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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Lv.16 Zinn
작성
09.04.03 00:08
조회
2,272

작가명 : 토돌

작품명 : 환수고교

출판사 : 시드노벨

토돌 님의 전작인 소년 연금술사가 가벼운 스타일의 글이었다면(제가 읽었던 2권까지에 한해서), 환수고교는 본질적으로 '무거운' 이야기이다. 주인공 현은 과학자이고, 그의 사고와 행동은 논리적인 이성에 의해 통제되며, 마법과 이능력이 판치는 세계관일지라도 갈등과 위기와 문제상황을 해결하는 것은 대부분 '과학'에 의해서였으니 말이다. 소년 연금술사에선 '연금술'이 주인공 데릭을 형상화하는 하나의 소재로밖엔 쓰이지 않았지만, 환수고교에서의 '과학'은 이 글 전체를 지탱하는 뿌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과학이란 무엇인가? Science 혹은 Modern Science. 먼 옛날 그리스에 탈레스란 철학자가 태어났다. 그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그때까지 만개했던 '신화'의 시대의 장막을 내리는 분수령이었다.

왜 해일이 일어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생기는 것일까? 이 질문에 탈레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포세이돈의 분노를 그 이유로 들었다. 그렇다면 왜 포세이돈은 노했을까? 그 철학자들은 이렇게 답변했다. 어떤 인간이 포세이돈의 신성한 영지, 즉 바다에 오줌을 갈겼다고. 그렇다면 그는 왜 오줌을 갈겼을까?

이런 연쇄고리는 끊을 수 없는 '사건의 연속'에 불과하다. 사실, 현대적인 시각으로 보기에는 이런 논리의 전개는 너무나도 '비논리'적이다. 자연법칙에 '신'이 개입되는 순간, 검증되어야할 가설은 '믿어져야 할 교리'로 뒤바뀌기 때문이다. 완전한 존재인 신이 그렇게 만들었다는데, 불완전하고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반론을 제기하겠는가? 즉, '신'의 존재는 과학적인 진리 탐구에 있어서 뛰어넘지 않으면 안 될 거대한 장애물이다. 그리고 탈레스가 이 '신'을 자연현상의 탐구에서 벗겨버린 것이고.

철학이나 과학이나 현상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학문이다. 탈레스 시기의 철학은 자연철학, 즉 오늘날의 과학과 동일했으며, 철학이 주된 방법론으로 삼는 형이상학의 그리스어는 metaphysica. 즉, physica(과학) 뒤에 오는, 과학과 밀접한 방법론이다. 근대의 과학혁명과 낭만주의를 거치며 철학과 과학이 상반된 길을 걸어왔다고 하더라도, 두 학문은 본디 '본질'에 가닿는 것,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인 것이다.

과학자인 현의 행동은 진리를 찾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가 왜 환수고교로 오게 되었던가? 그가 왜 과학부를 만들어 휘나 체이스나 레이나와 친교를 맺으려 하였던가? 그 이유는,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욕이 아니었을까? 그 혹은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우정이란 것이 어떻게 성립되는 것인지, 현에게 궁금했던 것은 그의 시야에 잡히지 않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현상이 아니라 본질이며, f(x)가 아닌 x다. 요컨대, 과학자로서 그가 추구했던 것은 일종의 과학적인 진리(체계 자체의 구조를 포함해서)였던 것.

현이 늘어놓는 장황한 과학적 지식, 논리적 사고과정, 극도로 이성적인 모습, 지극히 회의적인 습성들은 그가 명실상부한 '과학자'임을 알기 좋게 조형적으로 보여주는 면모이다. 그리고 그런 외형적인 모습에 의해, 현=과학자 라는 도식을 전제하고 글을 읽는 독자들은 그가 추구하는 목적 또한 과학적인 목적일 것이라고 쉬이 추론할 수 있게 된다. 글의 행간을 읽지 않아도 '그럴 듯하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여쨌든, 이 글의 주인공은 과학자인데다가, 위에서 언급했듯이 과학자로서의 현의 조형성은 그의 행동 역시 과학자의 행동으로 해석되게 한다. 더군다나 이 글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진 존재는 현. 먼치킨적인 능력으로 위기를 해결해나가는 존재는 다름아닌 주인공 현이다. 그러니, 환수고교는 본질적으로 과학자의, 과학자에 의한 소설이다.

그렇다면 내가 왜 굳이 과학자를 위한 소설이라는 부제를 달았을까? 그 이유는 별 게 아니다. 내가 해석해 받아들인 다양한 정보의 단편들이 궁극적으로는 '과학'이라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사례를 들어보자.

환수고교의 핵심갈등은 인간계와 환계의 생존다툼이다. 현 상태가 계속되다간 인간계의 생명력이 고갈되어 인간계가 자멸하기에, 환계를 침공해 환계의 생명력을 빼앗아 오겠다는 것. 주인공 현이 이 갈등을 '해결해야하는 문제'로 간주하는 이유는, 인간계의 가디언들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인간계의 생명력 고갈'이라는 명제의 참 거짓이 불명료하기 때문이다. 인간계가 필연적으로 멸망할 것이라는 가디언의 예측은 과학적 탐구의 결과가 아닌, '예언'에 불과하다. 예언은 종교적으로 해석되어야하는 것이기에, 예언의 옳고 그름은 과학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언은 과학적으로 회의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믿어져야'하는 것이다.

현은 예언을 맹종하는 가디언들을 '폭력'으로 간주했을 지도 모른다. 예언의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오직 예언이 진리임을 믿는 것이 중요할 뿐. 예언이 시작부터 반증불가능하다면, 남은 방책은 예언을 피하는 것밖에 없다. 그래서 가디언들이 택한 것이 환계의 침략이었고. 이들의 행동은 해일을 막기 위해 포세이돈에 처녀를 바치는 고대인들의 행동과 별 다름이 없다.

내가 읽으면서도 저열하다고 느꼈을 정돈데, '이상적인 과학자'인 현으로서는 얼마나 보기 못마땅하고 추악했을까. 정당한(혹은 과학적인) 이성의 부재는 쉽사리 폭력으로 연결된다. 이성의 원칙이 없다면 힘의 원칙이 지배할 뿐이니 말이다. 타인을 해하는 것이 그릇되었다는 이성적인 윤리관과 자신의 행동이 일으킬 결과를 반성할 능력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상상력이 없다면, 인간사회는 약육강식의 치열한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은 과학은 과학 방법론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가설->가설의 검증->이론화 라는 간략한 도식에서, 가설의 제시는 과학자 자신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단계이다. 그래서 과학의 객관성은 가설을 검증하는 단계, 즉 과학 방법론에 의해 정당화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과학 방법론은 공동체의 건전하고 자율적이며 다양한 '담론'을 기반으로 한다. 비판을 받았지만, 아직도 임팩트가 강한 포퍼의 과학 방법론(반증의 논리)이 바로 그것.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가설의 옳음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가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는 있다. 가설의 반증은 지속적인 부정의 과정으로만 보이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가설의 '경험적 내용'을 추가해나가는 '누적적 과학진보의 과정'이다. 그리고 가설의 반증이란 과학 공동체 내부의 구성원들 사이의 활발한 의사소통이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그래. Public Science, 공적 과학, 민주주의의 가장 진정한 발현체. 현은 이것의 가장 강력한 대변인으로서 작중에 등장한다. 생명력이 다해 인간계가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은 그에게 있어서 '가설'에 불가했다. 가디언들이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숭앙하던 말던 간에, 검증되고, 틀렸을 경우에는 반박되어야할 가설에 불과했던 것. 그래서 그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가디언들에게 맞선다.

진리는 나의 빛, 이성의 빛은 무지와 폭력과 비합리로 가득한 몽매의 상태에서 인간을 구해줄 것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의 머리가 진보한 이유는, 자신보다 약한 상대에게 박치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과 공존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공존을 통해 가능해지는 '다양성'이 '실패한 인류'가 아닌 '실패한 가설'을 제거하게 하므로. 그리하여 인류는 스스로에 의한 지양에서 벗어나, 아포리아를 돌파해,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

현의 행동, 인간계와 환수계의 갈등, 기타 수많은 요소들의 근저에, 나는 위와 같은 '과학적인 경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외부의 현실에서는 수많은 권력요인에 의해 흐려지고 요원해보이는 과학자의 이상향이지만, 환상을 토대로 한 소설 안에서는 그 이상향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원초적이고 광기적인 폭력을, 이성적이고 민주적인 과학의 논리가 해소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과학자들의 아스라한 꿈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과학자를 위한 소설..이라는 마지막 말은 이렇게 설명하려한다. 약간 끼워맞춘 감이 있긴 한데, 전문적인 감평이 아니니 이정도는 괜찮겠지.

사족. 괜히 글이 길어졌는데, 3권이라는 분량이 가장 아쉬웠던 것 같다. 5권 정도만 되었어도 충분히 얘기가 풀어져나갔을 것 같은데.. 토돌 님이 후기에서 언급하셨듯이 후반에 가서는 커다란 덩어리들이 글 속에 융합되지 않고 턱하니 자리만 점유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족 2. 토돌 님은.. 아무래도 판타지 보단 SF를 쓰신다면 더 기대될 것 같다. 과학 분야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거니와(전기공학 박사 과정이시니), 실질적인 공학을 넘어선 과학철학이나 과학 방법론에까지 손을 뻗으시는 걸 보니.

사족 3. 과학 방법론에 대해 간략히 요약해놨던 글이 있어서 출처를 남긴다. http://www.munpia.com/bbs/zboard.php?id=fr1&page=1&sn1=&divpage=26&sn=on&ss=off&sc=off&keyword=마셜&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48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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