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감상

추천에 관련된 감상을 쓰는 곳입니다.



송진용 / 풍운제일보

작성자
Lv.12 드니드니
작성
11.11.16 00:20
조회
4,594

작가명 : 송진용

작품명 : 풍운제일보 1권, 94-96쪽

출판사 :

소름이 오도독 돋더군요...

--------------------------------

두위와 마석산이 삼우각이 보이는 능선에 이른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언덕 아래는 벌써 짙은 땅거미가 깔려 있었다.

해양촌의 사람들은 언제나 부지런했다.

이른 새벽부터 낮 동안 쉬지 않고 일하고, 어두워지면

곧 잠이 들었다.

오늘도 그와 같아서, 하루의 피곤을 씻기 위한 긴 안식의 시간이

해양촌을 두텁게 덮어가고 있었다.

'나의 유년을 보낸 곳'

막막한 정적에 잠겨들고 있는 해양촌을 내려다보면서

두위는 다시 옛날의 아련한 기억들을 순서 없이 떠올렸다.

언제나 이 곳에 오면 곤한 발길을 멈추고 지금처럼 이렇게 서서

멍하니 해양촌을 내려다보며 떠올리는 생각들이 있었다.

천천히 언덕을 내려와 마을을 지나가자 어둠 속에서

개들이 컹컹 짖었다.

습하고 차가운 바람 속에 옅은 물 냄새가 맡아졌다.

멀지 않은 곳에 풍천강이 있는 것이다.

말이 강이지, 실은 조금 큰 개울에 다름없었다.

여름이면 그래도 제법 많은 물이 급류를 이루며 흘러갔지만,

이처럼 가을이 깊어갈 무렵이면 거의 바닥이 드러나

강 가운데까지 첨벙거리며 들어가 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물소리가 들리는 곳에 이르러 잠시 걸음을 멈춘 두위의 눈길이

저만큼 어둠 속에 잠겨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대나무 숲이 쏴, 쏴 하고

먼 데서 파도가 치는 듯한 소리를 냈다.

그 오른쪽으로 굽고 휘어진 낙락장송들이 빼곡한 송림이 있고,

송림 한가운데에 오래된 신당이 있었다.

어느 마을에나 흔한 것이 관공의 사당이듯이

해양촌에 모셔져 있는 신도 그 관공이었다.

지금도 사당 안에는 옻칠이 벗겨진 관공이 청룡도를 세워 든 채

근엄하게 앉아 있을 것이고,

낡은 청동의 향로에는 저물녘에 촌장이 꽂아두고 간 향이

거의 다 탄 채 희미한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을 것이다.

어디선가 밤 부엉이가 울었다.

'그날 밤도 이랬었다'

두위는 어둠 속에 더욱 어둡게 잠겨 있는 송림을 바라보며

그녀를 생각했다.

언제나 이 곳을 지나갈 때면 떠오르는 그날 밤이었다.

"채영경이야."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는 붉은 입술이 열에 들떠 파르르 떨렸다.

흑룡보 안에서는 누구든 그녀를

단지 채 소저라고만 불렀기 때문에

두위는 그때까지도 그녀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바보."

떨고 있는 두위에게 하얗게 눈을 흘겨 보인 영경이

무너지듯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두위는 불과 열여섯 살에 지나지 않은 아이였다.

덩치는 이미 장정만해져 있었지만,

열여덟인 그녀와는 세상을 알고 남녀의 일을 아는 데 있어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녀가 보의 서쪽 구석에 있는 대장간 뒤에서

손등을 살짝 꼬집으며 쪽지를 건네주었을 때

두위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해가 지고 달이 삼우각 위에 걸릴 무렵 관제묘에서 만나자는

글귀를 읽고는

그게 무언지도 알지 못한 채 풀무처럼 가슴만 뜨겁게 달아올라

벌렁벌렁 뛰었다.

이른 저녁을 마치고 곤히 잠든 아버지를 보고 나서

살금살금 보를 나와 송림을 보고 뛰어가는 걸음이

구름을 탄 것처럼 허둥거려졌다.

발바닥에 와 닿는 땅의 감촉이 솜덩이인 양

물렁거리기만 했던 것이다.

해양촌의 신당까지는 삼우각을 등에 올려놓고 있는

험한 산 능선 하나를 넘어 이십여 리 길을 가야 했다.

어둡고 적막한 그 산중을 두려운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달려 내려왔다.

첨벙거리며 풍천강을 건너고 단숨에 마을을 지나

송림에 이르렀을 때는 숨이 턱에 차 있었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나무 가지 사이를 스쳐 가는 바람 소리가 우우, 우는 듯했다.

머리 위를 낮게 날던 부엉이가

호리병을 부는 듯한 쉰 소리로 울었다.

왈칵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드는데,

어둠 속에서 작은 손 하나가 불쑥 뻗어 나와 팔목을 꽉 쥐었다.

깜짝 놀라 소리치려는 그의 입을 부드러운 손바닥이 꼭 막았다.

귓전에 단 숨결이 뿜어졌다.

온몸이 간지러웠다.

"벌써부터 기다렸는데 왜 이제야 온 거야?"

눈을 흘긴 그녀가 두위의 손을 끌고

재빨리 관제묘 안으로 들어갔다.

두위는 어정쩡한 모습으로

영경의 둥글고 부드러운 어깨를 품어 안았다.

야릇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게 했다.

두위의 얼굴이 곧 울려는 듯 찡그려졌다.

"바보."

영경이 더욱 품으로 파고들며 다시 더운 숨을 뱉어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고 어깨도 가늘게 떨렸다.

두위의 가슴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방망이질을 쳤다.

가슴 앞 옷깃을 풀어 헤치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이, 이러지 마......

보주님이 아시는 날이면......."

가슴에서 떼어놓으려고 할수록 영경은 더 큰 힘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온 몸이 불덩이 같았다.

두위의 머리 속에 보주의 무서운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온전히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상관 없어. 지금은 나만 생각해."

영경이 달뜬 음성으로 귓밥을 깨물며 속삭였다.

큰 바위에 눌리듯 숨을 헐떡이며 가슴으로 연경을 안고 넘어졌다.

그녀의 몽롱한 눈동자가 이마에 떨어졌고,

붉은 입술이 불처럼 입술 위에 찍혔다.

이런 느낌을, 이런 감정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다.

두위는 기껏 열병에 걸린 것 같다는 생각을 그 순간에 하고 있었다.

언제던가, 열에 들떠 아득히 가라앉아 가기만 하는 꿈 속에서

하늘을 훨훨 날아다녔었다.

곧 떨어질 것만 같은 두려움과 아무 것에도 매달려 있지 않은

자유로움, 그 꿈을 다시 꾸고 있다고 여겼다.

그녀의 손가락들이 벌거벗어진 가슴팍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였다.

귓가를 달구어놓던 영경의 뜨거운 입술이 가슴에 닿았다.

그리고 와들와들 떨리는 가늘고 고운 손가락이 주춤거리다가

고의춤으로 쑥 파고들었다.

"윽!"

두위는 온 몸을 펄떡거리며 놀란 비명을 터트리고 말았다.

두 달 뒤 그녀는 생애에 있어서 가장 화려할 옷차림을 하고

머리에 화관을 쓴 채 마차를 타고 멀리 귀주로 떠났다.

검령산 상왕령에 있다는 옥수궁의 소궁주와 혼약하기 위해서였다.

오십 명이나 되는 흑룡보의 무사들이 오십 필의 흑마에 올라타고

늠름한 기상을 뽐내며 마차를 호위했다.

예물을 실은 수레가 둘이었고, 계집 종 다섯이

영경을 따라 보를 나섰다.

보주를 대신해서 염 집사가 그 거창한 행렬을 이끌고 떠날 때

두위는 사당이 있는 송림 앞에 넋을 잃고 서 있었다.

해가 머리 위에 떠올랐을 무렵

영경의 마차가 해양촌을 향해 다가왔다.

송림이 있는 언덕 아래를 지나가던 마차의 휘장이 살짝 걷히고

그리로 영경의 얼굴이 보였다.

언덕 위의 송림과 그 앞에 서 있는 두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위는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낸 영경이

창 밖으로 그것을 떨어트렸다.

두위의 손에 그 때의 손수건이 들려져 있었다.

눈처럼 희던 그것은 지난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빛이 바랬고,

네 귀퉁이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분홍색 연꽃도

이제는 초라하게 시들어 있었다.

'뭐야? 처음 보는 건데?'

마석산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손수건을 가리켰다.

한 번 웃어주고 지나쳐 온 송림을 돌아보는 두위의 얼굴이

아련한 아픔으로 젖어들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품에서 떼어놓은 적이 없는 손수건이었다.

그것에 가득 배어 있던 달콤한 체취는 사라졌고,

뚜렷이 남았던 눈물 자국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두위는 손수건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을 보고 느꼈다.

무섭도록 외길로만 치달려 왔던 지난 십 년의 세월 속에서도

그 때의 영경은 작은 손수건 한 장 속에 화석이 되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 송진용, 풍운제일보, 1권 94 - 96 에서...


Comment ' 1

  • 작성자
    Lv.99 惡賭鬼
    작성일
    11.11.19 23:18
    No. 1

    연재 당시의 인기, 작품의 통쾌함 모든 면에서 송진용 작가의 대표작이라 할만하죠... 다만 원제 '귀도'가 훨씬 더 시장에서 먹힐만한 제목이었는데 풍운제일보로 바꾼게 다소 악수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도 정액끊어놓고 신간 다 보면 찾는 책 중 하나..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감상란 게시판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6461 퓨전 흑도현세 미니리즘 있습니다. +1 Lv.12 악마왕자 11.11.21 1,488 2
26460 판타지 [이에는 이]를 읽다 +9 Lv.22 리자드킹 11.11.21 2,292 3
26459 자연도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곤충 이야기 를 읽고 +4 Lv.22 무한오타 11.11.21 1,566 0
26458 무협 절대강호 7. 8 +5 Lv.13 얼음꽃 11.11.21 2,787 0
26457 판타지 권왕전생 7권 +9 dk2400 11.11.21 3,312 1
26456 판타지 본격신앙간증소설 브라반트의 흑기사 +13 Lv.99 Maverick 11.11.21 3,662 7
26455 퓨전 샤피로. 의심하고, 분노하는 주인공 +22 Lv.72 알퀘이드 11.11.20 4,770 4
26454 퓨전 삼국지 물의 최고봉! 같은 꿈을 꾸다 IN 삼... +10 Lv.67 superior.. 11.11.20 4,783 7
26453 판타지 프로스타 대륙전기를 보고 +7 Lv.3 suud 11.11.20 2,910 0
26452 무협 용중신권-네타 +7 Personacon 용세곤 11.11.19 2,950 0
26451 무협 와룡성수-3권(네타) +2 Personacon 용세곤 11.11.19 1,437 0
26450 판타지 프로스타대륙전기 4권 강추 네타조금 +3 Lv.3 대왕세종 11.11.19 2,428 1
26449 퓨전 그 마법사의 사정 +7 Personacon 블랙라벨 11.11.19 3,140 1
26448 기타장르 선입견을 버리자. '내가 법이다', '머셔너리' +6 Lv.71 소슬비가 11.11.19 3,798 5
26447 무협 황금공자 +7 Lv.24 리부인 11.11.18 3,398 0
26446 무협 수준이 다르다고...... Lv.18 che 11.11.18 3,835 9
26445 무협 절대강호 8권...행복해지고 싶습니다 +14 Lv.8 상냥한검풍 11.11.17 5,499 11
26444 인문도서 일곱 개의 고양이 눈. 최근 읽은 것 중 최... +1 The Dark A 11.11.16 2,521 1
26443 퓨전 파슈파티 +14 Lv.1 고추장국 11.11.16 3,982 2
26442 무협 군림천하 (과도한 미리니름 주의) +14 Lv.69 사자인 11.11.16 6,158 4
» 무협 송진용 / 풍운제일보 +1 Lv.12 드니드니 11.11.16 4,595 1
26440 무협 좌백/비적유성탄... 어마어마한 필력... +22 Lv.12 드니드니 11.11.15 7,672 20
26439 판타지 폭염의 용제 9권 =순간 떠오른... +14 Lv.99 kimbh 11.11.15 3,555 1
26438 일반 꼭 이래야 했을까 : 그로테스크-기리노 나쓰오 +3 Lv.29 스톤부르크 11.11.14 3,789 0
26437 판타지 나이트워커 1,2권을 읽고.. +15 Personacon 시링스 11.11.14 3,902 1
26436 판타지 샤피로 9권 감상.. +11 Lv.1 赤月滿歌 11.11.14 4,387 2
26435 무협 귀환 진유청 9 +5 Lv.13 얼음꽃 11.11.14 4,419 1
26434 무협 매화검수 8 +6 Lv.13 얼음꽃 11.11.14 3,044 1
26433 퓨전 요새 재미있게본 장르소설들 +3 Lv.67 무풍검신 11.11.13 4,605 0
26432 판타지 불멸의 대마법사(1-3권)~ +4 Lv.1 케로파스 11.11.13 3,240 0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genre @title
> @subject @time