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받은 걸작이라는 소리가 있다.
이 등선협로는 저주받았다는 말로 설명되어질 수는 없고, 실패한 걸작이라는 평가가 현재로서는 가장 적확하다는 느낌이다.
그럼 왜 그런가를 이제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전체를 살펴보기 이전에 등선협로가 과연 잘 쓴 글인가?
아니면 그저 그런 글인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미 위에서 말했듯 실패한 걸작이란 말에서 보듯, 이 등선협로는 매우 잘 쓴 글이다.
실패 했다는 것은 글 자체를 못써서가 아니라, 그 방법론에서의 잘못에서 기인한다.
이것은 글을 처음 쓴 작가 운곡과 그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편집부 양쪽에 다 책임이 있지만, 실제로 책을 출판하면서 그 책의 양식을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작가의 책임이라 출판사에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이 글을 조금 더 읽기 쉽도록 다듬을 수 있게 조언을 아끼지 말았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남아서 출판사 편집부에 딴지를 거는 것이라고 해야 할 정도랄까.
그럼에도 이 글이 잘된 글이라는 점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사방 곳곳에서 번뜩이는 재치.
그리고 작가의 해박한 지식이 드러나는 수많은 전거(典據)에의 인용들까지 그는 작가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 수많은 인용들을 보면서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과연 나라면 이렇게 쓸 수 있을까?
한참 고민을 해 본 결론은... 없다였다.
물론, 운곡이 예를 든 문장들이나 또 그 전거들은 본인이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고 출처도 거의 기억이 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보면서 그렇게 기억나고 아는 것과 글을 쓸 때 바로 떠올려 쓰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아마 내가 그렇게 쓰려면 한참 골머리를 싸맨 채로 어디서 봤더라? 하면서 주변의 자료들을 뒤적거려야 했을 터이다.
물론, 작가인 운곡 본인도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서 모든걸 썼으리라고 믿기진 않지만(만약 다 기억하고 찾아보지 않은 것이라면 그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천재일터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읽어 본 기억 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것을 쓸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읽었던 것들을 글에다 덧붙여 용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운곡의 등선협로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런 글이 왜 실패한 걸작이라고 이야기 되어야만 할까?
바로 작가 스스로의 글이기만 하여 독자를 감안하지 않은 까닭이다.
일필휘지, 원고지가 좁다고 타자를 쳐댄 그 필력은 드높지만 독자들이 단 한 곳도 빈곳이 없게, 개행 한 줄도 없이 글로 전체가 가득찬 책의 페이지를 보면서 생각할 아득한 절망감과 지루함을 감안하지 않은 것은 작가의 횡포이고 오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점은 그의 말을 들어보면 일견 이해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는 너무나 한심한 내용들, 너무 말초적인 내용들만 판치는 지금의 무협에 너무 식상하여 머리를 쓰면서 읽어야만 할 글을 쓰고 싶었다는 볼멘 항의를 하는 것이다.
그의 이 항의는 어쩌면 지금의 무협세계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근일 중 웹진 무적에 글 한 편이 올라 갈 예정이다. 본인이 거기서도 말했듯 현재 인기를 얻은 통신무협들의 대부분이 전체를 아우르는 도도함보다는 그 순간순간을 재치로 넘어가는 다분히 말초적인 성향에 기대는 경향이 심한 편이다.
대의를 위하기 보다는 나를 먼저, 협(俠)을 생각하기 보다는 나에게 돌아 올 이(利)가 무엇인가를 먼저 따지는 그 냉철함(?)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2월 중 모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협이 무엇이라고 생
각하느냐?"는 질문에 한 나의 대답은 아래와 같다.
길을 가다기 덩치 좋은 불량배에게 당하고 있는 약자(여자라도 좋고 남자라도 좋다)를 보고, 도저히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자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보고 참견할 수 있는 마음이 협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손해가 될 것 같으면 하지 않는 마음……
이타(利他)가 아니라 이기(利己)가 팽배한 사회가 바로 오늘날의 이 썩은 정부와 사회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 썩은 정부는 교육정책마저 호도하여 오늘날, 자라나는 세대를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글을 읽어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상대를 죽일 듯 경원시하여, 포용의 도를 전혀 모르는 편협한 사람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만 간다.
통신상에서의 폐해는 바로 그러한 점에서 기인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세상이, 신세대라고 다 그렇지는 않다. 다 그렇다면 무슨 맛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말이 좀 다른데로 흐른 듯 하지만 작가 운곡은 이 한 편의 글 <등선협로>를 통해서 비쥬얼에 익숙하여 독해력마저 바닥으로 떨어진 신세대들에게 경종을 울리고자 발버둥치고 있음이 보인다.
왜 가벼운 글만을 보느냐고.
운곡의 시도가 좋은 것인지, 옳은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말 그대로 옳지 않고 내 몫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자신의 글에 메시지를 담는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리고 무협이라는 장르문학의 한계를 따져본다면 대세를 거슬리면서도 반골의 기질을 보이는 실험정신은 높이 살만 하다라고 생각한다.
장르문학의 특성상, 유행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가는 그 유행에 무조건 휩쓸려서는 안된다. 시류에 영합하면 결국 결말은 급격한 몰락이 남을 뿐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내일을 본다면, 오늘의 유행을 참고하여 내일의 유행을 창조해낼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운곡은 이 글에서의 실패를 거울 삼아 아마도 좀 더 나은 글을 써낼 수 있으리라고 보인다.
그리고 3권으로 가면서 이미 자신의 실수를 깨달아 글 읽기가 쉬워지고 내용도 훨씬 더 재미가 있다라는 것에서 그의 내일을 기대케 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결국, 이 한 편의 글은 실패가 아니라 내일을 위한 큰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이미 이 등선협로에서 이야기꾼의 자질을 보여주었으며, 그 가능성을 아낌없이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그의 내일을 기대한다.
단기 4335년 1월 해거름 연화정사에서 금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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