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한국 창작무협 사상 최고의 데뷔작을 선보인 작가는 누구일까? 라는 질문을 누군가가 내게 한다면 나는 주저 않고 "운곡", "등선협로" 라고 말할 것이다.
"등선협로"
과연 이 작품이 데뷰 작가의 손에서 쓰여진 글이 사실일까? 라는 의문과 함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감탄(정말 잘 쓰는구나!), 질시(하느님의 교묘한 안배에 대해...), 부러움(왜 내게는 저런 능력이 없을까?), 행복(으! 이렇게 뛰어난 작품이 내 손에 있다니!) 그리고 다음 작품에 대한 엄청난 기대였다.
"표변도"
작가를 모른 채 이 글을 읽는다면 과연 이 작품과 "등선협로"의 작가가 동일인임을 유추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정말 극과 극이 아닌가?
뚜렷한 주제의식, 무거움, 진중함, 강렬함으로 대변되는 "등선협로", 비해서 음담패설과 화장실 유머가 난무하고, 진중함보다는 가벼움으로 치달리는 "표변도"
아마도 내가 올린 글을 한번이라도 읽어 본 분들은 쉽게 알 수 있듯 나는 장경의 열렬한 추종자이다. 그의 명성과 작품이 주는 무게감 만큼 나는 진중한 무협, 무거운 무협을 선호한다.
해서 가벼운 무협은 극도로 싫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표변도"의 작품성향을 따지자면 분명 내가 싫어하는 성격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표변도" 7권 모두를 재미나게 읽었다.
"표변도"는 분명 작가의 의도대로 가벼운 글이다. 물론 주인공은 엄청 무거운 인물이지만...
그러나 요즘 우후죽순 등장하는 가벼운 글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오히려 그 글들과 비교하자면 무겁기까지 하다.
신선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개연성 부족, 구성의 산만함, 무협적 요소의 결여, 말장난으로 일관함으로서 용두사미로 끝나는 대개의 신무협판타지에 비해서 일관된 구성, 충분한 개연성 설명 등. 이 모든 것을 두루 갖추고 있으며, 음담패설이 난무하지만 저질의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음담패설을 설명함에 있어 작가의 방대한 성지식과 위트를 엿볼 수 있다.
끝으로 결말부분의 하나의 몸에 여럿의 영혼이 깃든다 는 설정도 재미있다. 마치 "등선협로"의 결말을 연상시키며 가벼운 글, 무거운 글을 종횡으로 누비는, 전혀 다른 성향의 두 작품이 자신의 글임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것 같지 않은가?
각박한 현실 속에서 가벼운 무협소설들로 굳어진 어깨를 풀어주고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보다 진중한 무협소설로 생활에 자극을 받고 싶어질 때도 있다.
만약, 그대가 후자라면, 나는 망량도의 신들린 듯한 칼부림과 서기영의 따사로운 미소가 살아있는 "등선협로" 를 찾아보길 권한다. 그러나 전자라면, 나는 숨막히는 암내를 풍기는 피 흘리는 마녀 서소향과 팅팅불은 몸에 잔머리 굴리는 덴 기가 막힌 진금행의 요악스런 미소가 살아있는 "표변도"를 찾아보길 권한다.
2003년은 무협작가 운곡에게 커다란 개인적인 아픔도 있었고, 육체적으로도 고난이 있었던 한해가 아닌가 싶다.
2004년에는 좋은 일만 생기길 희망해 본다. 오래 끌어왔던 "표변도"도 완결이 되었고, 무엇보다 "고무림" 식구들이 엄청 기다리고 있는 준비된 대박 "세하유"가 있기 때문이다.
"세하유"를 볼 수 있는 날이 가급적 빨리 오길 진심으로 바래 본다.
항상 우리 독자들을 위해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이 땅의 모든 무협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덧붙여 "고무림" 식구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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