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무협 작가 중에 이름높은 운중악님의 대표작
용사팔황.... 추천을 믿고 열심히 읽게 됐습니다.
무려 8권이나 되는 엄청난 대작이었습니다. 읽는 데
엄청 오래 걸리더군요.
이 작품의 백미는 단연 추격신입니다.
그 이상은 볼 것 없습니다만;;
무려 5권의 분량을 몇 개월에 걸친 추격신으로 꽉 채우는
대범함에 놀랐습니다.
주인공은 시철, 조부는 뇌정검이란 별호로 과거 무림의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절대고수였지만, 강호에 환멸을
느끼고 잠적해 버립니다. 그런데 나용문이란 작자의
일행과 시철일가가 얽히면서 이야기가 진행되고
마지막도 역시 시철과 나용문의 은원정리로 마감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추격신은 시철이 납치된 비밀단체에서
비밀임무를 띄고 6명을 추격하는 이야기죠.
이 에피소드 하나로 무려 5권이라니;;;
그런데 이 5권이 절대 지루하지 않습니다.
대가라는 김용이라도 절대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대륙에서 불모지라 할 수 있는 사천너머 서쪽 일대의 광활한
배경에 대한 풍부한 지식, 그곳 토착민에 대한 경험이 없이는
절대 쓸 수 없는 글입니다. 게다가 당대의 역사의 설명이
감초로 들어가고 각 지역에 걸친 사연도 줄줄이 풀어 나오는 데,
운작가가 그곳이 고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묘사가 탁월합니다.
아마도 이 용사팛황의 전 5권이야말로 무협사에 다시없을
백미라는 생각이 드네요.
오히려 시철의 활약과 성장, 그리고 영웅호협들의 인연은
뒷전이라 할만 합니다.
게다가 이 시철이란 놈이 지나칠 정도로 먼치킨이라서...
약관은 커녕 16살 먹은 놈이 어찌그리 약으면서도 능력이
좋은지... 한 번 가본 적도 없는 험지의 지형을 너무 속속들이
알고 대응하는 것이 개연성이 좀 많이 떨어집니다.
무공 또한 아무리 10년동안 익혔다 해도 강호의 절정고수와
겨룬다는 게 말도 안돼죠.
그저 소설의 흥미요소로 생각하면야 상관은 없죠.
특이한 것은 운작가가 내세우는 소설의 주제의식이 다분히
도가의 무위자연에 가까우면서도 대륙 특유의 중화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시철 녀석이 실력에 걸맞지 않게
지나치게 인정에 얽매임으로 인해, 호생지덕이 그 주제의식의
일면임이 드러나면서도 한 편으로 파탄을 드러내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그 호생지덕 또한 중원인과 오랑캐에 분별적으로
나타나니, 과연 시철녀석의 과도한 중화주의에 마음이 좀
답답한 측면이 있습니다.
또, 스무살도 안된 놈이 머리는 이리저리 굴리면서도
입을 열면 항상 대의명분에 치우친 소리가 나오고,
강호의 닳고 닳은 군웅들이 그 소리에 전향한다는 것도 뭔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5권 이후의 진행은 파양호에서의 엄가 부자의 금 5만냥
탈취사건에서 시철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역시 주제의식
때문에 갈등구조가 흐려지기에 전 5권보다는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이한 것은 영웅호걸들이 시철을 중심으로
뭉쳐서 간신 엄가 일족을 끝장내는 구조가 수호지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진 결말이기에
긴장감도 떨어지고 좀 허무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것도 주인공과 뭍 영웅들이 서쪽 험지로 잠적하는 결말이니...
전 5권과 비교하면 작가의 집중력이 조금 떨어진 탓인지
시철의 움직임에도 논리적인 파탄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꽁꽁 숨겨놓은 보물의 행방을 의심도 없이 생전 처음보는
사람한테 털어놓지를 않나...
시철의 강호행 자체가 뭍 명숙들이 시철을 키우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라는 점도 납득하기 힘들죠.
파양호의 뭍 군웅들을 모두 통제하지 않는 이상 시철부부의
목숨을 장담할 수도 없고, 실제로 부인이 잡혀가기까지 하는 데
말이죠. 그 후에도 민씨 일행을 통해 적을 기만하기 위해
계속 동행하는 와중에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과연 몇 사람의 친구를 희생해서라도 시철의 강호행을
도울 필요가 있었을지...
용사팔황을 보게 된 계기는 협의지도를 논함에, 이 작품이
항상 거론되기 때문입니다. 분명 시철을 통해 협의지도의
일면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것이 현대에도 통용될 협의지도
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철의 행동을 보면, 작가의
안배에 의해 교묘하게 정당화되긴 하지만,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대협의 광명정대한 행동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습니다. 시철의 무공솜씨가 나이에 비해 뛰어나지만
어린 용모를 통해 적들이 방심하면, 그 순간을 이용해
암기와 절세의 비수로 이득을 보는 순간이 한 두번이 아니죠.
격장지계를 쓴답시고, 상대를 도발했다가 나중에 사과하는
모습도 한 두번이 아닙니다. 이는 대협의 풍모가 아니라
여우일 뿐이죠. 별호 끝자리에 꼭 호리가 들어가야할 판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행동들이 시철이 상대에 비해 열세이고
위험한 지경이라는 상황에 의해 대의명분으로 흡수돼 버립니다.
실제로 상대가 두려워하는 것은 대의명분이 아니라 시철이
지닌 수단과 능력 때문이죠. 협도와 사도가 무엇인지
뒤죽박죽이 되고 결국 결말에 의해 정당화됩니다.
애초에 시철이 부부의 힘만으로 황금5만냥 사건에 뛰어든
자체가 큰 무리수를 내포하고 있었죠.
결국 무리수가 무리수를 낳는 악순환을 강호의 선배들이
나서서 진압하는 과정입니다.
게다가 한낱 필부지용 때문에 단신으로 적진에 난입했다가
낭패를 보는 것도 한 두번이 아닙니다. 낭패보기 직전에
상대가 아버지의 의형이라든가 친인의 지인이라는 식으로
단번에 해결되기도 하죠.
작가가 의도한 부분일지도 모르지만 시철은 대의명분을
논하기에 너무나 어린 나이입니다. 혼자서 뭘 이루기에도
한참 부족합니다. 이런 어린애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일대의 영웅들을 망신시키고 명성을 쌓아가는
과정이 강호의 악덕을 고발하는 차원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어린애조차 막지 못하는 강호무림이 별 것이 아닐뿐더러
그 안에 담긴 은원조차 헛된 것이라는 무언의 소리가
내재돼 있다고 봅니다.
협을 논할 수 없는 자가 협을 내세워 진흙탕 강호를
비판하고, 이 땅에 진정한 협의지도가 없음을 성토하는 것이
제가 본 용사팔황의 주제의식입니다.
희대의 간신역적을 벌하는 자리에 황제의 관인과 군사가
있지 아니하고 시철이란 어린이를 비롯한 강호의 무인들이
활개친다는 설정부터 작가가 중국역사를 바라보는
비판적인 의식이 노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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