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여백지기
작품명 : 더 메신저
출판사 : 파피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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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월초의 출판사와 인쇄소 등의 휴가가 끝난 직후, <더 메신저> 6권과 7권이 함께 발간되었다. 꽤나 이례적인 일이다. 한편으로는 퀄리티 저하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어찌되었든, 7권에 적힌 -완결-이라는 단어에 혹하여 읽어내렸다.
<더 메신저>는 연재 당시 '문명의 전달자'라는 제목이었다고 했는데, 과연 그 제목대로 다른 세계의 문명을 이식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소설이다. 지극히 당연하게도 퓨전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는 이 소설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1.
<더 메신저>는 퓨전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다. 대개 퓨전 판타지에서 '퓨전'이라는, 차원이동 또는 환생이라는 소재가 활용되는 방향으로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퓨전'이라는 말 그대로 두 세계의 문화가 끊임없이 충돌 및 융화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개입 또는 해결을 위한 방편으로 단순히 차원이동이 하나의 소재로서 활용되는 것이다. <더 메신저>는 이 중에 전자에 속한다.
<더 메신저>는 기억을 잃지 않은 채 세 번의 생애를 살아가는 인물의 이야기로, 그는 본래 무림의 인물이었다가 리얼 월드의 한국 공군이었다. 판타지 월드에서 세이훈 폰 미하일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은 자신이 지닌 지식을 이용하여 세계를 점차 변화시키기에 이른다.
<더 메신저>에서 그려내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며, 그 사건은 '세계에 변혁을 가져오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저자가 표현하고자 한 '문명의 전달'이며, 그로 인하여 세계가 변화한다는 것으로 판타지 소설에 '퓨전'이라는 형식을 활용한 결과를 드러내었다.
2.
<더 메신저>는 퓨전 판타지로서는 충분히 모범적이라 할 만한 길을 걸었다. 리얼 월드에 존재했던 각종 소재들을 쏟아내어 판타지 월드와 융화시켰으며, 그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흥미를 자아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모범적인 탓인지, <더 메신저>에는 '충돌'이라는 과정이 누락되어 있다. 세계는 변화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명의 전달과 확산의 결과였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없으니, 결국 퓨전 판타지로서의 의미는 크게 퇴색될 수밖에 없다.
퓨전 판타지의 가장 큰 장점은 우리 문화에 대한 반성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우리의 문화가 다른 문화와 충돌했을 때(그것이 비록 가상으로 설정된 문명이라 하더라도) 어떤 변화가 이루어지며, 어떤 반성이 가능한가를 살필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다른 그 어떤 장르에서도 표현해낼 수 없는 거대한 장점이다. 즉, 타 문화와의 충돌을 통한 반면학습(타인의 잘못된 점을 보고 반성하여 옳게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 이르러야 퓨전 판타지의 가치가 극대화되는 법이다.
<더 메신저>는 문화의 전달을 통한 세계의 변화를 주제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충돌의 과정을 누락시켰기 때문에 스스로 가치를 떨어뜨리는 잘못을 범하고야 말았다. 세계는 분명 변화했지만, 그것은 독자에게 있어 단순한 흥미거리 이상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더 메신저>가 낮게 평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앞서 말한 바를 연장해보자.
<더 메신저>는 문명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전혀 충돌이 없었다. 이는 곧 주인공이 원하는 바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메신저>는 '문명의 전달자'라는 원제의 의미 그대로 문명을 끊임없이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주된 내용을 이룬다. 그러한 그가 실패를 모른다는 점은 소설의 진행에 치명적인 단점을 안겨준다.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문명의 단순한 전달이 진부해진다는 점이 바로 그 단점이다.
끊임없는 문명의 전달, 그리고 충돌이 없는 융화, 그것은 '문명을 전달하다'라는 대사건 이상의 그 무엇도 발생시키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 진부해지고 마는데, 이는 독자가 받는 흥미의 정도(또는 자극의 수준)에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적으로는 치명적인 문제라 할 수 있다. 소설은 본래 사건의 발단과 전개를 거쳐 절정과 결말로 독자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이나, 비슷한 수준의 자극이 반복될 뿐인 진부한 사건은 소설의 목적인 감동이나 교화 또는 흥미의 유발과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4.
저자 스스로 <더 메신저>의 이러한 단점을 자각했는지, 주인공은 목적했던 바인 세계의 변화를 이루어내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죽음을 위장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에 지루함에 빠진 독자를 붙잡고자 하였다.
공식적으로는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주인공은 검사 세이훈으로 살아가는데, 새로운 삶은 인간보다는 이종족의 편에 서서 이어나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인간과 삶의 방식이 다른 이종족이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종족의 편에 서서 인간을 고찰하기에는 지면이 부족했던 탓인지, 서술하기에도 바쁜 사건을 열거하며 진행된 7권은 용두사미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다. 인간에 대해 고찰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종족을 고찰하지도 못했다.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했다. 시도는 있었으나 피상적인데다 단순하기까지하여, 소설의 진행에는 무리가 없을지라도 독자를 납득시키기에는 크게 무리가 있었다.
기승전결 없는 단발성 사건의 열거는 고찰의 여지조차 제공하지 못했다. 인간의 모습, 이종족의 모습을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저자의 시도는 사건의 단순한 열거에 따른 개연성의 상실로 인하여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5.
<더 메신저>는 과연 소설이라 말할 수 있는가?
발단은 있으나 위기와 절정이 없고, 사건의 결말은 있으나 그것이 소설의 결말과 다르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서술자가 표현하는 인물의 내면은 지극히 피상적일 뿐이며, 인물의 내면에 대한 고찰보다는 외형과 행위에 집중하는 진행을 보였다. 소설의 진행은 개연성에 연연하지 않으며, 다만 인물의 시각과 인식에 전적으로 따른다. 또한 주인공의 일대기를 가장 크게 다루며, 오히려 그것이야말로 내용의 가장 큰 줄기에 해당한다.
<더 메신저>는 분명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의 탈을 썼을 뿐, 그 실체는 전기문에 더 가깝다. 세이훈 폰 미하일이라는 인물의 일대기를 다룬, '세이훈 전기'라고 불러 마땅한 글이다.
6.
'문명의 전달'은 분명 좋은 시도였으나, 그것을 이행하는 과정이 잘못되었다. 문명의 전달과 충돌, 그리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철저한 개연성 하에 다룬 글을 쓴다면 지나친 장편이 될 것은 불을 보듯 훤한 일이다. 또한 그러한 글을 쓰기도 결코 쉽지 않으며 오히려 아직 누구도 시도하여 성공을 거둔 바 없을 만큼 힘든 일이다.
힘들 수밖에 없는 주제에 도전하고 그에 실패를 거둔 저자에게 위로를 보낸다. 아울러 그러한 주제를 막연히 떠올리며 소설을 쓰고 있을지 모르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그 주제는 진정 어려운 것이라고.
덧. 제목에 '고배를 들다'는 '고개를 들다'의 오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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