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월광의 알바트로스
작가 : 김형준
출판사 : 뿔미디어
이 소설을 접하게 된 것은 우연히 작가님의 전작이 ‘일곱번째 기사’ 였다는 것과 이 소설이 시리즈물이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였습니다. 정확히는 시리즈물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제 식견이 짧아 아쉽게도 일곱번째 기사와 사자의 귀환은 읽지 못했지만 눈 앞에 놓인 이 책을 두고보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라 생각하고 전권을 들여왔습니다.
처음에는 되게 좋았습니다. 아니, 좋았다는 말로는 표현이 힘듭니다. 주인공의 어렸을 적을 보여주는 소설이 없진 않지만 이정도로 보여준 소설을 본 적은 단연코 없습니다. 대강대강 넘어가는게 보통인 배경을 세밀하게 묘사해주었을 뿐더러 등장 인물들 모두가 생생히 살아있는 듯한 느낌, 거기에 대부분의 소설에는 ‘성장의 발판’ 역할이 전부인 고향이 주인공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부분 출세를 위해 떠나면 부모님조차도 어느새 사라지는 소설들을 생각하면 정말 좋은 장치입니다.
마나를 사용하는 능력자가 아니지만 천부적인 노력으로 이 세계관의 기갑병기인 ‘랜드 워커’ 를 움직이게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정말 끝내줬습니다. 다른 소설에서는 노력─ 혹은 단련은 단기적이며 허무맹랑한, 주인공의 성장을 합리화하는 장치에 불과하지만 이 소설은 아니였습니다. 노력에 대한 묘사로는 ‘더 세컨드’ 이후로는 보기 힘들 정도의 필력을 보여줬습니다.
정말 보기드물 정도로 좋은 소설이였습니다. 네, 정말로.... 정말로....
이런 소설을 제목의 ‘알바트로스’ 가 망쳐버렸습니다.
1. 주인공 보정의 결정체. 전용기 알바트로스
이 소설의 최강병기인 랜드 워커는 아무나 움직일 수 있는게 아닙니다. 다른 소설로는 무슨무슨 엑스퍼트 쯤으로 칭할 수 있는 레벨은 되어야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고 그로인해 주인공은 어렸을 적부터 부단한 노력 끝에 이 랜드 워커를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알바트로스는─ 정식명칭 ‘NG01 알바트로스’ 는 다릅니다.
오로지 주인공만 움직일 수 있는 ‘전용 기체’ 에, 엑스퍼트 레벨에서도 상급 이상이나 움직일 수 있는 HP(High Power) 등급을 넘어선 최강 오브 최강에, 소설에서 20명 정도 밖에 없다는 ‘마스터’ 레벨의 인물만 발할 수 있는 오러 블레이드, 오러 웨이브, 오러 캐논 같은 최상급 기술을 난사할 수 있게 해줍니다. 그야말로 탑승 시에는 파일럿을 마스터급 능력자와 준한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문제는 이런 기체를 능력자와 비교하면 허접스럽기 짝이 없는 주인공조차 ‘아주 쉽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기죠.
2. 이유를 알 수 없는 옵션
뭣보다 세계대전의 붉은 남작의 패러디인지, 아니면 붉은 자크의 패러디인지 모르겠지만 이 기체는 원래는 황금빛의 화려한, 그야말로 의장용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겉외양도 간지가 작살나는 기체입니다. 그런데 전투에 돌입하면 왠지 모르겠지만 붉게 변합니다. 아니 왜 이런 장치가 필요한걸까요? 제가 본 기갑물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 중 순수 판타지 기갑물은 셋 정도인데 이 소설을 포함한 두 소설에 이런 패러디가 나왔습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알바트로스에는 이런 패러디가 ‘필요없습니다’. 알바트로스는 겉외양도 화려하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왜 붉게 변하는거죠? 혹시 그 화려한 외양에 대한 묘사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인가요? 아니면 그저 자기 만족?
뭐 여기까지는 그저 걸리는 문제였으니 별 상관은 없습니다. 제가 가장 의문스러워하는 것은 이 소설의 ‘제목’ 이기 때문입니다. 왜 ‘월광의 알바트로스’ 인가요? 이 소설에서 ‘월광’ 이라는 요소가 강조된 것은 단 한 번. 노아 그린우드와 골드게이저를 만날 때 ‘가장 큰 만월’ 이라는 언급 뿐입니다. 그 이후 이 알바트로스는 월광을 뒤로해서 폼나는 기동을 발휘한 적도(있을지도 모르나 크게 언급되진 않았습니다), 월광을 통해 버프를 받은 적도, 이벤트를 겪은 적도 없습니다. 그냥 ‘붉은 알바트로스’, ‘피의 알바트로스’ 라는 명칭이 전부입니다. 이럴거면 ‘영광의 알바트로스’ 라던가 ‘창공의 알바트로스’ 가 더 나았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3. 위대한 초월자의 유산
이런 사연의 알바트로스는 마나 한 점 없는 주인공 앤드류 워커에게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반응하고 그 어떤 수를 써도 자신의 내부 기관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쿨시크의 결정체.... 그런데 이런 알바트로스의 정체가 하이엘프와 어둠의 여왕을 통해 드러나게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 녀석이 이 시리즈의 이름에도 발을 걸친 드래곤 ‘지스카드의 심장’ 으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완전히 주인공 밀어주겠다고 작정한 설정이죠.
무려 초월자 님의 심장입니다. ─정확히는 1만년에 한 번 만들 수 있는 에너지 결집체지만 말이 1만년이지 랜드 워커가 아니라 폭탄으로 만들었다면 세계가 날아갔을겁니다. 세 개의 심장 중 하나. 그리고 그 심장의 반절로 만들어졌다지만 일반인을 마스터급으로 만들어주는 놈이니.... 그런데 여기서 한 술 더 뜬 배포 큰 어둠의 여왕님의 보너스.
자기가 가진 하나를 더해 업그레이드를 해주시겠답니다.
....이건 파일럿이 트롤러일지라도 세계정복을 떠먹여주겠다는 여왕님의 은혜. 아무리 발컨이라도 초월자님의 1만 5천년이 깃든 랜드 워커입니다. 이건 멍멍이가 움직여도 마스터 따윈 손가락으로 바를 위엄입니다. ──랄까 물론 그렇게 세진 않습니다. 그냥 소닉붐을 일으킬 정도로 기체 성능이 올라갈 뿐입니다. 컨트롤이 안 좋으면 샌드백 신세고 내구도가 얼마나 셀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러 블레이드 맞아도 금도 안 갈 정도? 주인공이 허접한건지 작가님의 밸런스 조정인지, 아니면 주인공 말도 안 들어먹는 알바트로스의 자체조정인지 무쌍을 보여주진 않습니다. 무쌍을 위해선 주인공이 노력을 해야지요.
하지만 이 녀석의 기능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능력자가 아니였던 주인공이 두 마스터가 격돌할 때 그 중앙에 낀 후, 적편 마스터를 증발시킬 정도? 후술하길 ‘앤드류는 자신에게 맞는 마나가 없었다.’ 라고 합니다. 멋지군요. 기체빨로 무적인 파일럿은 봤어도 기체덕에 무적되는 파일럿은 처음입니다. 훌륭하군요.
4. 운명의 장난
거기에 이 소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운명’ 인데 이 운명이 참으로 우습기그지 없습니다.
초기에 뭔가 있어보이던 노아 그린우드는 주인공에게 운명을 언급하며 자신의 뜻에 따르길 종용합니다. 그렇게 그는 주인공을 알바트로스에게 인도하고 주인공은 그의 뜻에 따라 알바트로스의 날개(파일럿)가 됩니다. 그 후 마치 질질 끄는 것 같은 주인공의 내적 갈등과 혁명집단 ‘자유의 날개’ 의 이야기가 이어지고, 적들과 조우합니다.
그리고 그 적들 중 작가님께서 정체를 거의 대놓고 알려주시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주인공과 (스포일러) 인 관계인데 노아 그린우드는 ‘운명에 없었다!’ 라는 이유로 주인공과 적의 사이에 개입하고, 운명이라는 이유로 주인공을 자유의 날개에서 방출하고 적에게 경고합니다. 운명이 아니니까 다시는 접근하지 말라고.
물론 운명이라고 자기 뜻 막아세우는 현자의 말을 알아듣는 캐릭터는 장르 소설에 없습니다. 그대로 닥돌을 시전해서 스토킹에 가까운 추격 끝에 전투가 벌어지는데.... 후에 여러가지 전개가 지나간 후, 어둠의 여왕님께서 말해주십니다.
노아 그린우드가 주구장창 주장했던 ‘운명’ 은 모조리 노아 그린우드의 각본.... 간단히 말해서 이 분은 주인공에겐 ‘이대로 있다간 내 각본 무너지니까 여기서 나가렴.’ 이라고 말씀해주신거고, 적에겐 ‘넌 내 각본에 없으니까 꺼져.’ 라고 말씀하신겁니다. 이거 끝내주시는군요. 다른 식으로 본다면 독자의 뒤통수를 날려주신거지만 저에겐 그야말로 뜬금포였습니다. 그토록 주구장창 주장했던게 뒤통수.... 저에겐 ‘상황이 어렵게 됬으니 덮자.’ 라는 의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5. 생명을 잃어가는 캐릭터
이 소설은 캐릭터가 살아있습니다. 주인공부터 주인공 근처의 인물들은 모두 개개인의 사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의 사고는 확고하여 무너지지 않습니다. 다른 소설의 말과 행동이 다른 캐릭터와는 다르지요. 이건 완결까지 이어져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생명이 ‘주연’ 과 ‘준주연’ 급에 해당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장르 소설 특유의 문제이지만 다른 캐릭터들은 점점 생명력을 잃어갑니다. 알바트로스를 만든 중요인물인 골드게이저는 치매를 앓아가면서도 주인공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있었는데 월광 아래에서 주인공과 만난 후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도 죽었겠지만.... 나름 중요해보였던 인물로는 참 비참합니다. 그리고 ‘제이크 웨스턴’ 이라는 자유의 깃발 소속 라이더는 초반에는 강한 인물로 나왔지만 곧 마스터인 주인공의 의형에게 밀려나더니 ‘털털하고 무례한 성격’ 때문인지 억지에 가깝게 기량을 떨어뜨려서 ‘훈련’ 이라는 명목으로 등장 자체를 막아버렸습니다. 아마 이 캐릭터를 녹여낼 상황을 전개할 수 없고, 그렇다고 끼워넣긴 힘드니 이유를 몇 개 만들어 묻어버린거겠지요.
그 외에도 초기에 인연을 맺은 정치적 인물들은 후에는 정치적 상황 전개를 위한 대사 몇 번 뿐이고 주인공인 앤드류조차 사람으로서의 면모를 잃어가는 느낌이 풍깁니다. 소설에도 언급됬지만 마치 ‘싸움만 하는 기계’ 가 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주인공의 (스포일러) 도 확실하게 상황을 정리하지 못하고 뒷전으로 밀려버렸고 말입니다.
여기까지. 톡 까놓고 말해서 이 소설의 초기는 정말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말까지를 보아도 주인공의 스승인 요한 클라렌스는 상당히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요한 클라렌스나 스칼렛 알폰소 외에는 그다지 눈길을 가는 인물을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이 소설은 사상이고 뭐고 결국 알바트로스가 출격하면 드래곤이고 뭐고 모두 싹 쓸려나가는, 알바트로스가 등장한 처음 이후에는 마지막까지 살짝 페널티를 준 무쌍물에 가깝습니다.
처음의 모습을 보면 절대로 작가님의 역량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데.... 실망보다는 아쉬운 마음이 더 큽니다. 더욱 아쉬운 것은 시리즈물인 이상 이 소설에서 연계되는 이야기도 몇 있을텐데, 다음에 나올 소설에 나쁜 영향이 없었으면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곧 있으면 주문한 일곱번째 기사도 도착할테고 그때는 그 명성이 자자한 소설을 읽어볼 수 있을겁니다. 작가님이 후기에 몇가지 사정으로 전개가 이상해졌다는 언급을 하셨고하니.... 그 소설은 기대를 하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지려합니다.
Comment '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