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회귀물, 혹은 역행물.
한 때 한국 대여점시장에서 유행했던 소설 중에는 회귀물이라는 장르가 있다. 웬만한 독자라면 한 번 쯤 읽어봤을 것이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 주인공이 오래전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이야기. 미래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은 이를 통해 현실을 바꿔나가고, 대부분의 경우 더 좋은 결말을 맞이하며 끝나게 된다. 거의 틀에 박힌거나 다름없는 구조에 우려먹을대로 우려먹어 더 나올 것도 없는 장르. 그러나, 최근 나오는 신작들 중 이 회귀물의 수가 점점 다시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회귀물의 유행이 다시 돌아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1.역천마제.
역천마제는 최근 새로 출간된 신작 무협소설이다. 전진검이라는 작가는 이번 역천마제가 첫 출간인듯 싶은데, 여러모로 새롭게 등장한 신인답지 않다. 일단 필력이 좋다. 플롯도 탄탄하고 캐릭터도 잘 짜여있다. 결정적으로 이 글은 재밌다. 최근 나온 무협소설 신작 중엔 최상급이라 해도 틀린말이 아닐것이다.
역천마제의 시작은 한 암살자가 자신이 속했던 암살집단을 스스로 지워버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암살집단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임무는 무림 최고수인 무림맹주를 암살하는것. 최후의 임무를 받아들인 주인공은 10년간 무림맹주를 암중에서 지켜보며 암살기회를 노린다. 단 한순간 기회를 잡게 된 주인공은 무림맹주를 습격하지만, 끝내 그와 동귀어진해 죽고만다.
수십년전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은 거리를 굴러다니던 거지 고아로서 다시 눈을 뜬다. 아직 암살단에 들어가기 이전, 아무와도 연이 없는 상황. 그는 암살자로서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나서기 시작한다.
2.먼치킨물로서의 역천마제.
회귀물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 미래의 기억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작가들은 이 것을 철저하게 주인공의 능력으로만 연출하는데 주력한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한 번 겪어봤다는 것은 굉장한 이점이다. 주인공은 이를 통해 기연을 얻고, 앞날을 내다보고, 인재를 끌어모으고, 기타등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낸다. 때문에 대부분의 회귀물은 먼치킨물이다. 실력 없는 작가들은 이런 주인공의 주체할 수 없는 먼치킨성을 이기지 못해 작품을 망치기도 한다.
역천마제 또한 먼치킨물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전생에 살림 최강의 살수였던 무영은 10살 꼬마의 몸으로도 무척 강하다. 과거의 경험을 쌓아 금새 고수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역천마제는 평범한 먼치킨물 이상을 보여준다. 최강의 살수였던 무영은 스스로의 짧은 말버릇을 고치지 못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떠도는 모습을 보인다. 간신히 마굿간지기 밑에서 일을 구하지만, 이번에는 그의 살기를 견디지 못한 말들이 병에 걸려 쫓겨나고 만다. 강력한 고수였던 그가 굴욕을 겪으며 '사람들이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중얼거리는 모습은 상당히 우습다.
역천마제는 강력한 주인공에 의지해 이야기를 전개하는 한편, 그런 주인공의 부족한 면을 보여줌으로서 독자의 즐거움을 유발하는 훌륭한 먼치킨물이다.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두고봐야겠지만, 전진검 작가의 필력이라면 아마 독자가 실망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싶다.
3.새로운 삶, 과거의 인연.
끝내 이름높은 기루에 일자리를 구하게 된 무영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고독한 인생을 걸어왔던 그는 기루 사람들과 엮이며 여러가지 색다른 감정을 깨닫게 된다. 그 과정에서 완벽한 암살자였던 무영이 자신의 결점을 하나 둘 깨닫는 모습은 자못 인상적이다.
그렇게 점차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던 그는 어느순간 익숙한 얼굴과 마주치게 된다. 자신이 10년간 지켜봤던 남자. 10년간 자신의 인생을 털어놓던 노인. 미래의 무림맹주가 될 청년을 바라보며 무영은 뭐라 쉽게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암살자로서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온 무영에게 그는 유일한 과거의 인연이었던 것이다.
좋은 회귀물을 만드는 요소는 두 가지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주인공의 변화와 이러한 변화 속에서도 주인공이 끝까지 간직하는 인연.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회귀물을 통해 나름대로 내려본 해답이다. 이 두 가지 키워드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있어 작품이 회귀물로서 가지는 수준을 측정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역천마제는 회귀물로서도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4.결론.
회귀물이란 소재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척 진부한 클리셰다. 틀에 박힌 구조에 우려먹을대로 우려먹어 색다른 맛을 보긴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회귀물이 재미 없는 장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회귀물에는 아직 그 나름의 저력이 숨어있다. 요즘 새로 나오기 시작한 회귀물 신작, 그 중에서도 신인 작가의 뛰어난 필력으로 쓰여진 이 역천마제는 우리가 잊고있던 매력을 다시 일꺠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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