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칭은 생략합니다.
내가 쓴 글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본 사람이라면 내가 비뢰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부정적임을 대충은 짐작하리라 본다.
그렇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비뢰도를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물론 비뢰도가 무협을 모르던 10대들을 무협의 세계로 이끈 공로를 애써 무시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또한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글이 고무줄처럼 늘어지고 있다 라든지 그 가벼움에 대해서도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비단 비뢰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최근의 먼치킨을 비롯한 신무협 판타지 전반에 통용되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굳이 비뢰도만을 거론하는 것은 비뢰도가 차지하는 상징성이 가장 크기 때문임을 미리 밝혀 둔다.
그렇다면 나는 왜 비뢰도를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걸까?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한 번 풀어 보겠다.
첫째, 비뢰도에는 무협적 향수가 전혀 없다. 달리 말해서 무협의 정통성 면에서 보자면 이단이라 할 만하겠다.
몇 번 언급했지만 나는 김용의 소오강호를 무협의 전형 내지 교과서로 생각한다.
권력의 허무함을, 강호의 무정함을 창해을 가르는 한바탕 웃음으로 비웃어 주고 떨쳐버리는 강호인, 전통의 명문 구파일방, 명교, 정과 사를 초월한 사랑과 우정 그리고 동문 사형제 간의 두터운 정.
그야말로 무협적 요소라 할 만한 것이 총 망라된 소오강호야말로 무협의 교과서라 불릴 만 하지 않은가?
이 무협적 요소라는 것이 엄연히 개인적 시각차가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겠지만 또한 김용을 비롯한 중국무협작가들의 작품에서 비롯되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하리라.
그런 면에서 볼 때 비뢰도에서 무협적 요소를 찾는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화산파의 제자로, 공동파의 제자로 산속을 유유히 거닐며, 때로는 구주팔황을 질타하며 무와 협행을 이루어 가는 무인이 등장하는 무협소설만 고집한다는 것이 너무 고루한 생각일까?
그렇다면 다양성의 입장에서 비뢰도 역시 인정해야 되지 않을까?
재미만을 생각한다면 쉽게 인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의 다른 기능(사상과 가치관 전파)과 무협의 질적 측면을 고려한다면 역시 쉽게 수긍하기는 힘들다.
여기서 무협의 질적 수준을 논하는 것도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배경지식이 다르므로 각자의 수준을 객관적인 잣대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 객관적인 잣대의 하나로 진정성을 들고 싶다.
둘째, 무협과 판타지의 모호함이다.
비뢰도를 읽는 내내(8권까지) 나는 과연 이 글을 무협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단지 무협의 끝자락에 한 발 내밀고 있는 판타지가 아닐까?
혹자는 퓨전 장르라고 부르며 이것이야말로 시대의 대세요 흐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이것이야말로 무협의 진정한 맛을 모르는 이의 궁색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좌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신무협 ·경향무협이라는 명칭에 가장 어울릴법한 작가임에는 분명하지만 신무협·경향무협의 단점(무협적 향수가 풍부하지 않다-개인적 견해임)이 그의 글에서 고스란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강호를 꿈꾸고, 한 자루 칼과 더불어 강호를 거닐게 만드는 재주. 이것이야말로 무협의 의미이자 정화요 진정한 맛이라 하겠다.
수년간 중국무협이 소개되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독자들이 중국무협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무협을 무협답게 만드는 그 무언가의 향수가 진하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비뢰도에는 이것이 없다.
범위를 좀더 확장해 보면 최근 신무협 판타지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한국무협은 태생적 한계로 인해 판타지 성향이 강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최근의 신무협 판타지는 그 도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셋째, 비뢰도 류의 작품들이 무협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대중에게 어필하고 잘 팔린다고 해서 결코 양질의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것이 흥행을 최우선으로 하는 장르문학의 특성이라고 해도.
진정성이 근저에 깔려 있지 않는 한 사상누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
내가 비뢰도 류의 글들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 바로 글 속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뢰도의 성공이 한 때의 유행이라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것이 주류로 등장한다면 많은 문제를 양산할 것이 분명하다.
우선은 최근 2-3년 새 등장한 작가들의 글에서 진정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 우려할 만하고, 진정성 있는 글을 발표하는 몇 남지 않은 작가들이 도태될까 하는 생각이 더욱 두렵게 만든다.
여기서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다.
왜 진정성이 녹아있고, 재미와 완성도 역시 뛰어난 작품들이 좀 더 많이 팔리지 않는 것일까?
누구나 인정하는 장경, 임준욱 등의 글이 비뢰도 보다 많이 팔리지 않는 것일까?
쉽게 답할 성질의 의문이 아니므로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질문하는 것으로 대신하겠다.
결론을 짖자면, 글이 늘어진다는 것, 가벼움, 재미의 있고 없고, 그 모두를 떠나서 비뢰도가 과연 무협소설로서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졌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자칫 무협의 다양성, 상대성을 해치는 얘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무협적 향수의 절대적 빈곤함이 느껴지는 글이다 라는 것에는 의문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비뢰도를 일방적으로 나쁘게만 평하는 것 역시 잘못된 일이지만 그것조차도 비뢰도가 그 근저에 진정성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상응하는 대접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어느 때보다 독자들의 감시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싶다.
진정성이 담겨 있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을 가려내고, 담겨 있는 글에는 열렬한 호응을, 그렇지 않은 글에는 무거운 질책을 가할 때이다.
출간되는 모든 무협소설에 진정성이 묻어 나온다면 그날이 바로 무협이 양지로 나서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러면 무협소설이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당당히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테고, 태백산맥이나 장길산에 견줘도 부족함이 없음을 인정받는 날이 오지 않겠는가?
추록.
요 근래 감상글을 쓰면서 내가 지나치게 매니아적인 성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내공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진정성이 있는 글이라면 누구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즉 내공이 일천할지라도 진정성 있는 글은 쉽게 알아본다는 것이다. 그 가치를 만끽한다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이 진정성이라는 것이 무거운 글에만 있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벼운 글, 코믹한 글, 먼치킨에도 분명 존재 할 수 있다.
그것을 풀어낼 수 있는 재주는 물론 작가의 노력여하에 달려 있다 하겠다.
Comment '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