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한상운
작품명 : 무림사계
출판사 : 로크미디어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너무도 여러 겹의 마음을 가진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나는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흰꽃과 분홍꽃을 나란히 피우고 서 있는 그 나무는 아마
사람이 앉지 못할 그늘을 가졌을 거라고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쳤을 뿐입니다
흰꽃과 분홍꽃 사이에 수천의 빛깔이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나무를 보고 멀리서 알았습니다
눈부셔 눈부셔 알았습니다
피우고 싶은 꽃빛이 너무도 많은 그 나무는
그래서 외로웠을 것이지만 외로운 줄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 여러 겹의 마음을 읽는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
흩어진 꽃잎들 어디 먼 데 닿았을 무렵
조금은 심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 복숭아나무 그늘에서
가만히 들었습니다 저녁이 오는 소리를
도발과 기괴로 대표되는 한상운의 글들은 제 취향에 맞지 않을 거라고 그저 지나치며 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관심을 끊을 수가 없어서 어떤 글이 나왔는지 소개와 감상만은 읽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무림사계가 완결되고 올라오는 감상들에 마음이 동하고 동하여 이 글이 너무나 읽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웃게 되었다.
장경이라는 이름의 깜짝 출연, 하필이면 천살성이라니...
친분이 있는 모양이구나,
유쾌한 출발.
그 후로도 읽는 내내 간간히 터지는 웃음.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분위기에서 예상치 못한 비틀림으로 유발된...
하지만 인상적인 것은 웃음이 아니라 비틀림이다.
등장하는 인물 개개인은 모두 어딘가가 비틀려 있다.
주인공 담진현은 물론 석방평, 이운낭, 이달, 이지하, 왕왜호, 조요성, 소조귀, 위렴, 최근영, 손서시, 배상훈...
일견 전형적 인물이라 생각할 수 있는 이들이 지닌 의외의(그러나 그 자신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행동원칙 덕분에 예측할 수 없게 전개되는 이야기.
일인칭 주인공 담진현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나 그에 연루된 모든 이들은 담진현의 세상을 살아가는 들러리가 아니라 자신만의 욕망과 의지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간다.
그래, 누구에게도 인생은 농담이 아니다.
칼끝에 목숨을 얹은 채 무림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하물며 그들이 살아가는 무림은 낭만과 풍류, 의협으로 대변되는 세계가 아님에야...
무림사계의 강호는 폭력과 죽음과 음모로 뒤덮인, 존재의 이유를 붙잡고 생존을 위해 몸부림칠 수 밖에 없게 하는 세계.
그런데 이 무림 또한 묘하게 비틀려 있다.
치열, 살벌, 음험한 이 무림의 어느 구석구석에는 의리와 정의와 희생과 연민이 흩뿌려져 있는 것이다.
그에 춥고 어둡고 아픔에도 그저 냉막하고 참람하지만은 않은 무림의 사계에서...
작가 한상운을 만났습니다.
글 곳곳에 그가 너무나 많이 보였습니다.
읽으며 종종,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담진현과 많이 닮아 있겠지요. 그리고 많이도 다르겠지요.
배상훈과 또 다른 인물들과도 군데군데 닮아 있겠지요.
제 착각일수도 있겠으나 그를 조금은 알 듯합니다.
나이 서른 하나(작년에 출간되 글이니 지금은 서른 둘?)의 잘해 보겠다고 애썼으나 잘못된 일이 많은,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수줍은 많은 청년이지 생각합니다.
또한 어려서 무엇인가 결여 되어 마음 주렸던, 그를 갈구함에 다른 무엇인가는 유여하게 된, 말재주보다 글재주가 훨씬 뛰어난(뛰어난 글솜씨에 비해 말재주가 현격히 떨어져?) 마음 속에 담은 이야기를 말로 전하지 못하고 글로 풀어낼 수밖에 없는 섬세하고 생각 많은 분이지 싶습니다.
그리고 현실이라는 강호에서 이웃(?)이라는 강호인과 부딪치며 살아가는 분일 테고요.
그래서 그가 그려낸 무림사계의, 악덕함에도 착한(최후의 양심을 잃지 않음이 서글픈 자기위안이나 변명이라 할지라도) 짐승들이 살아가는, 무정하고 비정함에도 유정한 구석이 눈부신 강호가 이토록 현실적이고 생생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저와는 참으로 많이 다른 1인칭 주인공 담진현에 깊이 동화되어 주변인물들을 이해하고 보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마음 깊은 어딘가가 간지럽습니다.
닥터 피쉬에게 각질을 뜯기는 듯, 스파클링 와인의 기포가 터지는 듯...
긁을 수도 누를 수도 없는 곳이 들썩입니다.
상처에 과산화수소 희석액을 부은 듯이 저 깊은 어딘가에서 보글보글 기포가 끓어 오릅니다.
있는지 몰랐던 무언가가 그리 솟아 톡톡 터져 나갑니다.
햇살이 너무나 눈부져 터질 수밖에 없는 비눗방울처럼...
복잡하기 그지 없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에 섞었음에도, 개개의 삶이 그 본질을 잃지 않고, 전체의 맛을 흐리지 않도록 이리도 절묘하게 버무릴 수 있구나 하는 경탄을 자아내는 작가 한상운을 만나 즐겁습니다.
저리도 모순된 세상과 사람과 삶을 이리도 맛깔스럽게 양념해 낸 그의 솜씨에 책 한 권을 읽은 감상조차 제대로 정리해 낼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한 자괴를 지울 수 없지만, 그래도 기껍습니다.
그의 전작들을 굳이 찾아 볼 생각은 없습니다만(물론 만났음에도 피해갈 생각은 더더욱 없습니다.) 앞으로 나오는 그의 글들은 놓치지 않고 읽으려 애쓰게 되겠지요.
아무래도 이제 저는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며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는 이의 마음으로 한상운이라는 복숭아나무가 피워내는 수천 가지 빛깔의 꽃들을 해마다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멀리로 멀리로만 지나치던 그 복숭아나무 곁으로 다가가, 사람이 앉을 그늘이 아니라 여기던 그늘에 앉아, 수천 가지 빛깔의 복숭아꽃이 피는 것을, 그 꽃잎들이 눈부시게 떨어져 날리는 것을 넋 놓고 보게 될 것 같습니다.
노파심에 붙이는 말.
위의 시는 나희덕 시인의 시입니다. 제가 직접 쓴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은 없으시겠지만 혹여나...
22개월 만에 감상란에 글을 남기려니 쑥스럽네요. 역시나 그리 생각하시는 분들 없으시겠지만, 국가의 부름에 충성을 외치다 온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말씀.
쪽지 확인 아니 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쪽지함 확인 좀 해 주십사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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