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수부타이
작품명 : 벼락대제
출판사 : 마루
어제는 좀 심란하고 슬픈 이야기를 했으니 오늘은 대신 즐거운 이야기를 좀 해보죠. ^^ [하지만 네타 약간 있어요.]
주인공이 이계로 넘어가서 총기를 생산한다. 이 문장만 놓고보면, 어느새 국가 정권을 장악하고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해 승승장구해나가는 주인공이 떠오르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느새 이런 병(?)을 앓게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무공이 센가 마법이 센가? 주인공이 무협에서 판타지로 넘어갔으면 무공이 쎕니다. 판타지에서 무협으로 넘어갔으면 마법이 쎄죠. 요즘은 무공 쪽이 대세가 되는 경향이 강합니다만...
사실 개인적으로 내공을 익히면 더 세다는 공식 자체에 불만이 있습니다. 내공수련은 원래 기공을 익혀서 신선이 되려고 하는 것이지, 무공이 세질려고 하는게 아니죠. 검기 검강 안나오는 김용 무협지가 그립군요. 오절이나 풍청양, 무명승 같은 고수들이 다른 무협지에 나왔으면 검강에 이기어검에 장난 아니었을텐데...장력에 무슨 색깔이 있거나 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건, 주인공이 하는 일은 무조건 잘된다는 공식이겠죠. 무공도, 주인공이 익히기 때문에 세다고 설정되는 거겠죠 사실은.
하지만 벼락대제는! 총에다가 다마스커스강으로 칼까지 만들어놓고도 쪽박을 찹니다. 아니 어떻게?! 납품을 할려고 수천 골드를 빚져서 만들어놨더니, 왕이 워낙 똑똑한 인간이라 사거리가 짧다던가 제작 단가가 비싸다던가, 단점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주인공도 인정합니다. '그 말이 맞군.'
총만 만들어놓으면 뒤떨어지는 문화권 사람들이 '혹'해서 모실거라는 착각을 했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하고 통탄을 하죠. 독자인 제가 다 움찔할 이야기였습니다. 그 세계의 평민이나 하층민들은 다른 작품의 환타지 세계 주민들처럼 '아이구야' 하지만, 귀족이나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인물들은 '다단계' 같은 부분에서는 속으면서도 (현대인도 속는 얘기니까요 사실...) 무기 같은 실질적인 분야에 대해서는 턱이 빠질 정도로 놀라고 감탄하면서도 잘 속지 않습니다. 식견과 사고수준이 있다는거죠.
사실 중세를 떠올려보면, 현대의 우리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지식을 쌓고있지 못하다 뿐이지, 공부하는 기간이나 그 양으로 따지면 딱히 못하다고도 할 수 없는게 그 시대의 공부죠. 중세만 되도 수학이나 화학, 물리학 같은 막연하게 현대인이 훨씬 뛰어날거라 속단하는 분야까지도 상당히 발전되어 있고요. 사실 정작 근대에 와서 발견된 전문적인 과학이나 수학의 발전 같은 것은 전문가가 아니면 이름 정도만 알 뿐이지 않습니까? 지금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역학도 뉴턴역학이죠. 대학교가도 기본은 마찬가지고요.
벼락대제의 주인공은 무슨 내공을 익히거나 하지도 않아서 개인 무력이 절대강자인 것도 아닙니다. 템빨로 싸우기도 하고...소드마스터의 오러소드의 사기(?)를 간파하거나 헬파이어 마법의 비밀을 밝혀내거나 하는건 멋졌습니다. 실제 중세때는 과학을 잘 몰랐기 때문에 그것이 마법이라는 이름으로 전래되어오기도 했죠. 마법이 아니라는걸 알고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겠지만 어떤 특별한 약품 같은걸 다뤄서 결과를 얻고는, 화학이나 그런 원리를 몰라서 마법이라고 여기는, 그런 점도 잘 표현되어 있고...하지만 결국 그런 이유로 환타지 세계를 깔보다가 한번 쪽박을 찹니다. 그 이후에야 정신을 차리죠.
그런 점이 자세하게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이 대단했습니다. '그래봤자 이계깽판물이지' 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깽판물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먼치킨은 아닙니다. 세계 전체가 주인공을 도와서 움직이는게 먼치킨이라는 말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녹정기의 위소보 같은 인물이 오히려 먼치킨일 수도 있다는...그런 입장에서 봤을때 벼락대제는 매우 현실적인 소설입니다. 전문가가 봤을 때 코웃음칠 내용이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웃고나서는 그냥 재미있게 볼만한 소설이라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본인이 별로 전문가도 아니면서 '이런 것은 전문가가 보면 우스울 뿐이야' 라는 그럴듯한 말을 하며 책을 폄하하는 태도가 더 전문가의 눈으로 보았을 때 웃음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봅니다. 저 같은 경우, 전자음악과 컴퓨터에는 전문가라 할 수 있고 혹은 약간의 전자나 자연과학쪽 지식에 있어서도 식견은 있는 정도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트랜스포머를 보면서 웃기고 한심해서 못보겠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트랜스포머 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영화에서" 컴퓨터 해킹하는 화면 같은거 보면 정말 말도 안되게 웃기죠. 해킹을 하는데 그래픽으로된 화면이 왜 나옵니까? 기밀이 GIF나 JPG 파일, 아니면 PDF로 되어있나요? 시그널과 정보 분석을 왜 3차원 그래픽으로 하나요? 혹은 연구실에서 세포 같은거나 위성사진 분석하는데 쓰이는 시스템, 쓸데없이 그래픽이 뛰어납니다. 막 사운드 효과까지 있고요. 무한대로 확대가능하고요. 그런 프로그램에 무슨 효과음이 필요하죠? 게임도 아닌데. 하지만 영화를 보는데 그게 거슬려서 못보겠다 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죠. 그건 관객의 몰입도를 증가시키는데 필요한 것이니까요. 전문가는 그게 오히려 몰입에 방해가 될 수도 있지만, 일반 관객에게 얼마나 그럴 듯해 보이는가가 사실 더 중요하죠.
너무 말도 안되서, 이것은 보는 사람한테 완전히 사기치는 것이다...이런 느낌이 드는 경우에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정도면 괜찮다, 보는 사람에게 그럴 듯하게 보이기 위한 장치다' 라고 할만한 것과 완전 사기치는 것과 그 [경계선]을 따지자면 참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벼락대제에 있어서는 그런 논쟁이 절대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대체로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고 있고, 경계선에서 절반 이상 안쪽에 들어와있는게 확실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내용이 그럴 듯해도 '주인공이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또 좋아하지 않는 분도 계신데, 주인공의 총화기나 무기 관련 지식이 지나치게 많아보이지만 일반 학부생 수준이 아닌 매니아의 지식을 가진 배경도 잘 설명되어있고, 내공이나 마법을 익히기도 요원합니다. (사실 그런게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우리 세계에 존재했던 '마법'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직 지식이 부족해 원리를 몰라서 신비술의 탈을 쓴 화학이나 자연과학이란 말이죠.)
무기 기술이 너무 뛰어난 점은 있지만, 칼에 있어서는 주인공의 기술과 버금가는 장인이 없지는 않고, 총화기는 상황에 따라서는 석궁 등의 무기를 반드시 압도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총이 있다고 해서 막 수백배의 적을 학살할 수는 없다는 거죠. 결국 주인공의 가장 큰 무기는 머리인데, 제갈량이 아무리 똑똑해도 위를 못이겼듯이 현실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주인공이 당하는 것을 보면 매우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일단 무력이 딸려서 -ㅅ-;
그리고 벼락대제가 가장 뛰어난 점은 스토리 진행이 자연스러운 점이죠. 뭐 한상운님 같이, 능청스러울 정도로 '엽기적이고 의외인 상황임에도 극도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경지는 아니지만...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정체됨 없이 스무스하게 이어지는 정도만 해도 보통 솜씨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벼락대제 3권 마지막은 놀라웠습니다. 3권 후반부를 발을 동동구르면서 봤는데, 다행히 절단신공 이전에 속이 확 풀리더군요. (또 반전이 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이계에서 괜찮은 조건으로 시작을 해놓고도 쪽박을 찼지만, 결국엔 대제(언제쯤에나?;;;)가 될 주인공을 같이 만나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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