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무협 무협소설 작가가 그닥 없는 내겐, '설봉'하면 '이재일'이 함께 떠오르곤 한다. 그리고 두 작가는 서로의 정반대에 서있는 기분이 든다. 내가 느끼는 설봉님은 정수를 꿰뚷는 직관력이 뛰어난 사람같고 반면, 이재일님은 감수성이 풍부한 산문시인같다.
우스개말이지만, A4용지 한 장 분량의 자료를 주고 '땀'에 관한 레포트를 자유롭게 써내라 한다면 설봉이란 작가는 딱 한 두줄-어쩌면 그냥 '땀'- 로 줄여 낼 것만 같다.
반면, 이재일이란 작가는 특유의 시적인 은유가 가득한 열 장짜리 글을 낼 것 같다.
그리고 나라면 꼭 한장으로 땀의 성분분석과 땀이 나오는 원인과.... 다섯 줄 쯤 읽다보면 스르륵 잠이오는 그런 레포트가 될 것 같다.
중요한 건, 한줄이건 열장이건 내 입을 벌리게 만든다.
전자는 '쩌억'하니 무릅을 탁 치게하는 생각도 못한 탄성으로 입벌림을...
후자는 '헤에'하니 땀이 아름답다가도 어느새 끈적거리고 때로는 경건하게 느껴지는 몽롱한 입벌림을...
이를테면 프로복서(ProBoxer)니까 훅, 스트레이트, 어퍼 다 능하겠지만 왠지 내게는 극단의 느낌으로 와닿는 두 작가.
둘 중에 나는 설봉님의 글을 좀 더 좋아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문체가 좋다.
설봉님의 글은 내 선입견에선 '이건 도무지 문학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문장이였는데 잇다보니 이런 글이 되네.'식의 적어도 이제껏 내가 봐왔던 문학들에선 느낄 수 없던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재일님의 문체는 구태여 비교하자면 이청준님의 글이나 그밖의 소설작품에서 볼 수 있던 익숙함이 느껴진다. 물론 그 소설작품들과는 달리 무협소설만의 아우라(Aura)가 담겨있을테지만 아직은 내가 무협에 관한 내공수위가 얕아서인지 그 향기를 잘 맡지 못하고 있다.
<수라마군>은 나에게 한... 80%쯤 되는 이상형의 소설이다. 80%는 나로선 굉장히 만나기 드문 수치이면서도 20%의 아쉬움이 남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나는 80%의 좋은점과 20%의 아쉬운 점을 따로따로 말하려한다.
[참고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한번쯤은 100% 이상형의 소설을 만나고 정말로 운이 따른다면 두번, 어쩌면 세번까지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한번의 만남마저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스치듯 지나치게 되고... 그만 나이가 들어 눈을 감을 때쯤에서야 '아...그 때 그 소설'하며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물론, 이참고는 고증되지 않은 뺑끼이므로 믿거나 말거나이다.]
<80%의 좋은점>
설봉작가의 작명감(感)이라던가 그만의 꼬기(퍼즐 혹은 수수께끼,추적), 시원시원한 문체, 하드보일드(마치 천길낭떠러지 벼랑 끝에 주요인물이 위태로이 서 있다면 나의 관습으로 당연히 기대하는 조마조마함이라던지 그런 감정에 아랑곳 없이 그냥 툭 떨어트려버리는 그리고 극한까지 가는 냉정함), 사실성(허구를 허구가 아닌 것 처럼 믿게 만드는 설정. 그것이 고증이거나 천재성이거나 노력이든) ,땀나는 액션(마치 10cm 옆에서 보는 기분. 광선이 나오지 않고 화려하지 않지만 그래도 박진감은 넘쳐흐르는) 는 이미 많은 지적들이 오간 것 같고 개인적으로도 그런 점이 좋다.
*언벨런스 혹은 역설적인 상황들...
<수라마군> 중반 쯤에 구귀(그는 주인공 곽삼. 용모는 팀버튼 감독의 '화성침공'에서 나오는 화성인에 가깝지 않을까 추측한다.)는 어떤 무인과 피할 수 없는 대결을 해야만 한다. 당시 구귀는 중독현상 때문에 무공을 제대로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여서 그 해결책으로 독약을 먹는다. 그리고 그 무인과 싸움을 한다. (이 때) 몰래 숨어서 이를 보던 제삼자(미림. 그녀는 곽삼의 부인이 된다)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온다'고 독백을 한다. ...정말 그렇다.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도무지 말이 안되는 무엇에서 결국 되버리는... 적어도 내가 이전에 봤던 컨텐츠에선 같은상황이라면 '당연하지(주인공이니까)'와 '정말 황당하군(코메디니까)'의 감정의 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설봉님의 글을 보다보면 나 또한 '기가막히긴 한데...' 뭔가 납득은 되는 쪽으로 가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도 언벨런스한 모습들이다. 구귀만 해도 그렇다. 이 세계관에선 구귀는 도저히 무공을 익힐 수 없는 기형아(구귀는 거의 화성인이다)인데, 어느새인가 절정고수가 되 있다. 그 과정에서 '당연'도 '황당'도 묘한 전개들, 이런 역설적인(그러나 우숩지는 않은) 상황들이 묘한 자극을 준다.
*점프컷의 역동감이 좋다.
설봉님의 문장은 대체로 무척 짧은 편이다. 나로선 세문장, 네문장 꺼리도 설봉님은 두단어, 한단어로 줄여 쓰실게다. 한단어 혹은 그런 단어의 문장은 함축적면서도 명쾌하기에 술술 읽힌다. 그렇게 술술 읽히면서 어느샌가 슬슬 점프컷 현상이 일어난다.
'A는 B를 칼로 찌르고 그래서 B는 죽는다'는 설정의 액션씬이 있다면 설봉님은 종종 '날아가는 칼'의 컷과 그리고선 전혀 다른 시간, 장소에서 인물들간의 짧은 대화로 B가 죽었음을 보여준다. <수라마군>에선 시도때도 없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A는 그때(그곳)을 생각했다(떠올렸다)식 혹은 보다 세련된 어떤 문체의 부연도 없다. 앞 씬(혹은 컷)을 건너뛰고 곧바로 이어지는 상황이지만 직관력있는 문장은 금새 변화를 알 수 있게 한다.
글을 역동적이게 만들고, 독자인 나는 화면의 힘을 느끼게 된다.
*설봉 소설의 정수, 대사
설봉작가의 가장 빛나는 부분을 말하라면 서슴없이 대사치기를 말하고 싶다.
<수라마군>에서 인물들의 대사는 마치 종이 밖으로 튀어나와 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주 짧은 호흡의 대사이고 '웃으면서 말했다'식의 부연도 없지만 말하는 이의 목소리가 컬컬한지 갸녀린지 혹은 어떤 감정으로 말하는지 확연히 느껴진다. 심지어 화자의 얼굴도 그러지는 것만 같다. 적어도 대사치기에 있어선 오의를 터득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곽삼의 툭툭 내뱉는 대사-자칫 냉소로 비칠수도 있던-는 그의 황폐함과 순수함을 느끼게 한다.
<수라마군>에는 백미의 대사씬이 있다.
말하는 인물의 설명(A가 웃으며 말했고 B는 화를 내며 응수하고 이에 C는 침착하게 말렸다.)이 전혀 없이 반페이지에 가깝게 대사만 주고받는다. 그럼에도 누가 어떤 감정으로 말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글의 속도감과 몰입감 그리고 재미 이상의 뭔가를 느끼게 해준다.
그의 다른 소설 <천봉종왕기>에서도 최고의 대사씬이 있던 것 같다.
책의 마지막부분에선가, 집단의 정점에 있는 두 인물이 일종의 '외교' 혹은 '교섭'을 벌이는 씬이 나오는데 둘은 마치 서로 싯구를 주거니 받거니 읇조린다. 하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고도의 심리전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80% 좋은점의 나머지 것들은 짧게 말해야할 것 같다.
*<수라마군>에선 잔가지가 될 만한 상황들-만약, 내가 작가라면 저기선 재밌는 에피소드를 만들고 싶은 유혹이 될만한- 이 무척 많다. 설봉작가는 글의 핵(核)을 아우르는 무엇이 아니라면 다 털어린다.
그냥 정수(정상)를 향해서만 묵묵히 그리고 곧바로 걸어가는 느낌이 든다. 이거야 말로 상업만을 바라는 혹은 유혹에 약한 모습이 아니여서 적어도 나에게는 이상적인 작가의 모습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설봉을 좋아하게 만든다.
*살수(킬러)하면 냉혹함이 나는 떠오른다. 곽삼은 살수(킬러)이다. 그가 출행을 다녀와 가장 처음으로 들리는 곳은 윈저의 무덤이다. 거기서 누구에게도 털지 않은 독백을 놓는다. 그리고 나는 아, 그도 인간이구나싶은 마음이 들며 곽삼에게 끌리게 된다. 비슷한 경우를 뤽베송 감독의 '레옹'에서 볼 수 있다.
레옹은 킬러(살수)지만 우유를 즐겨먹고 난초를 키운다. 두 가지 아이템이 킬러인 레옹을 인간처럼 느끼게 해준다. 우유를 먹는 모습에선 어린아이같은 동심을. 정성스레 난초를 닦는 모습에선 인간미를.
인물 표현에 있어서 그의 섬세함을 엿볼 수 있었다.
*<수라마군>에선 선악의 구분이 없다.
극중 악역인 사마소마저(훤칠한 외모,재능 그리고 권력욕) , 그가 놓인상황에서 풀어내는 방법들이기에 그것대로 공감이간다. 선으로 정의되는 정도문파도 왠지모를 비정함이 느껴진다. <수라마군>에선 상대적인 선악이 존재한다.
<20%의 아쉬운점>
*단어 사용의 기준이 모호할 때가 있다.
<수라마군>을 읽다보면 사전으로도 찾기 힘든 단어거나 기존 명사형단어의 한자(漢字)를 교체해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는 용어들이 많이 눈에 띄인다.
아마도 명쾌하면서도 함축적인 문장을 위한 의도적인 배치라 생각한다. 실제 작가의 안배인지 문맥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잘 돌아가던 비디오테잎이 톡톡 튀는 것 처럼 통 알 수 없는 단어와
글의 분위기에 왠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간간히 눈에 띄인다.
어떤 한자성어는 오히려 극적인 상황을 희극으로 바꾸는 것 같아 다른 단어로 바꾸면 더 낫지않을까 아쉬워한다. 한편, 행동상의 어떤 단어, 사물을 지칭하는 용어들은 도저히 의미를 알 수가 없고 괜히 궁금증이 치밀어 눈을 옮기지 못하게 한다.
내 어휘력의 문제이거나 작가가 작업에 몰입하여 간간히 본신무공이 드러나는 경우 일 수도... 그저 간솔한 투정이지만 내 입장에선 삐죽 나온 코털처럼 보인다.
*설정상의 착오들..
이것은 너무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아서. 말하자면, A는 파란옷을 입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빨간옷이였네. 그런데 언제 갈아입은거지?
<수라마군>에선 옷 갈아입는 씬이 없는데 벌써 갈아입고 나오는 상황들이 참 많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화해도 그 큰 응어리가 어찌 풀렸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한다.
이런 장면들은 잘 그리나가던 8등신의 미스코리아였는데 왠지 목이 4cm네 하는 마음이 들게한다.
지금의 <수라마군>은 코털이 삐죽 나오고 목이 4cm인 8등신 미녀를 연상케한다.
*아이템의 사용(가장 아쉬운 점)
설봉님의 소설 속엔 기발한 아이템과 복선, 열쇠(Key)들이 무수하다. 그 중엔 작가의 의도도 있을테고 그냥 그 자체가 매력적이여서 독자 저마다 그리 느끼는 부분도 많을 거다.
<수라마군>에서의 천하보주 '하돈'만 해도 그렇다. 그는 정도 문파인이고 극 속에선 단 두번 등장하지만 느끼기에 사마소보다 더욱 대립적인 인물 같고 곽삼과 더불어 가장 강할 것 같은 무인이다.
내 생각엔 아주 훌륭한 아이템이지만 글 속에선 더이상 쓰이지 않는다.
<남해삼십육검>에서도 '늑대'는 주인공과 여주인공을 이어주는 끈(그것도 뭔가 희미한 느낌)일 뿐이다. 나는 늑대가 어떤 계기 혹은 전환점을 주는 아이템으로 쓰였으면 바랬지만 늑대는 그냥 늑대였을 뿐이다.
설봉님의 글 속엔 아이템이 참 많고 그 중엔 사용되지 않고 묻히는 것들도 많다. 복인지 화인지는 모른다.
***결론으로, 무엇보다 이런식의 아이템사용에서 가장 큰 아쉬운 점이 있다.
<참고> 이영도의 소설 <드래곤라자>
-'마법의가을' 은 드래곤라자의 시작과 끝이다. 그리고 글 전체를 내내 흐르는 환상적인 '강'이다.
가이리치의 영화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낡은 장총' 처음 부터 계속 보인다. 그러나 참 사소하게 느껴진다. 결말에 와선 처음부터 쌓여왔던 모든걸 '낡은장총'이 일소에 풀어버린다
전제에 밝힌바 있듯이 설봉님은 핵(核)을 관통하는 직관력이 탁월한 작가이다. 그런데, 글을 다 읽고나선 그 핵이라 할만한 무언가가 기억에 남지 않는다. 적어도 핵이라는 부분에 있어선 작가 설봉은 여타 작가들보다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고 마지막 완성을 앞둔 '심득'의 과정에 있는 듯 하다고 생각하기에..
그 점이 그에 대한 큰 아쉬움이면서도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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