅡ이 사람은 평소에 여간해서는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 힘들었을 것이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갖는 경험을 이 사람이 갖게 만들어 주자.
대충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의도를 그때 내가 품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가 모처럼 내 귀에 쏙 들어왔다.
  "고삼?"
엥?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내 얼굴이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소리는 심심찮게 듣는 터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삼이라니.
  "고삼이가?"
그가 다시 물어 왔다.
내가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는 이내 수긍할 수 있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뭐라고 하였는데, 주름이란 단어가 그 속에 등장하고 있었다.

아마도 얼굴에 주름이 많은 것으로 미루어 자기가 봐도 고등학생은 아닌 것 같다는 얘기인 성싶었다.
  '뭐야? 얼굴에 주름 있는 사람을 왜 고삼으로 보는 거냐고?' 

 


  "어른한테....말을 나아서(놓아서).... "
그가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였다.

자기보다 어른인 모양인데 말을 놓아서 미안하다는 얘기 같았다.
  "괜찮아."
씩 웃으며 내가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내 쪽에서 그가 몇 살쯤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헤어스타일에 신경쓸 여유가 없는 고시 준비생 같은 짧고 부시시한 머리. 어지간해서는 추위를 타지 않을 듯한 든든한 파카 옷차림. 그리고 얼굴은 축구선수 이천수가 은퇴하고 나서 살이 붙으면 꼭 저렇게 되겠다 싶게 생겨 있었다.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사이? 하지만 의외로 십대 후반이거나 사십 대 초반일지도 모르지. 원래 여느 사람들과 같은 사회생활 과정을 밟지 않는 저런 사람들의 나이는 영 가늠이 안 되는 법이니까.



괜찮다는 나의 대답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 그는 다시 내게 말을 놓으며 얘기를 계속하였는데, 그 중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단어 몇몇에 불과하였다. 차 안에서....만지니까.....큰일난다....추행.....
어쩌다가 그 쪽으로 얘기가 흘러갔는지 모르겠지만, 버스 안에서 치한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얘기인 듯싶었다. 아니면, 반대로 나더러 치한을 조심하라는 얘기일까?
누군가를 따라가면 안 된다는 소리도 나왔다. 역에서....사람들 많은 데서....좋은 데 가자고....큰일난다....
아마도 기차역에서 그를 본 누군가가 어딘가 수용시설 같은 곳에 그를 데려가려 하였으나 그가 거부하였던 모양이다.

 


  "왜 같이 가자고 했을까?"
모처럼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이 반가와서 내가 냉큼 말했다.

마치 지금까지 쭈욱 그가 하는 소리들을 빠짐없이 이해하였던 양, 그 증거로 지금 그의 말에 올바른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느냐는 듯이. 그에 이어지는 그의 대답은 또다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러는 동안에 버스는 시내로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작별을 고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 출입문 쪽으로 갔다.
신호등에 걸린 차가 지체하고 있을 때 그가 문득 일어나 내 쪽으로 걸어왔다.

자기도 그냥 내리고 싶어졌다는 것이었다.
나를 따라 차를 내려 봤자 이제는 집에 들어가 봐야 하는 나와 함께 시간을 더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리고 싶었으나, '당신과 좀더 같이 있고 싶다'고 그가 뚜렷이 밝힌 것도 아닌데 그런 소리를 할 수도 없었다.
   '아까 그가 하였던 얘기로 미루어 버스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의 일과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여기서 차를 내려서 안될 것도 없겠지.... '

버스에서 내린 다음 다시금 그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 그와 마주섰다.
아마도 그를 데리고 가서 술이라도 한 잔 사주고 좀더 그의 얘기를 들어 주는 것이 친절한 일이겠지만 그럴 정도의 금전적 여유도 없거니와, 그 정도까지의 성의는 사실 느낄 수 없었다.
  "그란데....몇 살이고?"
작별의 말을 주고받던 중에 그가 불쑥 물었다.

아무래도 그게 궁금하였던 모양이다.
나는 씨익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나이야 아무려면 어때."
그러나 그는 단지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내렸던 것이 아니라 내게 뭔가 당부하고 싶은 소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야단을 치듯이 늘어놓는 것이었다. 조심해야 된다이....사람들이....마음이 안 놓이서....
그렇게 뭔가 간곡하게 타이르더니, 갑자기 보고 있자니 답답해 견딜 수 없다는 듯 불쑥 내뱉는 것이었다.
  "이 쑥맥아!"

 


이런! 평소 남들에게서 한 수 아래로 접고 보는 대접을 받고 살았을 이 사람까지 나를 한심해 하다니, 내가 남들 눈에 꽤나 아둔하게 비치기는 비치는 모양이었다.
좀 어이가 없었으나,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의 호통에서 느껴지는 것은 분명 나를 향한 염려와 선의였으니까.
나는 다시 그의 어깨를 살짝 만지며 웃어 보였다.
  "걱정 마."
그와는 그렇게 헤어졌고, 그것으로 끝났다.

 

 


내게는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이 공연히 내게 접근해 오곤 하는 것이다.
실상 나는 무척 비사교적인 성격이다.

꼭 필요한 경우에는 사람들 앞에 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럭저럭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기는 하지만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을 진짜로 즐기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아무래도 편안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런 내게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꾸 말을 걸어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라는 인간의 어떤 면이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놓게 만드는 그런 특별한 힘을 갖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그런데 그렇게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어떤 공통점이 있다.

주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행려병자나 가출 노인들ㅡ그러니까 이번에도 그랬듯이 일반적인 사회 질서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는 사람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이 그렇게 내게 접근해 오곤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주인 없는 떠돌이 개들도 나를 보면 공연히 다가와서 뭔가를 기대하는 듯 코를 킁킁거리곤 한다.(실제로 그렇게 만난 개를 집에 데려와 키우게 된 케이스도 두어 번 있었다.)
요컨대 자본주의적 기준으로 보면 낙오자에 해당되는 이들이 주로 내게 접근해 온다는 얘기가 될 것이다.
이는 곧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가치가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증표일까?
표현은 그럴듯하지만 사실 저건 기분 좋은 얘기가 못 된다.
어떤 복잡한 메카니즘에 의해 내 폐쇄적인 성격이 저들에게는 반대로 친화력으로 작용하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저건 낙오자들의 공감이라는 소리밖에 더 되는가.

 


그건 그렇고, 실상 나는 지극히 단순한 인간이다.
사다리 타고 지붕 위에 올라가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좋아하고, 창문턱에 올라앉아 사과를 베어먹으며 무협지 읽는 것을 좋아하고, 우산 쓰고 비오는 숲을 산책하기를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그렇게 단순하고 감각적인 쾌락들이다.
거창하게 표현하자면, 나는 쾌락주의자다.

인류가 어떻고 세계가 어떻고 하는 거창한 문제들보다는 항상 내 내면의 평온함, 자기만족을 먼저 추구하는 이기적인 인간이 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놔 두고 하필이면 그렇게 이기적인 나에게서 편안함을 찾으려 드는 이들이 더러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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